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바디우의 <사랑 예찬>을 짬짬이 읽었다.
그런데 윗 문장에서 '짬짬이'라는 말은 좀 이상하다.어쩐지 이 책에 정신을 집중하지 않았다는 의미로 들린다.그러나 내가 '짬짬이'라는 단어를 쓴 이유가 이 책이 내 집중력을 불러모으는데 실패했다는 뜻은 아닌 것 같다.그렇다면 조용히 책을 읽을 시간이 없었다는 뜻일까? 그럴 수도 있다.그러나 그것도 아니라면 이 책 자체에서 파생된 생각들이 좀 기묘했다는 뜻일 수도 있다.
이 책이 불러모은 생각들이 단일하지 않은 파동을 이루어,또 단일하지 않은 생각들의 집합체를 이루어냈다는 상황.책을 다 읽고 나서도 뭔가 잡히는 게 없는,어딘가 의심스러운,머릿속의 뭉게구름들.그 이상한 기상 상황.해롭지 않은 혼란.
어쩌면 나는 이 책을 읽는 데에 (그러니까 독서) 실패했을 수도 있다.'
즉 나는 '남녀간의 사랑'을 다룬 이 책을 읽는 데에 실패했을 가능성이 있다.한편..그것은 또 남녀간의 사랑에 대해서 내가 할 말이 좀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또 하나의 혼란스런 추측)
하지만 세월이 흘러갈수록 나를 완전히 잡아끄는 데에 성공하는 책들이 없어져 간다.이미 구축된 머릿속의 진지들이 새로운 무기들을 배치하는 데에 본능적인 거부반응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반성해야 할 상황인가? 새 책들은 모두 사드인가? 사드 후작?)
어쨌든 저 책 <사랑 예찬>에서 비롯된 몇몇 생각들을 쓴다.덧붙이자면, 이 문장들은 전혀 심각하지도 않고 또 좋은 깊이를 가진 생각들로부터 비롯된 것들도 아니다..
1.언젠가의 날들의 내게, 사랑이란 불가피한 모험이었다.
힘듬을 알면서도 달려드는 결기 때문이었느냐고? 아니다.힘듬을 의식하지 않았기 때문에 달려들었던 것이다.그러나 오늘날의 어떤 사랑들은 모험이나 불가피나 힘듬 따위의 단어들과는 정반대 방향에 위치해 있다.갑옷과 방패를 들고 ,스마트한 테크닉과 자본의 보증을 받아 이루어지는 삶의 한 이정표에 불과하다.이것 역시 어떤 시대의 트렌드이므로 비난할 생각은 전혀 없다.삶과 세계의 무서움은 사람들의 마음 깊숙한 곳을 파고 들어 정복해 버렸다.사랑의 트렌드는 그 방증이다.
2.바디우는 사랑의 진짜 가치는 차이를 지닌 사랑을 극복하는 데에 있다고 썼다.차이에서 비롯된 시련과 고통을 이겨내면서 어떤 보편성을 향할 수 있다고 말한다.매우 도덕적인 말이다.
그러나 사실 이 '차이'란 매우 넓은 범위에 걸쳐져 있다.단순히 계급이나 인종,정치적 색채 또는 성적 지향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차이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예를 들어 '시간'이란 개념도 섞일 수 있다.시간은 관계를 천천히 훼손한다.시간의 관계에 대한 변형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비참하게도 만들고 기쁘게도 만든다.그래서 사랑의 진짜 가치는 시간이 야기한 권태와 오해,오류에 대한 핸들링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그러나 차이를 극복하지 못했다고 해서 어떤 사랑의 가치가 결정적으로 폄하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그건 너무 결과론적인 말이다.관계와 사랑이 이루어낸 결과물 역시 시간에 따라 너무나 다르게 나타나기도 하는 것이다.(어떤 이별은 결정적으로 좋은 사랑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3.섹스를 온전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이라고 볼 수 있는가.적어도 쾌락의 레벨에서 보자면,섹스는 자기 자신을 향한 가없는 애프터 서비스일 수도 있다.즉 나르시스의 나르시즘은 어떤 섹스의 상징일 수도 있다.그는 방전되어 가는 자기 자신의 배터리를 충전하기 위해서 섹슈얼한 방법을 사용했다.그는 물 속의 자신과 섹스했다.
4.어떤 '쟝르'의 사랑이 되었든 사랑을 이루는 핵심은 이타성의 경험이다.그 이타성의 범위와 깊이에 따라 그 사랑 쟝르의 다양성이 결정된다.물론 여기에는 가짜 사랑까지 포함된다(페이크 다큐멘터리?) .그러나 이것은 매우 ideal한 얘기일 뿐이다.현실 세계에서 사랑이 야기하는 수많은 전투와 갈등들은,이타성과는 거의 극단적으로 거리가 먼 방향에 위치해 있다.차라리 이타성이라는 개념을 싹 소거해 버리고 이질적인 두 세계의 공존,거기에서부터 비롯된,처음엔 반 이상이 착각인 유사세계의 경험으로부터 논의를 출발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5.두 사람이 사랑하여,'하나의' 통합된 세계를 형성하고 서로 완전한 조화를 이룬 다음,자신들을 둘러싼 세상에 전투 대형을 형성한다는 도그마 역시 조금은 지양되어야 한다.그것은 클래식 예술이 만들어낸 달콤한 허구다.물론 왜 예술이 이러한 일시적이고 단기적인 통합을 그토록이나 긴 세월 동안 소망해 왔는지는 좀 더 생각해 볼 문제다.차리리 '느슨한 연합'이 좀 더 현실성 있다.위기 상황이 닥쳤을 때 강력하게 뿜어나오는 의리.평화 시에는 서로의 거리를 유지하다가도 전쟁 상황이 발생하면 강력하게 힘을 합하는 느슨한 연대가 차라리 나을 수 있다.
6.아마 좋은 사랑은 우정의 가장 긍정적인 특징들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7.사랑의 가장 기본적인 덕목은 지지(support)다.
8.사랑은 그 지난한 과정 속에서 숱한 포인트-지점-들을 만나게 된다.각 포인트에서의 선택과 결정이,그 사랑의 성향과 운명을 좌우한다.사람의 인생처럼 말이다.그런데 그 선택과 결정들은 자꾸만 재소환되는 경향들을 가진다.때론 이 재소환이 매우 우연적으로 보일 수도,또 때론 매우 고의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그렇다 하더라도 끊임없이 지지와 사랑을 재선언해야 한다.
문재인이 대통령이 된 것도 이런 재소환 (노무현을 포함한) 때문이다.그의 팬들은 그를 사랑한 것이다.
9.그러나 한 정치가에 대한 사랑을 무조건적인 정치적 행위로 변환하려 해서는 안된다.더 폭넓은 사랑의 정치는 오히려 정의의 힘으로 증오를 통제하는 것이어야 한다.물론 때로는 매우 저열한 상대의 턱에 카운터 펀치를 날려야 하겠지만,또 넘어지는 상대의 후두부를 보호하는 지성 역시 작동시켜야 하겠지만.
10.사랑의 종교라는 기독교의 아이디어는 거의 천재적인 발상이었다.
차이와 차별을 불식시키고 관용과 공존을 기반으로 한 유토피아를 만든다는 것.더구나 사랑이라는 인류가 가장 이해하기 쉬운 개념을 통하여..
그 지역 옛 생각들과 종교들의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사랑에 대한 이런 빛깔의 해석을 우주와 종교적인 차원으로 끌어올린 그 종교 초기 창시자들의 생각은 그야말로 인류사의 대표적인 반짝거림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물론 변질되었다.변해도 심하게 변했다.기독교의 후계자들은 사랑의 아이디어를 종교적 권력의 온존에 집중시켰고,단 하나의 존재 -그러니까 태양신인-로부터 우러나오는 파워의 원천으로 자리매김해버렸다.그러나 어쩌면 이것은 사랑이라는 개념의 넓디 넓은 영역과 해석의 무궁무진함을 역설적으로 증명해 주는 일인지도 모른다.어쨌든 현재의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가 아니다.정확히 말하자면 사랑의 교회가 아니다.
11.사랑의 지속,사랑의 끈질김,사랑의 상태에 관한 연속적인 서사를 그리는 예술 작품은 의외로 드물다.타인에게 전시되는 예술의 속성에 기인한 어쩔 수 없는 운명 때문이기도 하고,예술가들 특유의 순간-시간에 대한 집착 때문이기도 하다.미카엘 하네케의 영화 <아무르>의 씁쓸한 아름다움도 근본적으로는 사랑이 소재로서 겨냥되어,결국은 시간이라는 난해한 개념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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