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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영화-<알탕영화>

신의 영화들/FILM FLOATING

by 폴사이먼 2017. 12. 21.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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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영화 이야기를 하다가 '알탕 영화'라는 단어를 들었다.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냐고 물어보려는데 이어지는 대화들로부터 대강의 답을 유추할 수 있었다.

남성들 위주의 세계를 그리면서 대부분의 캐릭터가 남성들이며 결국 세상을 남성만의 시각에서 바라보게 되는 영화.아마도 그런 게 알탕 영화의 정의인 것 같았다.그리고 알탕의 '알'은 남자 육체의 부속기인 testicle에서 유래된 말인 것 같았고.(솔직히 좀 혐오스러웠다)


그러나  세상에서 만들어진 대부분의 영화가 여성 보다는 남성 위주로 짜여 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홍콩 느와르도 미국의 갱 영화들도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들도 폭력을 소재로 한 영화들도 또 법정이나 감옥을 소재로 한 영화들도 대부분 남성들이 등장하고-물론 공간적 배경상 그럴 수 밖에 없긴 하지만- 여성은 주변적인 캐릭터에 머무른다.사랑을 다루는 영화들 역시 자세히 뜯어보면 여성의 시각에서 다룬 영화들 보다는 남성의 시각에서 다룬 영화들이 수적으로 우세하다.수적 우세? 굳이 통게를 들이밀 것도 없이  남성 영화인들의 수가 여성 영화인들의 수 보다 압도적으로 더 많을 것이다.


그래서 당연히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영화계에서도 남성 위주의 영화에 대한 반기와 의문이 존재한다.꽤 유명한 여성 영화인들이 발언하고 항의해 왔다.우리나라만의 특수한 현상은 아닌 것이다.그러나 우리나라의 소위 '알탕 영화'에는 또다른 이유와 상황이 존재한다.'알탕'이라는 약간은 즉물적으로 느껴지는 단어까지 등장할 정도니까 말이다.


우선 우리나라의 '알탕'에 대한 항의 속엔 젠더적인 꼬투리가 숨쉬고 있다.남성들 위주의 영화가 제작되면서 영화 속 여성들의 존재가 그야말로 미미해진다는 것이다.사실 알탕 영화들 속 여성들은 수적으로 뿐만 아니라 영화적 의미망 속에서도 찌그러지고 위축되어 있다.비중만 작아진것이 아니다.홀대와 몰이해 그리고 작은 혐오가 한국 알탕 영화의 여성 캐릭터들을 향한다.심하게 도외시되어지고 있는 것이다.(그렇다고 다른 나라에서의 여성의 권리와 위치가 우리나라 보다 훨씬 우위에 있다고 단언하려는 것은 아니다)


여성 캐릭터들은 심하게 이상화되거나 -순결한 첫사랑이나 엄마 품을 연상케하는 이해심 넓은 캐릭터로- 천편일률적인 스타일로 스테레오타입화되어 있다.물론 이 타입에도 눈꼽 만큼의 다양성은 있지만 말이다.가령 똑똑하기만 하면서 젠 체하는 캐리어 우먼,몽상가인 남편을 억척스럽게 다루면서도 결국은 남편을 이해하고야 마는 파마머리 아줌마인 아내,또 남성 보다 남성적인 걸 크러쉬 캐릭터까지..,어느 정도의 협소한 다양성은 있다.혹은 있다고 변명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여성들은 남성들의 시각으로 그려진다.남성들의 시각이라니,지나치게 단순화시키는 말이라 사용하기가 좀 그렇지만,우리나라 영화의 여성 캐릭터들을 바라보거나 만들어내는 남성 영화인들의 태도는 그냥 시혜자이거나 수혜자다.그들은 얻거나 주거나 심지어 빼앗긴다고 생각한다.빼앗긴다는 표현이 이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텐데,이 표현은 특히 걸 크러쉬 캐릭터에 대한 영화의 태도에서 곧잘 드러난다.남성 영화인들은 걸 크러시적 여주인공에게 원래는 남성이 가져야 할 배역을 하사하면서 만족감을 느낀다.심지어 어떤 경우 여성 관객들을 위한 위로이거나 여성 관객들을 사로잡을 무기로 사용되기도 한다.그러면서 도덕적 만족감을 느끼는지도 모른다.(시혜자이자 수혜자다) 그러면서 마치 남성적 배역을 여성 캐릭터에게 빼앗긴 것처럼,그렇게 세상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처럼 연기하는 것이다.


게다가 결국엔 여성 캐릭터에게, 우리 사회에서 여성적 속성이라고 불릴 수 있을 심리적 결 하나를  선사하고야 만다.꽤 오래 전 영화인 <조폭 마누라> 속 신은경의 꼭 이루어내야 할 목표가 아이-임신이었듯 2017년에 나왔던 걸 크러시 영화 <미옥>의 김혜수에게도 모성애적 속성이 부여되었다.무려 킬러로 길러진 <악녀> 속 김옥빈은 남성과의 사랑에 목을 맸다.이렇게까지 되고 마는 이유는 꽤나 단순하다.남성들이 영화를 만들기 때문이다.사실상 그들은 여성들을 잘 모른다.깊게 고려하지도 않는다.자신의 주변 여성에게 잘 물어보지도 않는 모양이다. 여성에게 주어져야 할 몫을 생각해야 한다는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태도도 - 그들의 일상생활이 어떠하든 간에 - 스크린으로 진입하는 순간 일정 부분 유야무야 된다.


더 악의를 가지고 얘기하자면 알탕영화를 만드는 남성들의 여성 캐릭터에 대한 태도는 평소 그들이 가지는 여성에 대한 태도와 생각과 유사할 가능성이 높다.또 그들이 속한 계층이나 평소에 어울리는 무리들이 공유하고 있는 여성에 대한 관념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말하자면 한국 영화들 -특히 알탕영화들 - 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들은 한국 남성들이 가지고 있는 여성에 대한 일반적인 관념이나 환상일 뿐만 아니라,한국 영화를 만드는 영화 엘리트들이 가지는 여성에 대한 판타지가 나타나고 있을 개연성이 높다는 뜻이다.


그러다보니 현실에는 잘 나타나지 않는 남녀관계가 형성되기도 한다.예를 들어 최근 한국 영화나 드라마에는 40대 남자 배우들과 20대 여자 배우들의 커플화가 부쩍 두드러진다.-물론 예전에만 그랬던 건 아니다.이런 남녀 주인공들의 연령 차이는 아주 예전부터 한국영화스러운 전통이었다.그러나 예전의 그런 연령차는 적어도 정상적인 커플의 사랑이라기 보다는 불륜 내지 철없는 연애 정도로 그려졌었다- 그리고 영화 속 커플이 현실 속 커플로 변하는 경우도 허다하다.연애계에서 은퇴한지 한참 되어서 최근의 실제 트랜드는 잘 모르겠지만 이런 나이차 커플들이 영화나 드라마에서 그려지는 것처럼 많지는 않다고 여겨진다.그리고 이런 여김이 맞다면 가능성은 두 가지다.


첫째는 영화계의 주류를 이루는 4-50대 남성들이 가지는 판타지의 영화화일 가능성이다.그들의 평소 판타지가 이런 결과를 만들어냈던 것이다.달리 말해 '그러고 싶다' 이 뜻이다.검사와 형사와 조폭이 주로 등장하는 영화가 그리도 많은 룸살롱을 양념으로 끼워 넣는 것도- 물론 검사와 조폭과 정치인이 그런 종류의 밀실을 많이 드나든다는 것은 팩트이기도 하다.그러나 그럼에도 지나치게 많이 등장한다.마치 거기 아님 안된다는 듯이- 영화를 만드는 자본가들의 회합이 그렇게 이루어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거의 모든 알탕 영화들에서 등장하고야 만다.즉 한국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일상적 경험의 한계가 영화 속에 드러나고 반영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이유만 있는 건 아닐 것이다.나이차 연애에 대한 한국 영화와 드라마의 묘사는 각 연령대 남녀 배우들의 불균형이 그렇게 만드는 것일 수도 있다.즉 20대 여배우들은 지나치게 넘치고 20대 남자 배우들이 부족할 때- 숫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40대 남자 배우들이 극중 연애에 어쩔 수 없이 투입되어 나타난 결과일 수도 있다.그러나 여전히 첫번째 가능성에 대한 시각을 팽개치긴 어렵다.사회가 영화를 반영함과 아울러 영화를 만들어내는 주류의 생활 양상과 시각이 영화를 좌우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알탕영화들은 조금 더 진화했다.여성 역할의 축소에만 그 특징이 두드러지는 것이 아니다.이제 한국의 남성영화들은 남성들 내부에서,남성과 남성들 사이의 관계에 의해서 의미들을 엮고 만들어낸다.예를 들어 브로맨스라는 부드러운 단어로 순화되는 남성과 남성 사이의 끈끈해보이면서도 아스라해 보이는 분위기와 관계들이 추구되기 시작했다.과거에는 그저 의리였던 것이 이젠 애정 이상의 고양된 의미로 변해버렸다.알탕영화들 속 남성들의 세계가 좀 더 폐쇄적으로 변해버렸기 때문이다.거기에 여성 캐릭터들이 담당해야 할 몫이 사라지고 축소되자,과거에는 여성과 남성들 사이에서 이루어졌던 관계들의 방향이 남성과 남성들 사이 쪽으로 향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검찰청사 내부,조폭집단 내부,경찰집단 내부에서 벌어지는 숱한 감성적인 브로맨스들의 적어도 40% 이상은 진화된 폐쇄가 불러온 어쩔 수 없는 방향 틀기인 것이다.좁아진 세계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필연적인 심리 반응 같은 것이다.넓은 세계,좀 더 많은 것을 바라볼 수 있는 세계에선 일들이 이렇게까지 나아가지 않는다.가령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 역시 대부분의 캐릭터는 남성이다.여성은 피해자에 한정되고 보조적인 역할 만을 수행한다.그러나 우리가 <살인의 추억>을 알탕영화라고 부르지 않는 이유는 영화의 시각과 다루고 있는 세계가 좀 더 넓기 때문이다.영화는 불행하고 모순에 차 있던 한국 현대사 내부의 한 부분을 조준하고 그러한 좀 더 넓은 세계가 영화 속에 그 자잘한 빛을 끊임없이 반사하고 있기 때문에,관객은 <살인의 추억>을 보면서 알탕 영화 특유의 폐쇄성에 감염되지 않는다.


이렇게 알탕 영화는 '폐쇄성'이라는 특유의 바이러스를 관객에게 감염시킨다.그래서 많은 관객들이 알탕 영화들에 대해 - 그 영화가 매우 잘 만들어졌다면,다른 말로 자신들의 닫힘을 효과적으로 조명하고 응용해낼 수 있었다면- 자족하고 또다른 색다른 의미들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물론 남자들이 우루루 등장한다고 다 알탕 영화는 아니다.알탕 영화란 정의는 좀 더 협소하게 규정되어져야 한다.가령 우연히 보게 된 영화 <보안관>은 알탕 영화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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