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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ends2.-17년 전의 책.<미지의 명감독> <이영일의 한국영화사를 위한 증언록> <할리우드>

Bookends

by 폴사이먼 2014. 10. 2.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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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가는 날이 다가온다.어쩔 수 없이 집을 사고 말았다.집을 사서 살아야 한다는 것 자체에,또 어처구니 없고 거의 부조리하다시피 한 우리나라 부동산 시세에,너무 질린 나머지 절대로 집을 사지 않고 나중에 은퇴할 때 쯤에야 집을 지어 살겠다..이것이 원래의 계획이었으나 어느 순간 출현한 부동산 귀챠니즘 - 정기적으로 반복되는 이사와 이사에 연관된 여러가지 잡다하고 복잡스런 일들- 때문에 결국 대출 받고 집 계약했다.이제는 집을 옮기고 이 도시를 떠날 때까지 그 집에서 살 일만 남았다...

 

이삿짐들 중 내게 가장 고민을 안겨주는 항목은 '책'이다.책을 몽땅 싸들고 가자니 무거우며 번거롭고,선별해서 버리자니 내 기억과 영혼 한 조각들을 아파트 공동 쓰레기장에 버리고 떠나는 느낌이 든다.요사이는 중고서점이나 기부 등의 명목으로 책을 처리하는 경우도 있지만,나 같이 게으른 사람들은 그것 역시 힘들다.얼마 전 빈 방 한 켠을 장악하고 있는 책들을 정리하다가 아주 오래된 듯 보이는 책 하나를 발견했다.

 

바로 이 책,<미지의 명감독>

 

1.미지의 명감독 (김영진)

 

 

 

오래된 책에서 풍기는 곰팡내를 맡았다.낯설음과 친밀감이 동시에 밀려오면서도 도대체 언제 읽은 책인지 알 수가 없었다.문장이 시작하는 곳에 책을 읽기 시작한 날과 읽기를 끝낸 날을 기록해 놓는 내 습관 때문에,나는 이 책을 언제 읽었는지 알 수 있었다.

 

1997년 10월 17일.이렇게만 쓰여있었다.그러자 의혹이 일었다.그 시간대는 미국에서 다시 우리나라로 들어와 오스트레일리아로 떠나기 위해 거의 정신이 하나도 없던 나날이었다.그런 시기에 영화에 관한 책을 샀다고? 알 수 없는 일이었다.또는 혹시,가능성은 좀 떨어지지만 내가 이 책을 들고 오스트레일리아로 갔다가 다시 가지고 돌아왔는지도 모를 일이었다.그 어떤 불확실함이 가져다주는 기묘한 기분 때문에 좀 혼란스러웠다.또한 미묘하고 불길한 매력 같은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내가 이 책을 읽었던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본문이 시작하는 페이지 위에 쓰인 숫자들이 내게 천연덕스럽게 그 사실을 증언하고 있었다.나는 천천히 책을 집어들고 17년 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읽기 시작했는데,내용이.그만...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책은 당시로서는 우리나라에 잘 소개되지 않았던 영화 감독들을 소개하고 있었는데,17년의 세월 동안 집어넣은 그 영화감독들에 대한 정보들 때문에,머릿속에 뒤엉킴이 일어난 것이었다.웃을 수 밖에 없었다.그러니까..세월을 이길 장사는 없다..시간이야말로 존재의 결정적인 함수다..

 

하긴 이 책을 쓴 김영진 역시 변했다.17년 전엔 씨네 21의 기자였지만,지금은 정기적으로 공중파 방송에 출연해 영화에 대한 설명을 곁들이는 영화평론가다.

토마스 구티에레즈 알레아,아톰 에고이안,할 하틀리,마이크 리,키아로스타미와 카우리스마키,아벨 페라라,피터 그리너웨이,앙겔로풀로스,미클로시 얀초..그가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감독들도 당시엔 그야말로 '미지의' 명감독일 수 있었겠으나 지금은 씨네필들에 의해 추앙받는 클래식이자 컬트 감독들이 되었다.세월은 또한 이렇게 변했다.

 

책을 읽고 있는 동안, 저자 김영진의 예측이 여지없이 빗나가거나,스스로의 취향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오버하는 문장들이 있어서 다른 종류의 미소를 짓기도 했다.예를 들어 그는 아톰 에고이안이 21세기를 대표하는 거장 감독이 될 것이라고 자신만만하게 예언하고 있으나,에고이안의 17년은 불행히도 그렇게 흐르지 않았던 것이다..

 

어쨌든 세월은 호로록 호로록 흐르고,수많은 영화 작품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져간다.그들은 정말 놀라운 속도로 명멸한다.클래식으로 남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영원히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지게 되는 작품도 있다.삶은 짧다.그러니 모든 영화를 다 볼 수는 없다.클래식을 챙겨보거나 컬트를 찾거나,쟝르 영화만을 새로 선정하여 보거나,그리고 테마별로,감독별로 영화를 보거나..영화도 이젠 '기획 하에 '보아야 한다...

 

이 모든 건 내게 주어진 유한한 시간 때문이다.17년이라는  시간차 조차 감당하지 못하는 나로서는 내가 좋아하는 영화들에 대해 어떤 '불가피'한 선택을 해야 한다.어차피 삶이 죽음으로 흐를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에라도,나는 내 삶을 간결하게 기획해야 한다.뭐,그런 생각,그런 얘기..

 

2.이영일의 한국 영화사를 위한 증언록

 

역사를 쓰는 것은 결국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증언들을 해석하고 나열하며 정리하는 것이다.이제는 하늘에 있는 이영일 선생은 거의 홀로 한국영화사를 집대성한 분이다.거의 버려져 있다시피 한 한국영화의 이야기들을,이영일 선생은 거의 발로 뛰어서,생존해 있던 옛 영화인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구술을 받아 정리해냈다.이 시리즈는 바로 그 발과 말의 기록이며,우리나라의 영화 역사가 지금의 꼴이라도 하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이영일 선생 덕분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는 1959년부터 우리나라의 과거 영화 현장에 있던 분들을 일일이 찾아가 얘기를 듣고 릴 테이프에 녹음했다.(유실된 영화들이 워낙 많아서 영화 역사 연구가로서는 어쩔 수 없는 방법이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결국 <한국영화전사>라는 거대한 저작을 펴냈고,후학들은 이영일이라는 나침반에 의지하여  옛 영화의 세계를 탐험할 수 있었다.

 

<이영일의 한국영화사를 위한 증언록>은 이 구술을 정리해 펴낸 책들이다.이 책들엔 수많은 영화인들의 증언이 오롯이 담겨 있다.이 책은 이영일이 타계한 후,구술 테이프들을 해독한 후학들의 도움으로 나온 책들이다.그리고 씨네 21은 이 책의 일부로 그들의 지면에 한국영화사를 쭉 연재했었고 말이다.당시의 <씨네 21>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2001년의 일이다)

 

<(故) 이영일(1932∼2001) 선생은 한국영화사의 독보적 저술이 된 <한국영화전사>(1969년 간행)의 집필을 준비하면서, 당시 생존해 있던 영화계의 선구자들을 인터뷰하고 그 내용을 녹음해 두었다. 30여년이 지난 지금, 어린 연구자들이 다시 앞선 두 세대의 육성이 함께 살아 있는 녹음 자료들을 듣고 글로 받아 적었다. 자신도 모르게 한국영화사의 제3세대로 위치지어진 이 젊은이들이 앞으로 이 난을 통해 초기 영화인들의 삶과 영화계 실상을 차례로 소개할 예정이다. 그야말로 3세대가 한 세기의 세월을 뛰어넘어 ‘대화’하는 진기한 경험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책들엔 수많은 영화의 별들이 다른 별들의 입을 빌려 등장한다.구술 내용을 거의 가감하지 않았기 때문에,당시의 시대가 생생하게 살아 있는 듯 느껴진다.이영일은 영화의 역사를 영화인의 역사로 보았고 ,그들의 열정과 땀에 의해 유지되는 동력체로 보았다.영화에 미쳐 - 아까의 표현대로라면 삶을 매우 미니멀하게 만들어서 - 삶을 살아갔던 이들의 순간들이 이 책엔 매우 진기하게 녹아 있다.재밌다...

 

 

 

3.할리우드 (부르크하르트 뢰베캄프)

 

어쩌다가 간략한 할리우드에 대한 영화 역사서를 읽었다.영화 태동 초기부터 20세기 말에 이르는 '꿈의 공장' 에 대한 개괄적인 역사서다.

 

 

 

환자 보는 중간 중간 거의 무협지를 읽듯 읽은 책이다.그만큼 매우 개괄적이고 평이한 책이다.물론 할리우드라는,현대 지구 문명의 일부를 지배하는 괴물은 그렇게 간략한 존재가 아니다.이 책은 괴물에 대한 간결하고 미니멀한 보고라고 할 수 있겠다.그러나 정말 할리우드를 알고 싶다면 이렇게 단순한 해설서로는 어림없다.이 괴물은 그렇게 쉬운 존재가 아니며 지금도 현대인의 삶에 막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나..,비행기 안이나 고속버스 안이나 열차 안 같은 곳에서 읽기는 아주 좋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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