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오스터
폴 오스터는 타자기로 글을 쓰지 않았다.<빵 굽는 타자기>라는 그의 책이 그런 오해를 내게 불러 일으켰을 뿐이다.-그러나 나는 이상하게도 폴 오스터의 글을 거의 읽지 않았었는데,내 글을 읽은 몇몇 사람들은 내 글이 폴 오스터의 글들과 닮았다고 말한다.어쨌든 - 그는 연필이나 만년필을 들어 종이 위에 글을 쓴다고 말하며,글쓰기란 노동이 동반되는 매우 촉각적인 일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것 역시 전적으로 맞는 말이다.자판을 두드려 컴퓨터에 글을 쓰는 것은 두뇌-눈-손가락-컴퓨터 모니터의 순서로 작동되는 글쓰기다.그러나 종이에 쓰는 글쓰기는 두뇌 -눈 -손가락-펜 (펜에서 흘러나오는 다양한 종류의 색깔과 색감까지를 포함하여) -종이의 순서로 이루어진다.즉 두뇌 안에서 이루어지는 글의 창조 과정이 서로 다르다.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의외로 필기 도구인 펜이다.펜의 마법이 글쓰기의 촉각적 경험을 또 한 차례 거르는 것이며,그 과정에서 또다른 빛깔의 생각과 문장들이 탄생한다.
펜은 두뇌의 또다른 구역들을 깨우고 여러 영역들의 협업을 독촉하는 것이다.심지어 펜의 재질,쓰여지는 글자들의 모양새까지,여러가지 변수들이 돌출적으로 연합해,컴퓨터 자판과 모니터와는 전혀 다른 매우 수공업적인 태피스트리 세계를 만들어낸다.
7.포르노그래피
필립 로스는 '글이 거침없이 써질 때' 잠깐 글을 멈춰야 한다고 말했다.맞다.쓰는 쾌락과 문장의 관성들이 노트의 여러 페이지들을 정신없이 메꿔 갈 때가 있다.그때 작가는 어이없게도 자신의 작업이 꽤 잘 진행된다고 생각하기 일쑤이지만,몇 일 혹은 몇 주가 지나 그 시간대의 문장들을 훑어보면 생각 보다 좋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그것은 마치 포르노 영화에서,섹스 씬과 섹스 씬 사이의 의미없는 휴지기,물 흐르듯 바뀌는 공간과 시간과도 비슷하다.밀도가 낮아진 글의 지층이 생기는 것이다.그래서..펜과 종이에도 속도 위반 스티커를 발부해야 하는 것이다.
8.중독
가끔 작가들은 독극물을 마셔야 한다.(단 의무조항은 아니다.각자의 정신건강상태에 따라 너무나 상이한 결과가 나타나니까..) 그때 책은 ,그러니까 중독된 그 작가가 쓴 책은 해독제로도 기능할 수 있는데,그것은 어디까지나 '가능성'일 뿐이다.해독은 커녕 그냥 죽어버릴 수도 있다.
독배를 들이키는 타이밍은 그래서 사람 마다 무척 달라야 한다.물론 중독자에 대한 정식 규정에는 '상습적'이라는 당연한 문구가 따라 붙는다.따라서 진짜 작가들은 대개 중독성 경향과 해독제 몇 알을 한꺼번에 구비하고 있다.역설적으로 해독제 없는 작가는 작가가 아니다.
(유명한 알콜중독자 레이먼드 카버는 글 쓸 때 만큼은 술을 마시지 않았다.글 쓰기에 대한 중독이 알콜에 대한 중독 보다 훨씬 강력했던 것이다)
9.스타일
작가들의 인터뷰에서 풍겨나오는 그들의 분위기와 말투는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작품,그들의 문장과 닮아 있다.자연스러운 일이다.작가들이 멸종되어가는 현대의 경향은 어쩌면 이런 종류의 일들과 상관이 있을 수 있다.말과 글이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좀 더 혼자 중얼거려야 하고,자신의 독백을 녹음한 후에,미치광이스러운 자신의 말투에 익숙해져야 한다.그것을 우리는 스타일(STYLE)이라고 부른다..
10.빨간 펜
수정과 수정본을 무서워 해서는 작가가 될 수 없다.난삽한 빨간 펜의 자국들은 사실상 작업의 주요 과정 중 하나이며,고이고이 쓴 문장 위에 죽죽 그어지는 난도질은 부활의 한 과정으로서의 축복이다.(편집자에 의한 수정 역시 마찬가지다)
그리고..최후의 수정본은 죽기 직전에 쓰여질 단 하나의 문장이 될 것이다.
그 마지막 문장이 Tomorrow is another working day 가 되어서는 안 될 텐데..
11.JS
헤밍웨이는 가장 정치적인 작가들이 가장 빈번하게 자신의 정치관을 바꾼다고 말한다.순간 바른 문장의 대가 고종석이 떠올랐다.(그가 자신의 정치관을 자주 바꾼다는 뜻은 아니다.그냥 그가 떠올랐을 뿐이다) .그 순간 헤밍웨이의 다음 목소리를 읽었다.
-그것도 행복 추구의 한 형태입니다.
그는 행복할까? (헤밍웨이 말고..)
12.페이튼 플레이스
자신의 지적 ,문화적 수준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그러니까 전혀 이질적이고 때로는 매우 고차원적이거나 이단적인 글들을 읽는 것은 통념 보다는 훨씬 해 볼 만한 모험이다.특히 소년기에 그렇다.
중학생이던 어느 겨울,내가 읽은 그런 종류의 책은 윌리엄 포크너의 '음향과 분노','성단' 그리고 그레이스 메탈리어스의 <페이튼 플레이스>였다. 그때의 내 수준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책들 임에 틀림없었다.더구나 <페이튼 플레이스> 속에서 묘사되는 성적인 (sexual) 요소들은 연신 얼굴을 화끈거리게 만들었고,몸 속의 혈류들이 불규칙적으로 요동치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느끼지 않을 수 없게 했다.더구나 그 곳은 학교 도서관이었다(뭐 지금 생각해 보면 중학교 도서관의 장서 목록 치고는 별난 구석도 없지 않았다.축복이라는 차원에서 말이다)
그러나 그 계절의 이상한 독서는 포크너적인 감수성 - 폐쇄적이고 미시적이면서도 정밀하고 기괴한 - 의 씨앗을 내게 던졌고,<페이튼 플레이스>의 야함은 내게 B급 감수성의 세례를 베풀었다.
이렇게..별들 같은 작가들은 우리를 심각할 정도로 귀챦게 하는 것이다.
결론? 글을 쓰고 싶다면 근본적으로는 매우 심플하게 살아야 한다.그리고..가장 기억나는 인터뷰는 레이먼드 카버의 인터뷰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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