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의 세번째 영화는 프랑소아 오종의 <인 더 하우스>다.사실 나는 최근 몇 년 동안의 오종의 영화들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었다.슬럼프에 빠졌거나 하강 곡선을 그리고 있다고는 느끼지 않았으나 최근 영화들에선 오종 특유의 빛이 사라져 있다고 느꼈었다.그러나 오종은 오종이다.언젠가는 좋은 영화를 들고 나타나리라고 믿었고 올해에 그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기본적인 능력이 되는 사람들은 언젠가는 이렇게 멋지게 귀환하는 것이다.
오종의 능력은 어디까지나 '이야기'다.그는 아무리 복잡한 영화를 만들어도,아무리 기묘한 감각을 가진 영화를 만들어도 확실한 스토리 텔링의 능력을 보여주는 스타일의 영화감독이다.그는 자신의 영화를 지켜보고 있는 관객의 순간순간의 감정들을 잘 헤아리고 있으며 그 감정들에 영화의 감각들을 튜닝할 줄 안다.때로는 앞서 가고 때로는 의표를 찌르면서 그는 영화의 스토리들을 관객의 심정에 능숙하게 봉합한다.좋은 외과의사처럼.
이 영화 <인 더 하우스>에서도 마찬가지다.그는 갑작스럽게 점핑해서 관객을 놀라게 하기 보다는 ,밑으로부터 차곡차곡 긴장들을 쌓아나가 마지막 순간 그 동안의 논리에 맞닿는 결론을 유도하면서 끝을 낸다.그 논리적 귀결이 완벽하고 종말에 이르는 스토리의 테크닉들이 워낙 절묘하기 때문에 관객들은 대부분 두 손을 들고 아무리 결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아무런 항의 없이 극장 문을 나서고 만다.
<인 더 하우스>의 내러티브 구도 역시 매우 절묘한 건축적 완벽성을 가지고 있다.주된 캐릭터 두 사람 - 문학 선생님인 제르망 (파브리스 루치니)과 그의 학생 클로드 가르시아 (에른스트 움하이머) - 을 중심으로,각자의 위성인 두 세력 - 제르망의 아내인 쟝 ( 크리스틴 스콧 토마스) 과 클로드가 자신의 이야기로 형상화하려는 친구 라파의 가족- 을 배치해 놓고는 장면과 장면,이야기와 이야기를 연결해 녹색의 성 하나를 축조해 놓았다.
이 정교한 연결들 속에 엄청난 양의 정보들을 배우의 대사라는 형태로 녹여놓고서 관객에게 전달하기 때문에 사실 관객들로서는 정신이 하나도 없을 수도 있다.액션 보다는 주고 받는 대사들을 통해 이야기를 진행시켜 나가고 있으니 조금이라도 긴장의 끈을 놓치면 앞뒤의 연결을 놓치기가 매우 쉽다. 이 연결들이 매우 수평적이고 병렬적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어찌 보면 이 영화의 이야기 뼈대는 간단하다.문학 창작자로서의 자신의 능력에 한계와 불만을 함께 느끼고 있는 문학 교사 제르망이 학생들에게 내준 작문 숙제 중에서 친구의 가정을 은밀하게 관찰하며 욕망에 빠져들고 있는 학생 클로드의 작문을 발견하고,그의 글을 지도한다는 명목 하에 그의 글에 개입하다가 결국 파멸에 이르고 만다는 이야기다.학생의 위험한 욕망 - 친구의 엄마에게 연정을 품고 그 가정 안으로 (in the house!) 잠입해 들어가 가족 전체를 파괴하려는 욕망으로 발전해가는 - 을 잘 알면서도,작품의 창작이라는 대명제 자체에 중독되어 자신의 사회적인 위치까지 망가뜨린 채 몰락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이 이야기를 오종은 숨가쁜 스토리 전개와 한 타이밍 빠른 편집에 의하여 진행시켜 나가는데 이야기의 구조는 아까도 말했지만 이를테면 병렬식으로 늘어놓은 형태이다.클로드와의 작문 상담 - 아내 쟝과의 클로드의 글에 대한 평가 - 클로드의 작문 자체가 형상화된 충격적인 영상들,그러니까 라파 가족과 클로드 이야기) 의 세 가지 갈래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이어붙이면서 긴장과 박진감을 배가시키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거기에 선생과 학생 두 사람을 구성한 다른 세계 - 학교 - ,위성적인 또 다른 세계 - 쟝의 갤러리 이야기 - 를 가져다 붙이면서 또다른 현실 세계의 이야기를 부가적으로 적용하고 있다.
이런 병렬식 연결은 무엇 보다 현실 세계와 상상 세계 ( 클로드의 글이라는 명목으로 영상화된 라파 가족과 클로드의 이야기) 의 경계를 불분명하게 하면서,클로드 글의 진실성 여부를 궁금하게 만드는 동시에,작품으로 형상화되는 세계와 현실 세계의 감각적 주고 받음이라는 어려운 문제를 일부러 건드린다.즉 오종은 예술적 창조라는 행위가 가지는 악마성,그것이 만드는 사람 (작가와 독자)에게 가하는 중독성과 그에 수반되는 위험성,거기에 클로드라는 소년의 본질적인 심리 문제 (내밀한 중산층적 구조의 파괴라는 다분히 프랑스적인 악마적 문제 제기) 를 다함께 제시하면서,지성적이면서도 감성적인 게임 여러 개를 관객에게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런 종류의 '관객 건드리기'는 지적인 게임의 양상을 띠고 있고,인물과 무대의 병렬식 구성에 의하여 게임의 재미,즉 내러티브의 절묘함을 더한다.그러나 이런 영화에 대해 쓰여지는 글은 영화가 가지는 수평적 병렬 구조를 따라가기 보다는 차라리 캐릭터에 대한 수직적인 얘기로 진행하는 게 나을런지도 모르겠다.동쪽에서 서쪽으로 횡단하는 것과 북쪽에서 남쪽으로 여행하는 것의 차이는 분명하겠지만,어쩌면 그의 내러티브 게임에서 벗어나는 것이 지금 쓰는 이 글의 진행을 위해서는 더 나을 수도 있겠다는 것이다.
선생 제르망-중독되다.그런데 무엇에?
영화가 시작하면 다소 씨니컬해보이는 선생 제르망이 등장한다.그는 학교의 교무회의에 참석하고 있는데,새로운 평등교육을 지향하면서 모든 학생들에게 일률적인 유니폼 (그러니까 교복) 을 입히려는 학교 측의 정책을 한껏 비웃고 있다.학교 이름은 '플로베르' 고등학교다.
그는 학생 클로드 가르시아의 작문이 친구 라파의 가족을 너무 심하게 훔쳐보고 있다고 생각하고는 클로드에게 그 점을 지적하지만 클로드는 '그냥 주말에 지낸 얘기를 썼을 뿐이며','다른 사람이 아닌 선생님만 보라고 썼다'라고 대답한다.
- 여기엔 학생 클로드의 선생 제르망에 대한 이상한 낚시가 있다.그러나 그는 이 미끼에 흔들리지 않는다.그냥 넘어간다.
이런 이례적인 상황에 그의 아내 쟝 (어느 영화에서나 잊기 힘든 크리스틴 스콧 토마스가 등장한다) 은 매우 상식적인 반응을 보인다.16세 소년 치고는 너무 심한 '행동'이며 부모와의 상담,교장에의 알림이 필요하다고 그녀는 말한다.이때 제르망은 클로드의 작문도 예술이자 창작이라며 그를 옹호한다.거기에다 큐레이터인 자신의 아내의 갤러리에 전시된 작품들의 전위성을 지적하기까지 한다.
오히려 그는 클로드에게 고전 책들을 빌려주며 문학적인 조언을 시작한다. 왜 자신을 도우려 하느냐는 학생의 물음에 그는 클로드에게 글을 쓰는 재능이 있어서라고 대답한다.
클로드의 라파 가족 이야기가 점점 그 강도를 더해 가자 - 속물적인 라파와 그의 아버지에 대한 야유와 라파 어머니에 대한 섹슈얼한 접근의 의도가 비추어진다- 제르망의 아내는 선생을 갖고 놀려는 것이 이 아이의 의도라고 말한다.그러나 그는 아내의 이야기를 무시하며 클로드의 글을 옹호한다.그러면서도 그는 여전히 아내의 예술관
엔 공감하지 못한다.
이때 승부수 하나가 던져진다.라파에게 수학을 가르쳐 주겠다는 명목으로 가족에게 접근했던 클로드는 제르망에게 라파의 수학 성적이 올라야만 계속 그 집에 드나들며 글을 쓸 수 있다고 말하면서 수학 시험지를 유출시켜 달라는 부탁을 한다.자신에게 계속 글을 쓰게 하려면 범죄적 행위 마저 서슴지 말아달라는 발칙한 강요와 다를 것 없는 제안이다.영화가 갑자기 윤리적인 문제로 넘어간 것이다.제르망은 이 제안을 거부하지 못하고 수학 시험지를 훔친다.클로드의 글에,그리고 그 글에 개입하는 자신의 모습에 중독되어가는 것이다.필립 글래스 풍의 미니멀리즘스러운 음악이 흘러나오며 그가 생각하는 것은 걸작을 생산하지 못한 소설가로서의 자신의 재능 없음에 대한 반대급부로서의 보상일 것이다.이로서 영화는 윤리의 경계를 살짝 넘어서기 시작한다.
클로드는 제르망 선생의 이런 상황을 간파해 낸다.그는 서서히 선생의 삶에 개입하려 하는데,그 개입 역시 글을 통해서이다.그는 연작 형태로 써 가는 그의 글을 통해 재능이 없어서 분노하는 제르망 선생을 묘사하고,이어진 대화에서는 '왜 자녀를 갖지 않았느냐'며 직접적인 개입을 시도하기도 한다.(물론 이 말은 창작자로서의 불능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질문이다)
그러나 제르망 선생의 중독은 점점 심화된다.클로드의 다음 글 - 수업 시간에 제르망 선생에게 모욕을 당한 라파에게 제르망 선생을 학생 언론에 고발하라는 클로드의 부추김이 있는- 을 읽었으면서도 그는 현실적인 개입을 하려 하지 않으며,이 장면이 형상화된 영상 (라파와 클로드의 대화)에 직접 등장하기까지 한다.
우디 앨런이나 잉마르 베리만이 연상되는 이 장면은 현실과 상상계의 완벽한 혼란을 상징한다.저 장면은 클로드의 글이지만,거기에 개입하여 창작의 방향을 매만지려는 제르망은 저 장면 안에 스스로 등장해 클로드와 얘기를 주고 받는다.(이때 당연히 라파는 선생의 말을 듣지 못한다) 창작에의 질시와 중독이 또다른 단계로 진입한 것이다.이 상황은 제르망 선생의 창작에 대한 열등감만 가지고서는 설명이 안 된다.창작 행위 자체가 가지는 유혹,세상을 변조하고 재단하려는 인간 자체의 본질적인 성향이자 자발성과 관련이 있다.
대화 중인 두 소년 사이에서 갑자기 솟아오른 제르망 선생의 얼굴은 호기심과 개입에의 욕구로 가득한 것이다.클로드의 작문,클로드와 라파 사이에 벌어진 대화가 진실이라면 생길 수 있는 위험하고 귀챦은 문제를 이미 초월해버린 것이다.
반면 그의 아내는 여전히 현실감을 유지하고 있다.글을 읽은 아내는 라파가 작성한 제르망에 대한 고발이 실린 학생신문기사 마저도 클로드가 작성해 준 것이 틀림없다며 남편에게 경고의 말을 던진다.
그러나 그는 이미 디자이너의 유혹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교장의 비공식적인 경고와 아내의 걱정에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는다.심지어 클로드가 '라파의 모든 캐릭터들은 바로 선생님이 만든 거라고' 주장해도,'이젠 네가 좋아하는 걸 써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작품에 대한 또다른 방향을 제시할 뿐이다.
아내 마저도 그런 그에게 혹시 소년 클로드에게 섹슈얼하게 매혹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품기까지 한다.그러나 그는 다시 한 번 클로드의 글-라파의 집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영상- 에 등장한다.'좋아하는 쪽의 내용을 쓴',라파의 엄마에 섹슈얼한 접근을 서슴지 않는 클로드와 또다시 화면 안에서 얘기를 주고 받는 것이다.
그러나 클로드의 라파 엄마에 대한 욕망이 점점 심해지자 제르망의 중산층적 위기감각 역시 살아난다.너무 심했다고 말하며 '욕망과 글을 혼동하고 있다'고 클로드를 비난하며 이제 문학 레슨은 끝났다고 선언한다.그러나 그는 끝내 글에 대한 유혹을 떨쳐내지 못한다.그는 클로드가 쓰레기통에 버린 글을 다시 주워 읽고야 마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본격적인 영락이 시작된다.그는 시험지 유출,학생에 대한 모욕과 관련되어 학교에서 해고 당한다.이때 클로드는 그의 집에서 그의 아내 쟝과 함께 있다.(또 하나의 IN the house) 집에 돌아온 제르망은 쟝을 에로틱하게 묘사한 클로드의 글을 읽고 아내의 목을 조르며 폭력을 휘두른다.클로드와 쟝의 섹스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그에겐 오직 클로드의 글 만이 중요하다.해고 당한 그에게 남은 유일한 세계는 클로드의 글이다.클로드의 글은 현실세계로,그의 집으로 잠입해 들어왔고,아내가 집을 떠나겠다고 선언한 순간 (그의 아내는 오히려 현실감을 잃은 그를 포기하고 그를 떠나는 것이다) 이성을 잃는 것이다...
창조,그 변화에의 중독
예술이 되었든 건축이 되었든 정치가 되었든 그 어떤 사회운동이 되었든,무언가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만드는 사람을 둘러싼 세계에 변혁을 가하고,그 세계의 형태에 변형을 일으키겠다는 강렬한 의지에 기반한다.자신이 원하는 세계로 변모해가는 세상의 모습,그리고 그 모습이 보여주게 될 완결성에 대한 기대,또 무엇보다도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동력에서 유래된 변모의 과정을 지켜보는 쾌감.이것이야말로 창작과 창조를 지탱하는 가장 커다란 에너지다.
따라서 창조자-창작자는 바로 이 과정에 중독될 수 밖에 없다.그러나 불행히도 모든 시도가 성공을 거두는 것은 아니다.개인의 능력과 기회,그를 둘러싼 상황과 성격적 자질 같은 모든 변수들이 그 과정을 실제로 지배한다.그러나 실패와는 무관하게 중독의 경험과 성향은 여전히 유지된다.
그리고 그 중독은 결국 만족스럽게 변모되지 않는 현실세계와 자신의 두뇌 속 상상 세계 사이에서 균열을 일으키고,공간과 시간 사이에 혼란을 일으킨다.그리고 이것은 모든 창작자들의 공통된 숙명이다.그 어떤 예술적 영웅도 이 일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두 세계 사이에서 균형을 잃는 일은 거의 매분 매시간 일어난다.또 어느 정도는 현실감각을 포기하고 버려야 성공적으로 수행될 수 있는 것이 예술적 창조 작업이다.
이 영화 <인 더 하우스> 테마의 대부분은 바로 이 지점에 바쳐진다.결국은 시간과 현실에 대한 감각을 잃고 만 예술가,그 비극적 존재.그 상황을 오종은 내러티브와 영화적 테크닉을 이용하여 날카롭게 그려낸다.
예술적 루저들만 감각을 잃는 것은 아니다.때로는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권력자들도,또는 소우주를 지배하는 소영웅들도 ,자신들이 만들어내는 세계가 자신들이 원하는 세계와 같지 않다고 느낄 때 분열을 일으키고 문제를 야기한다.폭력과 혼란을 일으키고 억지로라도 자신의 세계에 메스를 가하려 힘들을 밀어넣는다.어떤 예술,어떤 변혁에의 의지는 공포 그 자체인 것이다..
클로드의 경우-아웃사이더의 인 더 하우스
글을 쓰는 소년 클로드.그의 글에는 그의 내밀한 욕망과 소망이 한꺼번에 반영되어 있다.친구인 라파의 엄마를 향한 연정과 함께 ,자신이 가지지 못한 중산층 가족 질서 속으로의 편입,그리고 뒤이은 파괴에의 욕구가 한꺼번에 뒤섞여 있는 것이다.
그러한 그의 글 쓰는 행위는 선생 제르망이 끼어들면서 복잡한 방식으로 변화하게 된다.좀 더 세련된 방향으로,좀 더 간악한 방법으로,좀 더 로맨틱하고 에로틱한 쪽으로..,그의 작문은 선생의 조언과 어우러지면서 다양한 양상을 띠고 스크린 위에 전개된다.
클로드 역시 제르망 선생처럼 어느 순간 상상계 (글)와 현상계 (현실) 가 불규칙하게 섞이면서 혼란을 겪는 듯 보인다.(그의 라파 엄마와의 로맨스의 진전을 혼란이라 부르는 이유는 그의 글이 로맨스 앞쪽에 선행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그는 글이 현실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 - 라파 엄마는 가정을 택한다 - 을 깨닫고,즉 다시 말해 라파의 집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집을 떠나는 쪽을 선택한다.
(그의 그 어떤 노력에도 불구하고 ,저 소파 안에는 클로드가 앉을 자리가 없다)
클로드가 제르망 선생과는 달리 주체적인 선택을 해낼 수 있었던 이유는,그가 자신의 글을 쓰는 '주체'로서 거듭났다는 사실,문학 선생의 온갖 조언에도 불구하고 결국 글의 주인이 클로드 자신으로 결정되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그는 과감하게 쓰레기통에 자신의 글을 버렸고 글의 세계를 떠나 라파의 엄마에게 자신과 함께 집을 떠날 것을 제의하는 것이다.클로드는 결국 자신의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던 로맨스에는 실패하지만,이 실패의 책임을 제르망 선생에게 묻는 일련의 행동들 이후,완전히 글을 떠나 현실로 복귀하는 것이다.즉 제르망 선생의 현실이 영락과 자멸로 결정되었던 데에 반해,클로드는 또다른 미래를 기다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존재 주소가 중산층의 집 안 (그러니까 in the house) 이 아니라 집 바깥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지한다.그에게 글이란,어떻게든 인사이드로 들어가려는 아웃사이드 존재자의 몸부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영화 말미,그는 완전히 영락해버린 제르망 선생을 찾아가 건너편의 공동주택들이 보이는 나무 벤치에 함께 앉는다.
사실 벤치는 영화 초반에도 이미 등장했다.그 벤치는 라파의 집 건너편에 있었고 클로드는 그 벤치에 앉아 라파의 엄마와 라파의 집을 향한 틈입의 욕망을 시작했던 것이다.그러나 이제 벤치의 용도는 달라졌다.클로드는 창작자 특유의 악마적 미소를 유지하며 제르망에게 다시 예전처럼 글을 함께 써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하는데,이번의 클로드는 건너편 '집'들을 향한 구체적인 욕망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그는 진짜 글들을 써 보려고 하는 것이다.
이때 오종의 카메라는 그 공동주택들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멀리서 묘사하고 있다.어떤 집에서는 권총 강도에 의한 살인이,어떤 집에서는 격렬한 섹스가..,마치 거대한 파노라마처럼 스크린 안에 전시된다.
즉 모든 글들은,모든 영화들은,그 모든 '집'들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이야기',그 집 안으로 들어가려는 (또다시 in the house) 욕망이자 도구라는 사실을 이 영화는 매듭짓듯 이야기하며 끝을 낸다.이야기,삶은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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