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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영화13.빛나는 우리 영화들5.<파수꾼> <돼지의 왕>- 학교에서.

신의 영화들/FILM FLOATING

by 폴사이먼 2011. 12. 22.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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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38.<파수꾼>-윤성현

 

학교를 소재로 한 영화는 참 많았다.그도 그럴 것이 영화를 보는 많은 관객들이 학교와 직간접적으로 연관을 맺고 있고,또 그들은 대부분 학교에 대한 좋고 나쁜,또는 기쁘고 슬픈 기억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여고생들 사이의 관계를 공포와 연관시켜 다룬 <여고괴담 시리즈>역시 어떤 의미에서는 학교에 대한 이야기로 생각할 수 있다.그 시리즈들이 학교를 어떻게 생각하고 다루어 왔느냐 하는 얘기 역시 영화와 우리 사회에 대한 큰 주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남학생들을 다룬 얘기들은 그렇게 다양하지 않다.70년대의 명랑만화스러운 학교 이야기 - 예를 들어 김승현의 얄개 시리즈-,나 학교 일진들의 폭력 성향을 쟝르적으로 치환하면서 어깨에 잔뜩 힘을 주게 만드는 <말죽거리 잔혹사>류의 이야기,또 어른 폭력배들의 과거담을 다루면서 소환되는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서의 이야기 - 곽경택의 <친구> 같은 경우가 되겠는데,남자 고등학생들의 발현되지 못한 에너지를 주로 폭력으로만 연결시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가장 잘 드러난 영화라고도 할 수 있다- 정도에 그쳐 왔다.아마,얼마 안 있으면 섹슈얼한 억압을 코미디로 풀어내는 '아메리칸 파이'류의 이야기들이 많이 등장하게 될 것이다.(그렇게 되면 뉴라이트 류의 사람들은 아마 입에 거품을 물게 되겠지)

 

우리나라 영화가 그리는 남자 고등학생들 사이의 관계 역시 그렇다.그들은 의리 빼면 시체인 것이다.그들이 닥친 문제가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옳든 그르든 무조건 우리 편이 내 편이며,이 편들기 자체를 통해 내러티브의 동기와 에너지를 그리고 있었을 뿐이다.더구나 그들 사이의 내밀한 관계를 묘사한다는 것은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다시 말해 남자 고등학생들을 덩치만 큰 근육맨으로 그리면서,거기로부터 나오는 동력을 영화적 소재로 이용해 왔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그들의 섬세한 내면 따위는 좀 심하게 말하자면 동성애를 주제로 그리는 영화가 아니라면 영화적 소재 자체로 설 수 조차 없었다.

 

그러나 2011년 올해 좀 다른 태도를 가진 영화 하나가 등장했었다.아직 서른 살이 되지 않은 젊은 감독의 장편 데뷔작 <파수꾼>이 그것이다.

 

 

 

이 영화를 보고 나는 이렇게 메모했다.

 

-강렬한 터프함과 가느다란 섬세함이 동시에 추구된, 거의 최초로 시도되는 십대 남자애들의 심리에 관한 영화.거의 무작위적으로 흔들리는 듯한 카메라와 갑작스럽고 공포스럽게 시도되는 익스트림 클로즈업이 젊은 배우들의 에너지를 폭발 직전까지 유도하며 진행된다.-

 

이 영화의 주된 가치는, 남자 고등학생들의 관계를 다루면서 그 관계에서 파생되는,과거엔 여자 고등학생들의 전유물이었던 섬세한 에너지의 주고 받음을 다루었다는 데에 있다.한 학생의 자살과 그 자살을 추적하는 학생의 아버지의 이야기로 시작해서,스릴러처럼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이 영화는,그 학생의 자살 원인 보다는 결국 자살까지 이르게 되는 주인공 기태 (이제훈 역)와 그의 막역한 친구들 사이의 내면적 관계들을 다룬다.(그리고  어찌 보면 이런 식의 주류 영화스러운 전략이 일정 정도 이상의 성공을 거두었다고도 볼 수 있다)

 

물론 이 영화에서도 욕설과 폭행,그리고 왕따가 등장한다.우리나라 남자 고등학교에서 벌어지는 일상적인  일들이기 때문이다.어른들에게는 벽을 세우고 결코 진실을 말하지 않는 아이들이 등장하고,서로를 향해 이죽거리는 여러 대사들 역시 빠지지 않는다.'많이 컸네..','좋냐?' ' 씨바 그게 나한테 할 소리냐?"  따위의 대사들은 과거 우리 영화의 남자 고등학생들의 입을 통해서도 들을 수 있었지만,이런 정도로 아이들의 내면을 추구한 영화는 거의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아마 윤성현은 지속적으로 남자 아이들의 이야기를 다루게 될 것이라고 나는 내 마음대로 추측하고 있다)

 

캐릭터들의 완벽한 구분과 내러티브에 따라 변화하는 그들의 내면이 완벽하게 연기적으로 표현되었고,영화적 시간들의 유연한 연결 역시 칭찬 받아 마땅할 영화적 특기였다.다소 도식적이고 허무한 결말을 통해 이 영화의 파괴력이 다소 떨어진 측면도 있지만,이 단점 역시 '허접'의 수준에까지 이르르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 영화에 출연했던 청년 배우들은 아마 스타덤에 오르게 될 것이다.

 

2011-39.<돼지의 왕>- 연상호

 

역시 학교 이야기,또 남학생들 사이의 얘기- 1980년대 후반이나 1990년대 초반의 남자 중학생 이야기를 다루는 것으로 보인다- 를 다루고 있지만,단순히 학교 내부의 이야기나 아이들 사이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 사회 전체를 향한 우화처럼 내러티브를 전개시키는 2011년의 애니매이션 영화가 있었다.연상호의 <돼지의 왕>.개인적으로 별로 좋아하지 않는 그림체이긴 하지만 이 영화의 서사가 가지는 폭발력과 중층적인 의미,21세기 한국 사회와의 완벽한 싱크로율 때문에 영화 내내 불편한 심정과 어쩔 수 없는 동의의 감정에 사로잡히게 했던 영화였다.

 

 

이 영화 역시 사업에 실패하고 아내까지 살해한 경민(오정세 목소리역)이 15년 전의 중학교 친구 종석(양익준 목소리 역)을 찾아와,15년 전 중학교 시절 얘기를 꺼내며 당시의 아픈 상처와 그들의 우상이었던 친구 철이의 투신 자살을 회상하면서 시작한다.과거에의 추적.역시나 미스테리 스릴러인 것이다.

 

영화 초반엔 우리나라 영화가 즐겨 그려대는 학교 내부의 질서 - 우등생이자 선도부로 활동하는 아이들에게 폭력과 규율이라는 미명 하에 지배당하는 평범한 아이들의 스토리 - 와,스스로를 '돼지'라고 부르는 - 피지배 계층을 상징하는 - 아이들의 영웅으로 등장하는 소년 철이 - 아이들은 그를 [돼지의 왕>이라고 부른다- 의 이야기를 그린다.

 

그리고 영화는 철이의 죽음에 얽힌 속사정을 미스테리 분위기로 끌고 간다.(스포일러의 위험성을 감수하면서 말한다면 저항의 아이콘이자 아이들의 왕이었던 철이는 결국 변심하고 비굴해지는데,우상의 추락을 견디지 못한 돼지로서의 아이 하나가 그의 죽음을 유도하고 방조하며 실제로는 살인을 저지른다).그 상황에서 '개들'로 설정된 지배 계층 아이들의 폭력성,폭력에 굴종하는 아이들 사이의 관계 그리고 그 캐릭터들 간의 분명한 차이점,풍부한 폭력의 상징들,당시를 기억하게 하는 디테일들 - 나이키 운동화와 게스 청바지가 등장한다 - 그리고 최종적인 패배들을 영화는 격렬하면서도 차분하게 배치한다.

 

 

 

 

처음 이 영화를 보았을 때 나는,이 영화에 대한 세대간의 감각 차이,- 최근의 세대들은 이 영화를 좀 다른 형식으로 받아들이거나,어쩌면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할런지도 모른다.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저항의 상징인 '돼지의 왕' 의 개념이 20세기 세대들과는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폭력의 원형으로서의 학교,그리고 그에 연결되는 군대,20세기와 21세기 등을 떠올렸었다.

 

그러나 이 영화는 본질적으로 우화다.영화의 철이가 아무리 과감한 폭력과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던 깡과 완력과 배짱으로 '개들'을 제압한다 해도,영화를 보는 관객이 영화 내러티브의 리얼리티를 느끼기 보다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에 자꾸만 영화 자체를 대입시키고 있기 때문에라도 이 영화는 우화다.그것도 뛰어난 지점들을 여러 곳에 가지고 있는 우화다.

 

 

 

가령 우리는 검찰을 권력의 주구,즉 '개'라고 부른다.(물론 개들에겐 진심으로 미안하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권력을 부여한 사람에게 철저히 복무하며 또한 자신들과 자신들이 이루고 있는 조직들의 안위와 이익에 민감하다.또 가령 오늘의 정봉주 재판.그들 개들은 똑같이 BBK에 대하여 말하더라도 더 센 권력 (예를 들어 박근혜)에게는 한 마디 말도 못하지만,정봉주 정도는 그냥 지옥으로 보내버리고 만다.(도대체 그분에게 지켜야 할 명예라는 것이 있긴 있는지 모르겠지만 ) 더 나아가자면 FTA 케이스.개들의 배후에 있는 자본과 미국의 이익을 위하여,우리나라의 국회는 이 영화의 개들처럼 행동한다.또다른 개들인 보수언론은 겨우 최루탄 정도에 온갖 호들갑을 다 떨어대고 말이다.(사실 개들의 감각 중 가장 예민한 것이 바로 후각이다.냄새,권력의 냄새를 맡는 것엔 따라서 당연히 천부적이다)

 

다시 말해 이 영화가 우화로 받아들여질 수 밖에 없는 이유는,이 영화의 개들이 우리 눈 앞에 현존하고 그들에 의해서 '돼지'가 될 수 밖에 없고, 짓밟히고 학대 당할 수 밖에 없는,또는 그렇데 되어가고 있는 현실을 관객들이 잘 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주목하고 있는 쪽은 개들이 아닌 돼지들이다.이 영화는 개들도 아니고 개들과 돼지들의 관계도 아닌, 돼지들 사이의 관계와 역학을 주목하며 영화를 풀어나간다.우선 이 영화의 돼지들은 결코 연대하지 않는다.15년의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그들은 돼지의 위치에 있지만,여전히 서로를 향한 반목과 질투가 살아있다.투지도 없고 그렇게 할 수 있는 동력도 없다.그들은 그들이 영웅시할 수 있는 '돼지의 왕'을 설정했고 - 15년 전 친구 철이야말로 그들의 영웅이자 왕이다 - ,그 왕의 추락을 못견뎌 했으며,15년이 흐른 지금도 그런 성향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고 이 영화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그리고 이런 관점과 태도가 이 영화의 결정적인 미덕이다.

 

그러면서도 이 영화가 목소리를 높여서 돼지들 사이의 연대를 강조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영화가 끝나는 그 시점까지 영화는 그런 기색 조차 보이지 않는다.대신 그들의 돼지로서의 태도만을 주목한다.그리고 그러한 관찰로부터 영화는 21세기 우리나라 돼지들의 모습을 추출해 낸다.그 우울한 초상을.

 

다만,한 가지 틀렸던 것은 2011년 현재,돼지들의 왕 돼지들의 영웅은 철이와 같은 아웃사이더가 아니라는 것이다.돌려서 말할 필요가 없다.안철수는 철이와 달라도 너무 다르다.21세기의 돼지들은 그들의 왕의 덕목으로서 스펙과 인격 그리고 고매한 자본을 상정한 것이다.

 

물론 안철수가 가진 속성을 그렇게 뭉뚱그려 얘기하는 것은 그에게 억울한 일이다.하지만 안철수가 영웅으로 떠오를 때,돼지들이 당연히,그리고 절망적으로 추진해야 할 연대가 실종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 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연대가 실종될 때,돼지는 진짜로 돼지가 되는 법이다.그리고 우리 돼지들에게 이제 왕은 필요없다!.

 

이 영화에는 또다른 재미있는 캐릭터 하나가 나온다.영화 중간에 폭력적인 질서가 온 교실을 지배하고 있을

때,전학생 하나가 나타나는데,.전학생 박찬영은 개들보다 더 뛰어난 지적 능력과 말솜씨로 바람을 일으킨다.그러나 이 박찬영 역시 곧 질서에 순종하게 된다.다만 그 이유가 다르다.'그는 더럽지만 조금만 버티면 안 볼 넘'들이기 때문에 교실 안의 질서를 받아들이기로 하는 것이다.그러나 그가 모르는 것은 개들 위엔 또다른 개들이 있다는 사실이다.이 개집을 벗어나 봤자,다른 개집이 있다는 것.그것을 모른 척 한다는 것.어찌 보면 이중적인 지식인의 태도다.여기에서 전향한 과거의 386정치인들을 떠올린다면 오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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