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37.<무산일기>- 박정범
김정일이 사망했다.그의 사망에 대해 조의를 표할 기분은 들지 않는다.그래야 할 이유도 잘 생각나지 않는다,그렇다고 김정일의 죽음을 기뻐하거나 불안해 할 이유도 없다.사실 조의를 표해야 할 사람들은 정말 따로 있는데,김정일 같은 사람의 죽음에 대한 조의는 당연히 외교적인 레벨.그리고 정치적인 레벨에서 기능해야 하므로,싫어도 조의를 얘기해야 할 사람,속으론 좋으면서도 아쉬움을 나타내야 할 사람들이 따로 있는 것이다.적어도 한 나라의 평화와 앞날을 위해서 움직여야 할 사람들은 그런 식의 움직임이 자동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그래야 그런 사람들의 월급을 세금으로 지불하고 있는 시민들이 자신의 부를 그냥 속절없이 빼앗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게 되는 것이다.물론 현 정부에 그런 반응을 기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그들에 대해서는 어서 빨리 지나가 주기만 바랄 뿐이다.그리고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았다.
지금의 북한은 이미 왕조국가다.사회주의 국가라고 볼 수 없다.김정일의 죽음은 왕의 죽음과 비슷하다.그리고 그 왕은 살아생전 반대 세력의 씨를 말려버렸다.조직적인 저항이 일어날리 만무하고 민중들의 봉기에 의해서 체제가 변화할 가능성도 없으며 사실 그런 상황을 기대하는 사람들 - 현정부는 지난 4년 동안 늘 그래왔다- 의 머릿속이 '원망적 사고 (wishful thinking)'로 가득 차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오매불망 북한의 자연스런 붕괴를 바라는 세력들도 막상 왕이 죽고 나자,자신들의 그런 소망을 공공연하게 얘기하지 않는다.말하면 바보가 될 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북쪽의 옛 신하들은 황태자를 중심으로 모일 것이며,왕조적 체제의 유지가 자신이 대표하는 세력에 절대적인 손해를 끼치지 않는다면,이 왕조를 유지시키는 쪽에 자신의 지분을 행사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만 얘기하고 있자니 북한이 머나먼 외국이 되어버린 느낌도 들고,평화를 위한 골치아픈 이웃 관리 차원에서 이런 논의들이 진행되고 있다는 이상한 종류의 회한어린 심정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그러니까 이제 '민족'이란 개념은 우리로부터 멀리 가 버렸다.또는 남한에서 얘기하는 민족이란 남한 사람들만을 가리키는 어떤 표지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우리가 원하는 평화란 이제 본질적으로 우리가 현재 유지하는 삶의 지속성을 지키기 위해서 추구되는 수단적인 개념이 되었다는 확실한 변화를 지켜보게 되며 가슴 한 언저리가 아파 오는 기분도 든다.그런 변화를 타고 북한과 남한의 지배계층들은 남북관계에 있어서,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는 방편을,-보수적인 의미에서도 또 진보적인 의미에서도-,이미 확보해버렸다.세월이 꽤 많이 흘러가 버린 것이다.특히 지난 4년을 통해 지배계층이 아닌 남쪽과 북쪽의 사람들은 많은 기회를 놓쳐버렸다.
그러나 북한의 상부구조나 우리의 지배계층과는 다른,실제의 삶을 살아가는,과거에 우리가 기층민중들이라고 불렀던 사람들의 삶은 여전히 흘러간다.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만나고 부딪칠 수 밖에 없고,그렇게 되면 책이나 이론에 써 있고 주장되는 것과는 다른 드라마들이 쓰여지게 된다.
가령 21세기 한국영화들에 있어서,주로 젊은 감독들이 새로운 소재처럼 다루는 탈북자들,혹은 새터민들에 대한 얘기들이 그렇다.그들은 김정일이 죽어있든 살아있든,할아버지를 닮은 그의 아들 김정은이 대를 잇든 말든,탈북자들은 우리 곁에 존재하며,앞으로도 계속 우리 근처에서 맴돌며 새로운 이슈를 만들게 될 수 밖에 없다.장훈의 <의형제>나 <풍산개>같은 영화들은 북한 체제로부터 튕겨 나온 사람들을 주요 캐릭터로 사용하고 있고,어제까지 내가 쓰고 있던 전규환의 <댄스 타운>역시 탈북 여성이 주인공이다.즉 김정일이 죽었든 살아있든 어떤 북한 사람들은 우리네 삶의 상수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따라서 그들이 영화적 소재가 되는 것은 어찌 보면 매우 당연한 현상이다.
그리고 그 정점에 있는 2011년의 그야말로 빛나는 우리 영화가 바로 박정범 감독의 <무산일기>이다.탈북해서 대한민국에서 살게 된 청년 전승철의 고단한 한국살이를,처절할 정도로 객관적으로 다루면서도,또 그의인생을 보며 관객으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게 만드는 힘을 가진 영화가 바로 이 영화 <무산일기>이다.
이 스산하면서도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탈북 청년 전승철의 삶을 읽는 독법은 단 한 가지가 아니다.그것은 어쩌면 이 영화가 지닌 특유의 힘에 의해서 그렇게 되는데,내가 몇 년 전부터 주구장창하는 소리이긴 하지만,진짜로 좋은 영화들은 여러 경로의 접근법에 의해서도 거의 유사한 강도의 파괴력을 지니는 법이다.
이 영화에 대한 독법들을 그냥 거칠게 두 가지로 나눠보면,첫번째는 전승철의 고단한 일기들을 차분하게 따라가며 - 실제로 이 영화의 카메라들은 놀라울 정도의 거리감을 피사체로부터 유지하고 있다.거의 정갈하다 싶을 정도의 거리감을 가지고 인물들과 배경들을 관찰하고 전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삶을 일종의 휴먼드라마 식으로 받아들이면서,오히려 배경이 되는 우리 사회의 비정하고 본질적인 속성들과,글자 그대로의 무산 계급으로 떨어진 탈북자와,또 당연히 생기게 되는 탈북자들 사이의 문제들을 바라보는 방식이다.이렇게 되면 이 영화의 감독 박정범은 약간 사회파 감독으로 자리매김 되게 되는 것인데,이런 식의 독법이 가능해지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 계급간의 소외와 격차가 좁혀지기 어려울 정도로 멀어지고 넓어졌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두번째 독법은,역시 전승철의 삶을 쫓아가면서,그의 내면의 변화들을 바라보는 방법이다.사실 이 영화 마지막 10분 동안의 반전은 이런 식의 독법의 정당성을 입증하고도 남는다.사회주의 국가 출신의,순수한 청년이 냉정하게 작동되는 자본주의적 사회와 그 사회 속의 삶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추적하는 것은 사회학적인 의미와 아울러서,자본주의의 사회주의에 대한 승리와 몰락을 다같이 반영할 수 있는 중요한 지표로서 기능할 수 있다.
나로서는 아무래도 두번째 방법을 택해야 할 것 같다.특별한 이유는 없다.그런 방식이 내 개성에 맞을 뿐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청테이프를 어깨에 건 승철이 포스터를 붙이고 있다.바가지 머리에 촌스런 잠바를 입고 둥그렇고 큰 눈을 포스터에 집중하며 자신의 알바 일을 하고 있다.물론 그런 알바 조차도 쉽지 않다.포스터를 붙일 수 있는 벽 공간이 한정적이기 때문에,그 벽들을 관리하는 동네 건달들이 나타나 그를 때리고 학대하기 때문이다.집에 돌아온 그는 화장실에서 피가 묻은 옷을 빨래하는데,그와 같이 사는 탈북 브로커 친구가 부른 여성이,그가 화장실에 있든 없든 전혀 괘념치 않고 변기에 올라 앉아 소변을 본다.여인은 승철을 거의 유령처럼 대하는데,그것은 승철의 경제적 상황과 연관이 있다.남한의 어느 구석에선 돈이 없으면 유령이 되는 것이다.
그런 그가 유일하게 기대는 곳은 기독교 신앙과 교회이다.그는 자신의 골방에 틀어박혀 복음성가를 듣고,교회에 나가 그가 속으로 마음에 두고 있는 숙영을 바라보는 것이 낙이다.그가 청테이프로 포스터를 붙이다 말고 양복점을 바라보는 것도,좀 좋은 옷을 입고 교회에 가 봤으면 좋겠다는 순진하고 순수한 소망 때문이지,다른 의도는 전혀 없었다.(그러나 영화 말미에 양복은 완전히 다른 의미로 바뀌어 버린다)
포스터 알바 일 대신 정식 일자리를 찾는 것도 힘이 든다.그의 뒤를 보아주는 나이든 형사 - 형사 역은 감독 박정범의 아버지가 연기하고 있는데,그는 거의 프로페셔널한 연기를 보여준다 - 가 소개한 봉제공장에서도 그가 북한 출신이라는 단 하나의 사실 때문에 일할 수 없게 된다.승철은 그냥 '잘 할 수 있습니다'란 말만을 반복하지만 남한은 그에게 잘 할 수 있는 기회 조차 주지 않는다.
그런데 변수들이 발생한다.그가 짝사랑하는 숙영을 거리에서 우연히 발견한 승철은 그녀를 따라가다가,그녀와 그녀 아버지가 도우미들을 고용한 노래방을 운영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그곳에 알바로 취직하게 되는 것이 변수의 시작이다.그러나 그곳 또한 남한 사회의 한 축도이다.승철은 여성 도우미를 집요하게 성추행하는 남자 손님에게 항의하다가 얻어맞고 말썽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그러나 숙영이 야단치는 것은 오히려 승철이고,나중에 승철과 같은 교회에 다닌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노래방을 운영한다는 사실은 비밀로 해야 하고,교회에서도 서로 아는 척 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우리나라 교회 신도들의 일반적 성향을 고려해본다면,어찌 보면 당연한 소리이기도 하지만,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일을 했고 교회라는 조직에 대해 원론적인 의미에서의 개념만을 가지고 있는 승철에겐 의혹과 모순의 감정으로 이끌릴 수 있게 되는 에피소드이기도 하다.
그러나 승철은 어디까지나 무감각하고 무표정한 얼굴로만 반응한다.숙영에게 그가 탈북자 출신이라는 것도 말하지 않는다.이것은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의 빈곤한 상황과 고난에 찬 경험,그리고 열등감으로부터 비롯되는 자기 방어 행동이다.그런 그가 유일하게 마음을 붙이는 상대는 함께 사는 탈북자 브로커 친구가 아니라,거리에서 우연히 발견한 강아지이다.(박정범은 이 강아지를 모란 공원에서 3만원에 구입했다고 한다) 그는 강아지를 끔찍하게 아끼는데 점점 이 강아지는 이 영화에서 승철의 영화적인 등가물로 변해 간다.그와 강아지가 산책하는 곳은 아마도 뉴타운 사업 때문에 철거되거나 철거될 빈집들이 넘치는 황무지이지만 ,강아지를 제외하면 그에게 진짜 사랑을 베푸는 생물은 거의 없는 것 같다.
다시 또 하나의 결정적 변수.노래방에 출근한 승철은 도우미 여성들과 친해지고,도우미들은 승철에게 노래를 가르쳐주려 한다.그러나 승철이 아는 노래들은 찬송가 이외엔 없고,승철은 그녀들과 노래방 기계 반주에 맞춰 찬송가를 부르다가 숙영에게 들켜서 혼이 나게 된다.표면적으로는 카운터를 비웠단 이유이지만,숙영을 진짜 화나게 했던 것은 '천한 도우미들과 감히 '찬송가'를 불렀다'는 승철의 생각없는 행동 때문이다.
아는 노래가 찬송가 밖에 없다는 승철의 대답에, 숙영은 '승철씨 진짜 나쁜 사람이에요.왜 거짓말까지 하는 거에요'라고 말하며 승철을 해고한다.숙영과 찬송가,순수한 끌림과 기독교 교회와 그 성도들이라는 자신이 가장 의지하는 기본 개념이 흔들리게 되는 상황이 오고 만 것이다.배운 대로 행동해서는 안된다는 것,들은 대로 살아서는 안된다는 남한 사회의 삶의 원리를 승철은 직감적으로 터득한다.
다음 날 포스터 붙이는 알바에서 조차 해고당하자,그는 이제 본격적으로 변하기 시작한다.그는 갑자기 자신이 포스터를 붙이는 것을 방해했던 패거리들의 포스터를 다 찢어버리고,그들이 자신을 쫓아오자 오히려 돌을 들고 그들에게 저항한다.반전이다.폭력성이라고는 전혀 내비치지 않았던 승철이 변화하는 것이다.형사에게 이끌려 나갔던 교회의 성경 모임에서 자신을 소개하라는 요구를 듣게 되자,그는 드디어 자신이 탈북자라는 사실을 밝히고,자신이 북한에서 굶주림 때문에,옥수수 한 자루 때문에 친구를 죽였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그러나 이 고백은 가슴 아프게 그려지지 않는다.승철의 말투는 의외로 담담하다.살인의 경험을 고백하면서도 그의 말투에 반성이나 회한이 어리지도 않는다.오히려 그의 분위기는 위악적이다.일정 부분 당당하기까지 하다.그런 말을 뭐하러 하느냐는 형사의 가벼운 질책에도 그는 별로 변명하지 않는다.그러나 숙영을 포함한 교회 사람들은 탈북과 살인을 고백한 그를 교회의 일원,그리고 친구로 받아들인다.숙영 역시 승철에게 사과한다.그러나 승철의 드라이브는 여기서 봉합되지 않는다.또한 그의 삶 자체가 변하는 것도 아니다.
한편 탈북자 브로커 친구 경철의 일은 점점 잘못되어가고,그에게 돈을 맡겼다 사기를 당했다고 생각하는 탈북자 패거리들이 그를 뒤쫓는다.그 와중에도 경철은 아직도 자본주의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승철을 구박하고 그의 개를 길에 버린다.(경철은 심지어 개를 동물병원에 데리고 가 팔아버리려고까지 하지만 실패한다).승철은 개를 찾아나서고 길거리에서 쓰레기 봉투를 뒤지는 개를 발견한다.그는 개를 철거 직전의 빈 집에 숨기고 거기서 함께 잔다.
(그들에게 빛과 안식을 줄 수 있는 곳은 저 가로등 밑 공간 밖에 없는 것 같다.그러나 이 장면들은 우리 사회의 묘한 축도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경철은 결국 도피하려 한다.(그는 입버릇처럼 미국으로 가고 싶다고 말한다.탈북자들의 로망일 수도 있겠지만,자본주의의 상징적 장소인 미국을 얘기하는 것 역시 매우 시사적이다) 그리고 승철에게 집 안에 숨겨둔 돈을 몰래 가지고 나와 버스 정류장에서 자신을 만나달라고 말한다.그리고 이 영화의 결정적 반전이 시작된다.
말할 것도 없이 승철이 경철을 배신하는 것이다.강아지를 안은 승철은 경철이 기다리고 있는 버스 정류장이 다가오자 몸을 숨기고 경철의 돈을 자신이 가져버린다.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은 완전히 변해버린 승철의 모습이다.무슨 자본주의적 총아로 변신했다는 것은 아니다.그러나 그는 언제나 지저분하게 기르고 다니던 자신의 바가지 머리를 정리하고,언제나 사고 싶었던 양복을 산다.그리고 교회엘 온다.표정도 바뀌었다.언제나 안쓰럽게 보이던 물기 어린 눈동자 따위는 그의 얼굴에서 찾아볼 수 없다.숙영에 대한 태도도 달라졌다.숙영의 다정한 태도에도 그는 어딘가 냉정해진,그러나 어딘가 당당해져버린 표정이다.그리고 그는 다시 숙영의 노래방에서 일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아직도 강아지는 그와 함께이다.강아지의 존재는 과거 승철의 정체성,그의 가장 인간적이었던 시간들,동질감과 동지감,유대감과 부드러움,다른 존재에 대한 애정과 연민을 상징한다.하지만,아마도 담배인지 맥주인지 심부름을 다녀오던 어느 순간,그는 강아지가 차에 치여 죽은 것을 목격한다.그때 카메라는 갑자기 뒤로 물러나 승철의 반응만을 살피기 시작한다.자신의 분신 같은 강아지가 죽었건만,그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개는 길 한복판에 쓰러져 있고 죽은 것이 분명하지만,승철은 아예 가까이 가지도 않는다.그는 결국 강아지를 무시해버린다.자신과는 이제 관계가 없다는 것,죽은 강아지는 이제 과거의 존재라는 것,자신은 이제 이 밤거리에 완전히 적응했으며,변해버렸다는 사실을 그는 분명히 한다.
거의 익스트림 롱 테이크라고나 해야 할 만큼 긴 이 장면은 관객들의 마음과 육체를 거의 얼려버린다.(나는 이 마지막 장면을 거의 충격이라고 느꼈다).승철의 극적인 변화 만큼이나,영화 속 과거 - 영화에선 고작 한 시간 정도가 아닌가-에서 그가 보여주었던 순수성과 순정이 고결하게 느껴졌던 탓이다.끝장난 고결함.,그리고 자본에 굴복한 인간의 모습..그야말로 먹먹하다.
여기서 다시,아까 제시했던 두 가지 독법으로 돌아가자.이 영화는 우리가 살아가는 우리 도시를 보여주려 했던 것인가,아니면 인간의 변화를 보여주려 했던 것인가.물론 정확히 말하자면 이 영화는 그 두 가지 다를 보여준다.어느 쪽에 특정하게 치우쳤다고 볼 수 없다.
다만 거기서 연유한 하나의 질문.인간의 근본적인 순수함은 그를 둘러싼 세계 속에서 완전히 변질되는 것인가,아니면 언젠가 또다시 살아나는 것인가.변질 쪽에 손을 올린다면 인간을 완전히 변질시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체제,자본의 탓인가,아니면 인간 특유의 특수한 욕망과 이기심 때문인가.만약 자본이 인간 자체의 고결함을 파괴하려는 기본적인 동력과 습성을 지니고 있다면,우리는 그것에 어떻게 저항해야 하는 것인가.또한 개인적인 저항만 가지고서 이 복잡다단하고 모두 다 얽혀 있는 세상에 대항할 수는 있는 것인가.하나의 질문은 또 하나의 질문을,그리고 연이어 나타나는 수많은 질문들을 유도한다.
좋은 영화란,내가 생각하는 좋은 영화란 바로 이런 것이다.수많은 질문들을 야기하고,또 수많은 대답들을 통해 결국은 이상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영화.
그런 의미에서 <무산일기>,정말로 좋은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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