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우,간만에,블로그로 돌아왔다.
웹 서핑을 하다가도 문득문득 이 공간이 생각나곤 했고,그럴 때면 이리로 들어와 옛 글들을 훑어보곤 했었다.면구스런 글들,명랑한 글들,즐겁고 우울한 글들,지루하면서도 반짝이는 글들,다시 쳐다보기 민망할 정도로 못 쓴 글들..숱한 얘기와 문장들이 이리저리 발자국을 만들며 어지럽혀져 있는 모습은 그대로 내 삶의 기록이었다.
갑작스레 주어진 휴가로 외국엘 갔었고 여행을 갔었고 우리나라 이곳저곳을 돌아다녔었다.그럼에도 여전히 일상과 내 삶의 틀은 여전히 나를 죄이고 있었고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도 나는 여전히 대한민국 남녘의 한 도시에 얽매어 있었다.사실 이젠,그 '매임'에 약간 적응하기도 했다.지금의 나는 중간중간 여유있게 사슬을 살며시 풀고 바깥으로 나갔다가 사슬을 내게 채운 장본인도 모르는 사이 다시 사슬을 내 발목에 묶곤 한다.
5월 초의 폴 매카트니 공연이 그런 예다.나는 비행기를 타고 김포에 도착한 후 잠실 운동장으로 달려갔다가,폴 매카트니 경을 만나고,-그를 만났다는 비현실감 때문에 조금은 멍해진 다음에- 심야의 고속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사슬로 인한 상흔은 거의 70%쯤 날아가버렸다.이렇게 살다가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약간 어이없는 심경에 잠기기도 하거니와,그럼에도 또다른 종류의 행복감,또 사랑,또 내 안의 어떤 고요한 성질 때문에 난 또 그럭저럭 버티고 있다.
(잠실 운동장의 거대한 폴 매카트니 공연 입간판 앞에서 바로 저 자세로 사진을 찍었다.그러나 차마..여기에 올리지는 못하겠다.ㅎㅅㅎ)
(그를 알현한 무리들이 그에게 사랑을 바쳤다.아마도.그는.깜짝 놀랐을 것이다.)
(폴 매카트니는 아티스트이자 뮤지션이기 이전에 확실한 엔터테이너였다.70대 중반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기쁨과 안식을 청중들에게 줄 수 있었다.우리나라 공연장의 그 흔한 떼창 마저도 폴 경의 카리스마 앞에선 비교적 잠잠해졌다.그렇지 않은가..누구 앞이라고..ㅎㅎ)
그러나 오늘,공연을 본지 한참이나 지난 지금,그 날의 콘서트를 다시 얘기할 순 없겠다.(시의성이 떨어졌다거나 기억력에 장애가 왔다는 뜻이 아니다) 그 날의 공연은 그냥 내 마음에 간직하련다.(이래서 홀로 영화를 보거나 공연을 보러 다니는 게 좋은 것이다.이 '홀로 보러다니기'에 대해서 좀 더 자세하게 말하고 싶긴 하지만 나중에 은별이가 글을 읽게 될까봐 참는다..ㅎㅎ)
그냥 기록을 남기기 위하여 이 공간에 들렀다.(앞으로 그런 용도로 이 블로그를 사용하게 될런지도 모르겠다)
먼저 읽었던 책 한 권.
문학평론가 신형철,가장 신뢰할 수 있는 필자 중 한 사람인 신형철의 책 '정확한 사랑의 실험'이 첫번째 책 되겠다.
언뜻 들으면 감성적인 에세이로 들릴 책 제목이다.또 언뜻 알랭 드 보통의 냄새가 나기도 한다.혹은 저자의 직업을 안다면 문학평론집을 상상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영화에 관한 책이다.신형철은 영화잡지 '씨네 21'에 자신이 보았던 영화들에 대한 리뷰를 연재했고,그 글들을 갈무리해서 책을 펴냈다.
신형철은 특유의 정확하고 유려한 문장을 사용해서 영화 장면 하나하나에 숨겨진 의미들을 그야말로 섬세하게 파고 든다.그의 책 제목 '정확한 사랑의 실험'은 이 책 속에 등장하는 어떤 영화에 관한 글 제목이기도 하지만,또한 그의 글 자체의 특성 -정확한 문장의 실험- 을 나타내기도 한다.
신형철은 영화의 내러티브 곳곳을 세세하게 짚어가며 영화의 의미들을 분석하는데,그것은 이내 영화를 떠나 삶의 숨겨진 의미들 마저 슬쩍슬쩍 건드리는 수준에 다다른다.예를 들어 '사랑은 결여의 발견'이라는 영화 <러스트 앤 본>에 대한 리뷰는 꼼꼼하게 영화를 쳐다 보지 않으면 쉽게 알아채 글로 나올 수 없는 문장이다.
신형철이 사랑에 대한 수다한 경험을 했기 때문에 그런 문장을 쓸 수 있었겠는가.아니다.경험은 일종의 직관을 형성한다.또한 직관이야말로 경험이다.그 어떤 많은 경험을 했다 할지라도,경험에 의해 새로운 사건들을 쳐다보는 직관들이 형성되지 않는다면 그 경험은 그저 삶의 에피소드들에 불과한 수준으로 추락한다.오직 직관에 의해서 옛 경험을 새 사건과 연결시킬 때 경험은 빛을 발하는 것이다.그런 의미에서 책을 읽는다는 것은 새로운 경험을 통해 직관을 발전시키는 주된 수단이다.그리고 신형철은 바로 그런 경험과 직관에 의거해 우리를 수많은 영화들 속으로,또 그 영화들의 의미 속으로 인도한다.
나도 리뷰를 썼었고,또한 나도 본 적이 있었던 많은 영화들이 그의 펜 끝에서 새롭게 창조되었다.그래서 이 책은 또한 명랑하고 즐거운 경험을 선사했다.아마 그래서였던 것 같다.그래서 내가 이 공간으로 다시 돌아온 모양이다.글을 쓰러,내 직관이 아직도 제대로 작동되고 있는지를 실험하러.정확한 직관의 실험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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