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2013년은 얼마 남지 않았다.2013년의 영화 수십 편에 대한 글을 써 보려던 계획은 이미 폐기되어 마땅하다.시간이 너무 없는 것이다.게으름 때문이라기 보다는 물리적인 시간이 너무 모자라다.어쩔 수 없는 일이며 최근 몇 년 간의 내 인생을 규정하는 말이기도 하다.그러나 여전히 나는 계획을 포기하지 않는다.영화를 본 다음에 써 두었던 작은 메모들을 통해 글들을 압축시킴으로써 2013년의 영화들을 정리할까 한다.어쩔 수 없다...
먼저 2013년에 보았던 우리나라 영화들에 대한 메모부터 시작한다.그런데 사실 우리나라 영화들을 어떻게 규정할 것이냐 하는 문제는 이제 까다로운 문제가 되어버렸다.우리나라 감독들이 외국에 나가서 영화를 만드는 일도 생겼고,우리나라 사람들이 만들었지만 외국의 자본이 투입된 영화들도 있으며 우리나라 사람들이 만들었지만 외국의 배우가 출연하거나 거의 외국에서 로케이션 된 영화들도 흔하다.그래서 지금부터 쓰는 '우리나라 영화'들이란 우리나라의 감독들이 만든 영화,감독 이름에 우리나라 사람의 이름이 올라가 있는 경우에 한하기로 한다..
1.설국열차 (봉준호)
다음과 같이 메모되어 있다.
1.혁명은 계급에 기반해야 하는 것이 맞으며 시스템 자체를 깨부수지 않고서는 (송강호와 고아성이 수행하는) 결코 유의미한 변화를 이뤄낼 수 없다.이 당연해보이는 명제 때문에,사람들은 오히려 이 영화를 심심해할 수 있을 것 같고,이런 위험한 명제가 자본의 틀 안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저들은 찜찜해 하면서도 안심하고 있을 것이다.
2.결국 윌포드는 자본-사기업-문명-테크놀로지-권력-폭력이다.그래서 결국 인류의 역사는 죽음의 역사이다. 삶의 역사가 우선이라는 것은 자명하지만 이 영화가 거기까지 나아가고 있지는 않다
3.그러나 봉준호의 뚝심이 놀랍다.그는 자본 내부의 시스템 안에 들어가서도 하고 싶은 대부분의 말을 우겨넣는다.
4.송강호는 절대 밀리지 않았다.심지어 액션 씬에서도.
5.영화 보는 내내 틸다가 배신자가 되기를 바랬다.그녀가 과감하고 시원하게 창문을 깨부수어 버리기를 염원했다.나는 틸다 스윈튼빠이다.그녀는 나의 goddess이다.
2.스토커(박찬욱)
의미의 조각들을 쌓아올려가는,그 꼭지점과 꼭지점들을 연접시켜가는,박찬욱 특유의 편집과 미쟝센 능력은 태평양을 횡단했어도 상실되지 않고 여전하다.빛을 발한다.그러나 이 영화가 히치콕이든 햄릿이든,성장담이든 인성에 관한 탐구이든,그 끝과 시작이 세계와 우주의 보편성에까지 연결되지는 않았다.박찬욱 보다는 웬트워스 밀러의 탓일 거다.
따라서 역설적 의미에서 이 영화는 프로덕션의 승리로 기억될런지도 모르겠다.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로 진출한 윤정환 같은 테크니션인 박찬욱과, 적당한 선에서 관객과 타협하며 멈춰버린 시나리오,제 몫을 확실히 해내는 배우들의 소망과 책임을 매우 잘 융합시켜냈으니까.그런데 난 왜 미아 바시코브스카가 배두나와 닮았다고 생각했던 것이었을까..
3.화이(장준환)
1.이 영화를 화이의 제자리 찾기라는 관점에서 바라본다면,장준환의 비관적 세계관은 1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그가 제시한 석태와 임형택이라는 우리 세대의 두 아버지 상은 매우 부정적이며,화이는 살부의식 이후에도 석태가 심은 DNA인 킬러로서의 정체성을 따를 수 밖에 없다.여전히 비관적이다.장준환은 변하지 않았다.
2.그러나 역으로 이 영화는 김윤석-석태의 영화일 수도 있다.괴물의 비극성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그렇다.장준환이 김윤석의 카리스마를 적절하게 제어하지 못했다면 더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3.한편 1998년이라는 문제적 시기에 튀어나온 것으로 설정된 낮도깨비라는 살인 집단의 의미설정 역시 중요하다.그리고 그 아버지'들' 사이의 화이에 대한 권력투쟁이 영화의 또다른 모티브가 되었더라면,그 과정이 복잡하게 전개되었더라면 영화가 더욱 흥미로워질 뻔 했다.
4.이 영화의 폭력은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 바깥으로 빠져 나가 윤리적 시선으로 절단과 피튀김을 재단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쟝르 영화 만들기에 온전하게 성공한 것이다.
4.베를린(류승완)
야구로 말하자면 그렇다.홈런을 치겠다고 어깨가 잔뜩 힘이 들어간 타자는 결코 홈런을 칠 수 없다.한 구종이나 코스에만 강한 선수도 마찬가지다.하부 리그에서 잘 한 선수가 메이저 리그에서 갑자기 잘 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관객 역시 어떤 선수에게 지나친 기대를 품을 필요가 없다.그저 게임을 즐기기만 하면 되는 거다.그리고 게임 안에도 다양한 여러 요소가 있으니,그 중 하나를 골라서 거기에 집중하는 것도 야구 경기를 보는 방법 중 하나다.
; 이 메모를 다시 돌이켜 보니 <베를린>을 보고 나서 류승완에게 약간 실망했던 모양이다.하지만 그 정도는 아니다.이 영화 역시 자기 논리와 모양에 충실했던 영화였다.
5.더 테러 라이브(김병우)
영리한 시나리오와 유효한 강도를 가진 영화의 속도감각이,영화 자체가 다소 관습적인 코드들을 슬쩍슬쩍 건드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관객의 영화보는 감각을 그다지 많이 방해하지 않으면서.결국 그들의 스타 하정우가 기다리고 있는 영화의 엔딩을 향하여 쉴새없이 전진한다.의외의 쾌감은 공권력과 자본이 바탕이 된 언론권력을 향한 극렬한 야유로부터 솟아오른다.
보는 내내,우리나라 역대 대통령 중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사건의 범인이 요구하는 종류의 사과를 할 수 있을 대통령이 과연 누구일지 생각했다.(적어도 지금의 마리 대통령은 아닐 것 같다...)
다소 성겨 있는 듯한 폭발테러의 디테일과 테러범 부자의 스토리를 보충하기 위해 TV 시리즈로 만들었음 어땠을까 싶다.그리고 테러를 당한 방송국을 3개로 설정하는 거다.따라서.앵커와 보도국장도 3명이 되는 거다.그렇다면 3개의 연기 조합이 탄생할 것이다.김윤석-백윤식,이미숙-장영남..이런 식으로...
6.신세계 (박훈정)
<홀리 모터스>와 이 영화의 어쩔 수 없는 공통점은 영화를 보면서 수많은 다른 영화들이 떠올려진다는 것이다.그러나 레오 까락스가 그 과정을 통해 새로운 다른 차원과 공간을 향해 시시각각 이동하는 여행 테크닉을 보여주는 것에 비해,박훈정은 오히려 영화의 공간에(어쩌면 그가 설정한 스스로의 개성과 영화의 쟝르에 억눌려서) 못박히듯 앉아서 변주에 변주를 거듭하기만 한다.따라서 관객은 <신세계>를 보면서 '영화적 신세계'를 찾는 데에는 실패한다.
어떤 배우의 연기가 그 영화를 살렸다,라고 얘기하는 것은 결코 칭찬이 아니다.
7.감시자들 (조의석 김병서)
홍콩의 원작으로부터 훌륭하게 변이된 좋은 시나리오에서 나온 잘 빠진 쟝르 영화.비장한 감상주의 같은 군더더기의 배격,적절하게 분산된 에너지 덕분에 제대로 영화에 녹아드는 캐릭터들(특히 여성들),웬만해선 교란당하지 않는 일정한 템포와 리듬감.서울 전역을 훑어내는 카메라의 뚝심.그리고..한효주의 헤어스타일..
8.천안함 프로젝트(백승우)
3년 전의 천안함 사건에 대한 주된 의혹들을 가지런히,그리고 알기 쉽게 잘 정리해 놓았다.정부의 갈짓자 걸음식의 발표들을 차분하게 반박하고 북한의 어뢰공격이라는 황당한 주장을 효과적으로 공박하지만,불행히도 그것은 모두 이 영화에 나오는 출연진의 주장들일 뿐,영화의 주장은 아니다.출연진의 주장과 영화의 주장이 뭐가 다르냐고 반문당할 수도 있겠지만,이것은 최근 벌어진 비극적인 사건에 대한 태도의 엄격성과 상관이 있는 얘기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마치 스포츠 중계 캐스터와도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그것도 우리나라의 경기가 아닌 외국 스포츠 경기 말이다.거기에 영화의 시작과 끝에 등장한 철학 교수가 소통의 필요성을 언급하면서 한 걸음 더 후진하고야 마는데,이 안타까운 뒷걸음질야말로 우리 사회의 자유의 척도를 간접적으로 웅변한다.(천안함에 대한 문제는 소통의 문제가 아니고,천안함에 대한 영화를 만드는 것은 용기의 문제다)
그러나 이런 정도의 스탠스를 가지고 있는 영화 마저도 상영이 가능하니 뭐니 하는 소동이 일어나고야 마는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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