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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영화 6-<불한당>과 <브이아이피>

신의 영화들/FILM FLOATING

by 폴사이먼 2017. 12. 27.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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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불한당>은 <신세계>와 같은 그런 전형적인 길로 나아가지 않았다.<불한당> 은 폭력의 관성,대결의 균형점,서사의 의례적인 종결이라는 영화적 타협안을 거부하고,형으로서의 조폭-동생으로서의 위장경찰,두 인물 만을 오롯이 남겨 두는 선택을 한다.나머지 인물들은 대부분 죽는다.설경구 쪽 폭력 조직 인물들도,임시완 쪽 경찰 캐릭터들도 대부분 죽어버린다.(또는 제거한다)


영화는 죽어버린 사람들에게 '나쁜 놈들의 세상'이라는 부수적인 타이틀을 달아주고 모조리 다 없애버리는 것이다.어떤 의미에서 그들 -설경구와 임시완을 제외한 나머지 나쁜 놈들 말이다- 은 사랑에 조차 빠지지 않았으므로 몹시 합리적인 죽음으로 처리되고 있다는 기분 마저 든다.조폭은 그렇다 치더라도 경찰관들까지도 결정적이고 비정한 배신과 거짓말을 일삼고 있으므로 영화는 그들 역시 나쁜 놈들의 범주에 집어 넣어버리는 것이다.심지어 전혀 무죄한 (Innocent) 사람인 경찰관 임시완의 엄마 마저 교통사고를 가장한 살인 사건으로 살해 당하기까지 한다.(사실 굳이 이 에피소드가 없었어도 영화의 내러티브에 큰 걱정을 가져오지는 않았을 것이다.엄마 살해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된 임시완이 사랑의 최후 배신을 감행하긴 하지만,그 배신이 전형적인 복수극처럼 보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즉 임시완은 설경구가 어머니의 죽음에 직접적 관련이 있기 때문에 그를 배신하는 게 아니라,설경구가 자신의 진심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나아가서 자신 역시 그에게 언제나 거짓말을 할 수 없는 구조에 처해 있기 때문에,즉 관계의 한계를 절망 속에서 명확하게 인식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설경구를 배신하는 것이다.즉 그들의 관계는 모든 타인들,또 모든 다른 요소들이 철저하게 배제된 상태에서,오직 둘만이 존재하고 그 둘 사이의 처절한 믿음이 전제되는 구조,즉 비극적 사랑의 구조로 변해 버린 것이다.



그들이 동성애에 빠졌다는 것이 아니다.이제 남초-알탕 영화는 영화 내적으로 언제나 유지해 왔던 관계성에 만족할 수 없어졌고,결국 또다른 감성적 탈출구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는 뜻이다.탈출에 필요한 것은 관계성의 확장인데,남초 영화라는 자생적 한계 때문에 이 확장을 여성 캐릭터 없이 수행해야 했고,남아 있는 선택은 자가발전 외에는 찾을 수 없게 되었고,살해라는 논리적 귀결에 이르르게 된 것이다.




이것이 영화 말미에 임시완이 설경구를 - 1990년대에 나온 비극적 사랑에 관한 영화 <베티 블루>의 연인 살해 장면을 그대로 카피하여- 죽일 수 밖에 없는 이유다.내가 이런 종류의 감성적 결말이 남초-알탕 영화의 마지막 막다른 골목이라고 생각하는 또다른 이유는,우리 영화나 드라마가 감정적 폭발 - 희로애락이라는 - 없이는 대부분 잘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완벽하게 건조한,또 차갑게 이성적인,감성이나 감정을 배제한 남초 영화가 나타날 수 있다면,그것이야말로 알탕 영화의 새로운 길이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그 정도의 상황에서 마저 여성 캐릭터를 배제하게 된다면,그것은 이미 옳고 그름이나 선악의 피안을 아주 멀리 넘어가 버린 전혀 다른 영화적 태도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그래서 아마 시도 조차 하기 어려울 것이다.(현재의 한국영화 환경에서는)


그러므로 남-남 간의 케미는 당분간 지속되고 또 지속될 것이다.우리는 영화관에 가서 남자들이 득실거리는 영화를 보고 또 볼 때마다 이런 종류의 사랑과 배려를 목도하게 될 것이다.그리고는 생각하게 될 것이다.아,얘들이 지금 막다른 골목에 서 있구나..라고.


10.<브이아이피>


<브이아이피>의 감독은 <신세계>의 박훈정이다.그는 <신세계>로서 남초 영화의 한 획을 그은 사람이다.그리고 2017년의 그는 또다른 남성 위주의 영화 <브이아이피>를 만들었다.규모가 커졌다.조폭과 형사만 등장하는 게 아니라,북한 지배층이 등장하고 북한군이 등장하고 CIA와 국정원이 등장한다.국제 정치와 남북 관계가 배경이 되며 영화는 한국을 떠나 중국과 동남아시아로 날아갔다.거기에 각 세대를 아우르는 대표 배우들이 등장했다.대표적인 연기파 배우라는 김명민이 신의 한 수가 되리라고 여겼을런지도 모르겠다.아마 각각의 배우 자신들 역시 자신감으로 넘쳤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실패작이었으며 참 심하게도 못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박훈정은 거대해진 규모를 제대로 핸들링하지 못했으며 배우들 사이의 폭발력도 이끌어내지 못했다.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났으며 ,배우들은 여기저기 이리저리 열심히 뛰어다니다 죽거나 죽이거나 다치고는 사라져갔다.감도가 서로 다른 배우들-간절한 김명민과 고요한 장동건,근본주의적인 박휘순과 얼마든지 연쇄살인범적인 캐릭터를 연기할 수 있었던 이종석-은 겉핥기식으로 부딪치다가 그냥 스크린 뒤로 퇴장했다.


심지어 알탕 영화스러운 남-남 관계를 만드는 것에도 실패한 것이다.성긴 과잉들이 부실한 우주를 떠돌다가 끝나버렸다.좋지 않은 영화들에 코멘트하길 싫어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는 나로서는 - 나는 내 인생의 소중한 순간들을 그런 영화에 쏟아부었다는 사실 자체를 괴로워한다.더구나 리뷰까지 쓴다는 것은 어림 반 푼 어치 없는 일이다-이 영화에 어떤 이야기를 남긴다는 것 조차도 마땅치 않다.그러나 이 영화의 어떤 부분,그러니까 오프닝 크레딧이 뜨는 그 순간까지의 어떤 장면들에 대해서는 도무지 얘기하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북한의 고위층 자제들이 시골길을 걷던 소녀를 납치 감금해서 고문하고 성폭행하고 죽이는 긴 장면들이다.나는 이 몇 분 안되는 장면을 보자 마자 약간의 호흡곤란을 느꼈고 내가 앉아있는 장소에 대한 혼란에까지 빠져들었었다.그리고 영화를 만든 사람들의 정신상태까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어졌다.속이 울렁거리는 통에 이 장면이 지나간 후에도 영화에 집중하기가 힘들었었다.그러나 이 장면엔 이 영화의 어떤 면을 확실히 대변하는 어떤 요소가 있었다.그래서 울렁거림을 무릅쓰고 어둠의 경로를 통해 이 영화의 첫 장면을 다운로드했다.




이 영화의 첫 장면은 사람을 죽이는 장면이다.피해자인 소녀가 묶인 채 누워 있는 긴 사각형 테이블 주위에는 술에 취한 채 홀딱 벗은 청년들이 카메라와 휴대폰을 들고 둘러 서 있다.그들 전체의 모습을 촬영하고 있는 카메라가 왼쪽에 놓여 있는 걸로 보아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를 굳이 감추려고도 하지 않는다.그들은 이미 소녀에게 마약을 주사했으며 결박시킨 후 폭행했으며 윤간했다.피가 튀는 것을 혐오하는 탓인지 비닐 우비를 입고 뒷짐 진 채 서 있는 주범 이종석이 곧 그녀를 교살하게 될 것이다.범인들은 그들 나라에서 아버지라 묘사되는 김일성-김정은 부자의 눈길 조차 무시하고 있다.무한한 고통과 비뚤어진 인간성이 묘사되는 그야말로 현대의 지옥도다.


그런데 이것은 그냥 포르노다.스너프 필름이다.내용 뿐만 아니라 연출된 감각과 방법 자체가 포르노이자 스너프 필름이다.이들이 인간 말종이라는 사실을 극적으로 묘사하기 위해서랄지,나중에 김명민이 뜬금없이 비아냥대는 이종석의 성불구 때문에 벌어진 살인이랄지 하는 변명들은 그냥 핑게에 불과하다.이렇게까지 기나긴 잔혹한 시간을 그것도 오프닝에 투입시키는 경우는 인간성 자체에 내재한 폭력성을 탐구하는 경우 외엔 용인될 수가 없다.


오히려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평소 행태와 더 관련이 있어 보인다.아,그들이 스너프 필름 제작자들이라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그들이 보았던 수많은 포르노 필름들이 저 장면을 만드는 데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며,그것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던 상황'을 '그렇게 '만든 주된 이유라고 보아지기 때문이다.그리고 이것은 남초필름-알탕영화를 제작하는 사람들의 여성에 대한 생각 - 여성혐오라고 콕 집어서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의 일단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다.


여성이 주된 범죄 피해자라고 할지라도 저 정도의 잔혹함을 영화에 전시해서는 안된다.여성 관객 뿐만 아니라 남성 관객들에게도 혐오감을 주는 일일 뿐이다.또 잔혹함을 묘사하는 방법을 포르노 필름들 - 그것도 일본 AV의 - 의 그것을 차용하는 것은 무의식적이든 아니든 수치스러운 일이다.머릿속 창의력이 그 정도의 가엾은 레벨을 유지하고 있다면 앞으로 무슨 영화를 어떻게 만들겠다는 뜻인가.했던 일을 또 하고 또 하다가 끝나게 될 것이다.


<브이아이피>의 오프닝 장면은 한국 남초 영화가 가지는 여성 캐릭터에 대한 묘사 수준을 그야말로 적나라하게 드러낸다.비열하게 소모된 배우들이 불쌍할 지경이다.끊임없는 모니터링이 요구될 걸로 생각된다.우리나라의 하비 와인스타인이 등장할 날도 멀지 않았다.물론 미투 운동이 벌어지면 항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을  꽃뱀으로 몰아붙일 하비의 우리나라 동료들의 숫자도 만만치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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