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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영화 9.<꼭 언급되어야 할 2013년의 영화에 대한 메모>

신의 영화들/FILM FLOATING

by 폴사이먼 2013. 12. 28.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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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의 영화를 정리하려고 영화들의 목록을 작성하고 그 목록들을 분류하려고 하자 오히려 머리가 아팠다.분류란 결국 정의를 내리는 것인데,이 정의 내리기는 엄청나게 개인적인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이런 자의적인 분류가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쓴웃음을 짓다가 결국 이 모든 분류들이란 결국 영화 자체와는 상관 없는 내 편의를 위해 존재하는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모든 분류 기준을 집어치웠다.그리고 몇 개의 단어들만을 나열했다.이 단어들은 2013년에 내가 보았던 영화들에 대한 내 느낌들에서 비롯된 단어들이었다.그러자 몇몇 영화들이 또다시 끼리끼리 헤쳐모여지고...결국 분류되고 말았다.무언가 허망하다..나는 단어와 메모를 결합하여 다음의 글을 쓴다.

 

아름다움

 

일대종사(왕가위)

 

 

 

왕가위가 품었던 무협 영화에 대한 욕심,나아가 중국 혈통을 가진 모든 작가들이 자연스럽게 갖게 되는 무협의 전통에 대한 형상화의 열망,그리고 중국 문화 그 자체..를 떠나 이 영화는 아름다웠다.아름다운 영화였다.빗방울의 작렬과 그 안의 결투들,거의 모던 발레를 연상시키는 무협 고수들의 부드러운 움직임들,그리고 왕가위 특유의 안타까운 멜로드라마들.사랑과 무도에 대한 아포리즘들.나는 이 영화에 대한 모든 이의제기들에 저항하려 마음 먹었었다.그 뜨거웠던 여름 날에 말이다.

 

그의 스텝 프린팅.과거엔 그리도 낯설어 보였던,그러나 어느 순간 왕가위 영화 특유의 인장처럼 보였던 그의 스텝 프린팅 역시,흐르는 아름다움을 영원히 캡쳐하려는 우리 사람들의 안타까운 염원처럼 느껴졌다.아름다웠다.일대종사.

 

그래비티 (알폰소 쿠아론)

 

 

 

<그래비티>에서 아름다움을 느꼈다? 글쎄,여기서 느낀 아름다움은 순수한 미학적 아름다움은 아니었던 것 같다.영화적 경험에 대한 찬탄에서 비롯되는 2차적 아름다움,재현으로서의 영화에 대한 경탄에서 본능적 감각처럼 지각되는 아름다움이었을 것이다.

 

그 날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끈,라인(line),그리고 보이지 않는 힘이자 선(line)인 중력,그 밀고 당김.존재에 의미와 위로를 부여하는 소재로서의 이런 끈들이,고독하고 광대한 우주의 비쥬얼과 함께,어딘지 익숙하지만 심금을 울리는 서사들과 함께,끊임없이 관객의 마음을 공격해댄다.영화 말미,드디어 땅을 딛고 선 샌드라 블록의 발을 카메라가 보여줄 때,우리는 실종과 사라짐의 욕구 보다 현세의 현상적 삶에 대한 욕구가 훨씬 강함을 자각하게 된다.

 

그리고 또다른 메모들.

 

1.드디어 3D에 적응.최적의 3D영화.

2.담배를..끊든지 줄이든지 해야 한다는 사실을 라이언의 호흡곤란을 '들으면서' 깨달았다.

3.은별이에게..한자 공부를 시켜야 하는 것은 아닐까

 

따뜻함

 

어떤 영화들로부터는 따뜻함을 느꼈다.요새 유행하는 말로는 힐링,위로 ..뭐,이런 감각들일 텐데,힐링과 위로라는 말은 너무나 많이 쓰이기 때문에 오히려 말이 주는 위로와 힐링의 능력이 감소하고 있는 것 같다.. 

 

엔젤스 셰어 :천사를 위한 위스키 (켄 로치)

 

 

 

이 영화의 방점은 angel이 아니라 share에 찍힌 다.블루 컬러,그리고 하층 계급에 대한 무한한 애정이 거의 눈에 보이는 켄 로치의 영화.또한 켄 로치의 영화들 중 가장 유머러스하고 따스한 영화.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관객 모두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게 될 정도.좋은 위스키 한 모금이 어김없이 그리워지게 만드는 영화다.내게 위스키 한 잔 - 특히 이 영화가 말하는 천사를 위한 위스키 한 방울- 이 주어졌다면 무한한 일관성을 보여주는 켄 로치 대인을 위해 건배했을 것 같다..

 

이탈리아 횡단 밴드 (로코 파팔레오)

 

 

와우,소리를 절로 지르게 하는 이탈리아의 탈도시적 배경과 부드러우면서도 말랑말랑한 음악들,그 자연 속에서 행복하게 변해가는 배우들의 표정이 가히 힐링이다.(비록 극장을 나서면 현실 세계가 기다리고 있지만) 가끔은 이런 종류의 따뜻함이 필요하다..

 

일루셔니스트 (실뱅 쇼메)

 

 

 

이 영화에 대해선 글을,문장을 써서는 안된다.마법은 글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오스카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가 생각난다는 조그만 힌트만 남긴다.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 (로버트 로렌즈)

 

 

 

TV 가 아닌 그라운드에 앉아서 야구를 보는 사람,과거 동대문 운동장의 먼지 풀풀 날리고 불편하기 짝이 없는 딱딱한 의자에 앉아서 야구를 보았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정말 최고의 야구 영화.

 

야구선수의 동작은 관중들에게 육체의 언어다.우리는 그들의 동작으로부터 그들의 의도와 의사를 읽는다.그러나 이 영화는 그 언어를 '소리'라는 감각적 차원으로 고양시킨다.동작을 '듣는' 것이다.이 경험적 아이디어와 배우들의 노련한 연기가 다소 헐겁고 비약이 심한 연출과 각본을 완벽하게 커버한다.이것도 야구적 팀플레이다.

 

캐릭터들.

 

다음 단어는 캐릭터.올해에도 내가 보았던 영화들 속에는 잊을 수 없는 영화적 캐릭터들이 꽤 여럿 등장했던 것이다.생각나는 대로 꼽아보자.

 

블루 재스민 (우디 앨런)

 

 

 

오랜만에 보는 우디 앨런 특유의 정신에 대한 정밀한 탐구(이 할아버지 뉴욕에 가까워지자,즉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자 과거의 빛나는 재능이 살아나고 있다..)

 

케이트 블란쳇만 훌륭한 연기를 하는 건 아니지만(하지만 올해 최고의 연기),이 영화에서의 재스민은 우디의 여성 캐릭터 중 거의 완전체 수준이라 할 수 있겠다.이름 바꾸기로 시작한 그녀의 과거 바꾸기는 스스로의 리얼리티와 reality sense 를 교란시키고 ,결국 스스로의 영혼을 함락시킨다.그 실존의 모습을 우디 앨런은 현대인의 한 전형처럼 제시한다.(좀 더 사유를 확장시킬 수 있겠지만 여기서 멈추자..)

 

그러나 난 어쩐지 재스민이..완전히..망가지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위대한 개츠비 (바즈 루어만)

 

 

 

1.개츠비는 한때 사랑의 순수한 보수성-시간과 그 시간 속에서의 감각을 결코 잃지 않으려는-의 대표적 표상이었다.그러나 20세기의 레드포드가 다소 우울하고 자폐적으로 그려졌던데 반해,21세기의 디카프리오는 좀 더 히스테리컬하고 어느 순간 자신의 내면적 기질을 폭발적으로 드러내며 자멸하는 양상으로 나타난다.세기에 따라 자멸의 전단계와 모양이 변한 것이다.어떤 관객들에게는 영화의 이런 부분이 굉장히 싫게 느껴졌으리라 생각되었다.사랑도..변하는 것이다..그러나 개츠비적 사람들은 그런 변화를 못 견딘다.난 그런 사람들이 더 좋다..

 

2.바즈 루어만이 만들어낸 화려하고 휘황찬란하며 최상의 음악과 춤이 혼합된 개츠비의 원더랜드는,과거 어느 한 시점에 영원히 결박되어 그곳으로 모든 시간을 되돌리려하는 개츠비의 황량한 내면의 정반대에 위치한다.루어만은 1920년대의 뉴욕 황금기를 21세기로 끌어와,그 시간대를 21세기적으로 재현하려 하는데 이 외면과 내면의 시간의 교차,그 영원한 엇갈림..사실 이것이 개츠비가 가지는 캐릭터로서의 가장 큰 특징이다..(바즈 루어만은 우연히 그 특징을 잡아냈다..)

 

링컨 (스티븐 스필버그)

 

 

 

저 위대한 다니엘 데이 루이스는,자신이 속한 우주의 중심에서 가장 강력한 자기장을 발휘하며 자신을 둘러싼 별들이 수시로 폭발하는 것을 지켜본다.(샐리 필드와 토미 리 존스를 비롯한 숱한 별들이..) 그는 놀랍도록 자신을 자제하며 자신의 투명한 중력을 유지시키는데,그 공사를 구분하는 능력 (사적인 장면,즉 백악관 안에서의 부부싸움 장면에서 그는 참아왔던 감성적이고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다)  하나만으로도,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영화 역사상 최고의 배우들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에이브러햄 링컨에 대한 스필버그의 선택은 결국 그를 처절한 중립지대에 위치시키는 것이었다.그는 영화 중반에 이르기까지 그를 둘러싼 폭풍 같은 상황과 캐릭터들 사이에서,마치 유령처럼 그저 웃기만 하며 꾸부정한 뒷모습과 구렛나루만을 보여준다.마치 침묵과 경청만이 자신의 유일한 무기라는 듯.

 

그러나 그 이면엔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들에 대한 격렬한 의지가 숨어 있다.음지의 그가 매관매직이라는 옳지 못한 일에 뛰어드는 순간,

스필버그는 링컨에 대한,그리고 원시적 민주주의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한다.그리고 이 결정의 어쩔 수 없음을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관객의 태도에는 실로 수많은 다양성이 생겨나게 된다.이 영화는 스필버그의,링컨에 대한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질문이다.

 

셰임(스티브 맥퀸)

 

섹스 중독자의 정밀한 생태학적 보고서라는 측면에서,영화는 비전형적이거나 예외적인 캐릭터를 제시하려 하지 않는다.주인공 브랜든은 실제로 존재할 가능성이 다분한 인물이다.그가 영화 속에 등장하는 지하철 순환선의 영원한 욕망의 거미줄 안에 걸려 상징적으로 고립될 때,관객은 주위 사람들의 익숙한 얼굴들을  다시,새롭게,낯설어하며,쳐다보게 된다.

 

세션:이 남자가 사랑하는 법(벤 르윈)

 

 

 

 

 물론 존 호키스는 <나의 왼발>의 다니엘 데이 루이스를 생각나게 했다.오히려 호키스가 루이스 보다 더 불리한 상황이었다.그러나 두 사람에게서는 자신의 신체적 불행을 압도하는 깊은 유머와,그리고 시가 있다.사랑하는 사람의 언어는 산문이 아니라 운문이며,그 따뜻한 언어가 사랑하는 사람들 특유의 행복감을 불러 일으킨다.사랑에 대한 이러한 시적 감성이 이 영화를 특별하게 만든다.특수화된 작은 세계에 대한 정감어린 스케치.세션.

 

까미유 끌로델 (브루노 뒤몽)

 

 

 

예술혼vs 편집증,어떻게든 정신병원을 빠져나가려고 벌이는 현실과의 타협 그리고 부분적 굴종vs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는 자존감,비극적 운명에 대한 투쟁vs 모든 것에 대한 냉소,따뜻한 사랑 vs 세상 전체에 대한 의심.당대 최고의 여배우 쥴리엣 비노쉬의 얼굴엔 이 모든 극단적인 양가감정이 다 살아 요동을 친다.앞으로 비노쉬의 까미유 끌로델이 아닌 다른 까미유 끌로델을 상상하기는 힘들 듯 하다.

 

실제 정신병증을 앓고 있는 사람들과의 연기.그리고 뒤몽과의 멋진 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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