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박열
이준익의 <박열>이 관객에 대해 가지는 강점은 영화 속 두 캐릭터,박열과 후미코에 있다.<박열> 역시 일제강점기를 다루고 있고 <대장 김창수>나 <군함도>처럼 감옥을 다루고 있다.그들도 영어의 몸이며 죄수복 차림이다.그러나 <박열>은 김창수나 군함도처럼 탈옥에 성공하지 않는다.시도 조차 하지 않으며 의도적으로 패배한다.끝까지 감옥에 갇혀 있으며 심지어 여주인공 후미코는 감옥에서 사망한다.감옥에 들어가기 이전에도 그들이 제국주의와의 전투에 성공했다는 묘사는 나오지 않는다.전투는 실행되지 않으며 오로지 머릿속 계획일 뿐이다.그들은 혁명을 일으키기도 전에 죽었으며 어떤 관점에서 보면 실패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거기에 조금도 굴하지 않는다.유쾌하고 겁 없고 마구 내지른다.눈물을 흘리기는 하지만 그것은 사랑에 대한 눈물일 뿐 패배나 실망,두려움과 좌절에 의한 눈물이 아니다.그들의 사랑은 강렬하지만 질척거리지 않고 과감하며..,결국 젊다.박열 보다 최희서가 연기하는 후미코에 눈이 가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녀가 사망했기 때문이다.후미코에겐 전사만 있을 뿐 훗날의 이야기가 없다.그녀는 영원히 사망했으며 영원히 승리했다.박열의 후일담- 젊은 날의 아나키스트였던 그는 훗날 민단의 지도자가 된다-에 비추어 볼 때 그녀는 영원히 20대 초반의 순결한 혁명가이자 변절하지 않은 청년인 것이다.
이것이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안겨 준다.합리적인 승리의 감정을 얻게 한다.영화가 일제 강점기의 조선 아나키스트들에 대한 탐구로 이어지지는 않지만 그것이 그렇게 아쉽게 느껴지지도 않는다.이준익의 전작 <동주> 역시 젊은,그리고 변절하지 않은 조선의 청년을 다루었다.그의 다음 영화가 무엇이 될런지는 모르지만 그의 주인공들은 점점 20대 초반의 나이로 굳혀지는 듯 하다.후회를 남기지 않는 나이 뒷 일을 염려하지 않는 한 때.
이것은 영합이 아니다.다만 그의 젊은 시리즈가 남기게 될 결과에 관심이 간다.항상 이기는 싸움만 걸 수는 없을 테니.
4.대립군
정윤철의 <대립군>은 광해의 분조라는 역사적 팩트와,남의 군역을 대신하는 '대립군'들이 그를 호위한다는 상상적 픽션을 뒤섞어 놓은 로드 무비다.(로드 무비라는 표현이 좀 이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내겐 그렇게 느껴진다.그러니까 이 영화는 임금이 되기 이전 광해의 성장담에 가까운,그리고 도착지와 출발점이 분명히 존재하는 로드 무비다) 길 위에서 미성년 왕자 광해는 성년 왕으로 변신한다.
그러나 물론 이것은 영화를 만드는 사람의 상상이다.분조는 넌픽션이지만 성장은 픽션이다.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픽션은 영화에 이야기를 선사한다.
그래서 이 영화에 이야기를 부여하는 요소-픽션-가 되는 것은 바로 대립군이다.거친 남성 민초들로 이루어진 대립군이라는 존재가,그들 내부의 갈등이,그들이 맞닥뜨리게 되는 최후의 감연한 희생이,당시 권력의 비겁함과 허세와 적당한 대립을 이루면서 영화 전체에 어느 정도의 생명력을 부여한다.그러나 임팩트는 없다.왕자 광해에게 좀 더 할애되어야 할 탐구의 강도가 떨어지기 때문이기도 하며,또 감독이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 -민중과 하층 계급을 대변하는 대립군들의 결정적인 영향으로 왕자가 탈바꿈하게 되었다는- 의 강도가 너무 직접적으로 묘사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그들 대립군의 최후가 영화적 대미를 장식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그러나 광해의 개심과 변신에 어느 정도 더 신경을 쓰고 그쪽에 더 시간을 썼더라면 조금은 더 다른 영화적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역사를 다루는 영화에서 캐릭터들 사이의 균형이란 언제나 맞추어지기 어려운 일이고,이 영화에서처럼 픽션적 존재들이 드라마를 이끌어가는 상황에 다다르면 더욱 그렇기는 하지만 말이다.그리고 이솜이 연기하는 여성 캐릭터 덕이에게도 더 시간과 권한을 부여해야 했던 것이 맞다.적당한 구색으로 끝나기엔 아까웠다.조금은 다른 캐릭터로 변환될 수 있었다.
5.남한산성
올해의 웰 메이드 영화 중 하나.
삼전도의 굴욕이라는 역사적 사실과 남한산성 내부의 알력이라는 역시 역사적 사실로부터 비롯된 상상력으로부터 정갈한 카펫 같은 영화 하나를 끌어냈다.김윤석과 이병헌이라는 대표적인 연기파 배우 - 그들은 이씨 조선 선비들의 긍정적 품격을 잘 살려냈다.황정민이나 정우성이 이 역할을 해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들은 보이지 않는 피가 낭자한 유혈의 토크 배틀을 관객에게 선사한다.
물론 역사란 보이는 대로 보인다.이 영화의 청나라를 미국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며 중국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아마 우리나라 기자들이겠지만- 있었을 거다.박사모는 인조 임금을 박근혜로 김상헌을 조원진으로 생각했을 것이다.역사에 대한 보편적 해석과 적용이 점점 불가능해지는 시기를 우리가 살고 있는 건 맞다.그때 역사는 또 하나의 보편적 상황- 인간이 맞닥뜨리는 선택과 위기의 상황- 을 전제하고 은유하여 영화를 끌어나갈 수도 있다.그것도 하나의 선택지다.
즉 이 영화는 파멸적 상황이나 마지막 선택의 순간에 반응하는 인간들의 결정적 패턴에 대한 영화로 변환될 수도 있었다.물론 원작소설과 역사가 그리고 나아가는 길을 막았겠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생각났던 사람은 칠레의 살바도르 아옌데였고,생각났던 영화도 <칠레전투>였다.우리에겐 그런 왕과 대통령이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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