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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영화들 10.빛나는 우리 영화들2.-전규환의 타운 3부작 <애니멀 타운>

신의 영화들/FILM FLOATING

by 폴사이먼 2011. 12. 16.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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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회,한 도시의 비전형적인 부분,그리고 거의 완벽하게 비일상적인 부분,그러면서도 그 도시에 위험을 야기할 수 있는 인자들,또 우리 발밑을 떠도는 깊고 보이지 않는 맨홀 처럼 존재하는 어떤 요소들.

 

전규환의 <타운 3부작>의 두번째 영화 <애니멀 타운>은 우리 타운의 바로 이런 부분들을 탐색해 들어간다.도스토예프스키의 말처럼 어떤 구성체의 가장 비전형적인 것이야말로 가장 깊숙한 진리들을 반영하는 법.이런 탐색들은 반드시 어떤 결론을 도출해낸다.꼭 그런 의미가 아니더라도,전규환의 두번째 시도의 이런 측면은 범상치 않은 울림을 갖는다.우선 그는 우리들의 도시를 짐승들의 도시로 명명해버린 것이다.

 

2011-35 애니멀 타운 -전규환 2009

 

첫번째 작품 <모차르트 타운>이 여러 명의 캐릭터들을 등장시켜서 그들을 잇고 맺으며 도시를 구성하는 본질의 일부분을 캐고 들었다면,전규환의 두번째 작품 <애니멀 타운>에서는 단 두 사람의 남자들만이 주요인물로 등장하며,그들의 일상을 영화 내내 끈질기게 추적하다가 결국 최종적인 폭발지점에 이르게 하는 영화적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이러한, 이야기와 캐릭터의 집중화가 꼭 어떤 고의적인 의도에서 비롯된 것 같지는 않지만,고립된 섬처럼 위태롭게 살아가는 두 남자의 이야기에서는  전작 <모차르트 타운>에서 보여졌던 일말의 서정성 마저 사라져 있고,두 남자의 삶이 순간을  완벽한 벼랑 끝으로 몰고 나가고 만다.그렇지 않은가,삭막한 두 남자의 이야기가 어디로 가겠는가.그리고 그 이야기가 결국 벼랑 끝으로 향하고 있다면 우리들의 도시 역시, 전규환의 시각에서는 벼랑 끝에 놓여있는 것이나 진배없는 것이다.

 

 

이 두 남자의 이야기는 함께 어울리며 진행되지 않는다.영화 초반부에서 중반부까지 두 남자는 거의 만나지 않으며,이야기는 각각 따로 그리고 매우 건조하게 진행된다.그래서 관객은 두 사람의 이야기를 따로따로 쫓아가야만 한다.

 

첫번째 남자.오성철 (이준혁 역) .관객들은 어느 순간 그의 발목에 채워진 전자발찌를 목격함으로써 그가 성범죄의 이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된다.그러나 이제 전과자가 되어 권력으로부터 생체감시를 받고 있는 그는,적어도 겉으로 볼 때는 무척 온순하고 소극적인 사람처럼 그려진다.조용하고 우울해 보이기만 한다.그는 공사장에서 육체노동을 하지만 임금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철거 직전의 아파트에 살고 있지만 돈이 없어서 다른 곳으로 이사갈 엄두를 내지 못한다.수도와 난방 역시 끊어졌고, 인근 학교의 수돗물을 페트병에 받아다 쓰고 있다.

 

그러나 밀린 임금의 절반을 받아든 어느 날,성매매 여성을 그가 집안에 불러들였을 때 ( 이 씬은 성기 노출 때문에 화제가 되었지만,여기에서의 성기 노출은 어쩔 수 없는 영화적 필요에 의한 것이었다고 판단된다),그가 행하는  여성과의 섹스 형태를 보며, 적어도 예민한 관객들이라면 그의 문제를 눈치채게 된다.섹스 파트너에게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안간힘,그 여성의 입을 억지로 막으면서까지 자신이 원하는 방향의 성관계로 몰고 가려는 조바심 따위는,그의 양말 속에 숨겨진 전자 발찌의 존재와 더불어,그의 성범죄 이력이 성범죄 중에서도 가장 범상하지 않은 종류의 것이라는 사실을 직감하게 되는 것이다.어떻게든 자신의 사회적 성적 열패감을 막으려는 열망,  그는 아동 기호의 유아 성범죄자였다.

 

두번째 남자.김형도(오성태 역.맞다 모차르트 타운의 사채업자 그 오성태다).처음에 그는 그냥 전형적인 보통 가장으로 보인다.지나치게 표정이 없는 것이 이상스럽게 느껴지긴 하지만,가족들과의 일상,아이의 운동화를 사오라는 아내의 이야기 (모차르트 타운의 주유랑이 그의 아내로 나온다.) ,인쇄소로 향하는 그의 오토바이.영화는 그의 일상을 아주 담담하고 재미없게 그려간다.그는 작은 인쇄소를 운영하며 열심히 일하는 평범한 사람처럼 보인다.

 

 

다만 그의 표정이 지나치게 무감 (apathic)하게 보인다.경찰이 찾아와서 그가 예전에 도난당했던 오토바이 얘기를 꺼냈을 때,그리고  오토바이를 훔쳐 갔던 소년이 교통사고로 사망했고, 도난 당했던 그의 오토바이에도 책임이 있다고 말할 때도 그는 별로 억울해하지 않는다.특별한 감정을 드러내지도 않는다.그냥 죽은 애가 몇 살이냐,죽은 애 부모는 뭐라 하더냐고 물을 뿐이다.여전히 심심하다.

 

다시 영화는 첫번째 남자 오성철로 돌아간다.그는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 진료를 받고 약을 처방받아야 하며 (물론 감시의 일환이다),여전히 건설현장의 임금을 받지 못하고,집을 비우라는 독촉을 받고,형사들에게 집안 수색을 당한다.형사들은 난방이 불가능한 그의 사정은 아랑곳 않고 왜 난방을 하지 않느냐는 핀잔만 건넨다.오랜만에 만난 누나는 그에게 방한복과 용돈을 건네지만 집으로 전화하거나 찾아오지는 말라고 한다.그에 대해 오성철은 거의 반응이 없다.오성철은 여전히 소심하고 위축되어 있다. 다만 하나의 변화가 오성철이 우연히 폐지를 줍고 있는 여자 아이를 보았을 때 발생한다 .그는 아이를 본 후 그 아이를 뒤쫓는 듯한 자세를 취한다.그의 아동성범죄자 이력을 알고 있는 관객은 당연히 긴장한다.(그가 영화 중반부, 한밤중에 택시를 몰다가  사이드 미러를 통해 걸어오는 여학생을 쳐다보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다.그러나 그는  성범죄를 시도하지 않는다.예측과는 다른 그의 행동에 관객이 묘한 가책과 동정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두번째 남자 김형도가 오성철을 처음 보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순간이다.그는 교회 주보 배달을 하고 있는 중이었는데,폐지를 줍고 있는 여자아이를 유심히 바라보는 오성철의 뒤를 미행하기 시작한다.그리고 오성철의 집을 확인한다.(당연히 이때 관객은 이 영화의 숨겨진 진실을 모른다) .그리고 김형도에게도 약간의 변화가 찾아온다.그는 갑자기 담배를 사서 피운 다음에 (오랫동안 담배를 피우지 않았던 듯 담배연기를 빨아들인 그는 연신 콜록거린다) 도시의 거리를 걷기 시작하는데,이때 갑작스레 영화의 속도감이 미세하게 줄어들고,그의 걸음 마저 약간 느려지고 거리 풍경은 비현실적으로 향한다.물론 이 변화는 매우 미세하다.

 

그러나 김형도 삶의 어떤 기조가 흔들린 것만은 분명하다.교회에서, 그는 자신의 딸이 서울대학교에 합격했다는 장로를 만나고 그가 선물로 준 생선을 받게 되지만,도중에 땅바닥에 다 내버린다.치킨 집에 전단지 배달을 갔을 때는 치킨집 여자 - 모차르트 타운의 단란주점 마담 문형주가 이 배역을 맡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 의 드러난 가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치킨 집을 나와  마사지 업소에 가서 성을 산다.

 

(저 노골적인 눈빛은 영화 전반부의 무뚝뚝하지만 착한 가장과는 거의 어울리지 않는다)

 

물론 그의 변화가 영화적인 것만은 분명하다.그리고 그 변화는 그의 영화적 카운터 파트 오성철로 인한 것이다.뭐,리뷰를 쓰면서 조차 굳이 그 이유를 숨길 이유는 없다.과거의 성범죄자 오성철은 김형도의 딸을 유린했던 것이다.말하자면 오성철은 김형도의 원수 같은 존재다.가까스로 평정심을 유지하며 생활하는 듯 보이던 김형도는 우연히 오성철을 목격하고 삶에 균열이 생겨버린 것이다.그러나 영화는 그런 얘기를 미주알 고주알 관객에게 털어놓지 않는다.그냥 전진할 뿐이다.그리고 그런 태도로부터 이상한 에너지,거의 원초적이라고까지 할 정도의 에너지가 생긴다.

 

영화의 이러한 책략,모르는 척 하려는 계략,그럼에도 관객으로 하여금 점점 영화의 서사에 빠지게 하는 에너지를 우리는,또 이 리뷰는 어쩔 수 없이 용인해야 한다. 전혀 다른 두 남자의 이야기는 이렇게 한 점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것이고,종내에는 또다시 제각기 자신의 운명을 향하여 나아가게 된다.아주 기발한 전략은 아니지만,여기엔 이상한 힘이 있고,그 힘은 이들이 살아가는 도시의 본질로부터 우러나온다.

 

다시 첫번째 남자 오성철.그에게도 변수가 찾아온다.택시 운전을 하게 된 그에게 진상 손님이 찾아든다.택시운전 초보라 길을 잘못 든 그에게 여자 승객이 시비를 건다.길을 잘못 들어서 약속에 늦었단 이유다.아마도 화류계에 몸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여자는 거칠게 오성철을 몰아붙인다.그러나 두 사람 사이의 핀트는 시작부터 어긋나 있다.그녀가 오성철에게 강조하는 것은 택시비 '따위'가 아니라 자신의 잃어버린 시간이지만,오성철이 약속할 수 있는 것은 금전적 변상 뿐이다.

 

여자 손님은 자신의 가치가 돈 보다는 시간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고,그럼으로써 오성철에게 자신의 계급적 우위를 나타내려 하는 것이지만, 오성철은 그 사실을 전혀 모른다.여자 손님의 욕설과 폭력이 점점 심해지고 그것이 임계점에 다다랐을 때,오성철의 폭력 역시 분출된다.오성철은 손님에게 잔혹한 폭행을 가한 후 그녀의 하의를 벗겨버린 채 길바닥에 내다버린다.(이 씬은 성폭력 이상의 충격으로 관객에게 다가오고 영화의 관객은 오성철의 폭력을 야기한 여성 승객의 지나친 언어폭력과 인간적 무시를 감안한다 할지라도 오성철의 갑작스런 폭력을 용인하기 어려워진다.)

 

그러나 오성철에게 이 폭행사건은 결정적이다.그가 오랜 동안 눌러왔던 여성에 대한 자신의 폭력성,언제나 자신의 죄값과 자책감을 씻으려 행하던 페트병 목욕으로서도 갚을 수 없는 폭력이라는 사실을 그는 알게 된다. 자신의 정체를 또 한 번 인지하게 되는 것이다.그는 피범벅이 되어 폭행 장소를 떠나고,그가 찾아가는  곳은 자신에게 페트병 세례를 베푸는 수돗물이 나오는 학교이다.

 

 

 

그러나 거기서 그는 또다시 어린 아이 하나를 발견하고 아이를 쫓아가려는 듯한 제스처를 취한다.그러나 그의 행동을 의심하며 쫓아온 학교 수위는 그가 학교 담장 안쪽에 소변을 보는 모습을 볼 뿐이다.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는 변명과 함께 말이다.(물론 그의 소변 보기를 성적 욕구의 대리 배설이라고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다) 관객은 그의 급작스런 폭력성 발현과 아동 성추행을 연결시킬 수 밖에 없지만,그는 결정적인 죄악을 저지르지는 않는다.( 그가 자신의 불법적이고 비도덕적인 성적 성향에서 자유로워졌거나 참아낼 수 있는 능력이 생겼을 가능성도 있다.그러나 오성철은 자신이 씻을 수 없는 도발을 저질렀다는 것,택시의 여자 승객을 심하게 폭행했다는 것,그래서 스스로의 폭력적 성향에서 만큼은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때 두번째 남자 김형도는 성경책을 부여안고 울고 있다.그는 자신의 성적 타락을 반성하는 것인가,아니면 오성철의 정체를 알고서 그에게 복수하고자 하는 마음가짐에 대한 반성을 시도하는 것인가.그러나 그는 이미 칼을 품고 다닌다.

 

첫번째 남자 오성철이 폭행의 현장에서 벗어나 만나게 되는 것은 또다시 폐지 줍는 소녀다.그가 소녀에게 다가갈 때,이제는 묵과할 수 없다는 듯,미행하던 김형도가 다가와 오성철의 택시의 승객을 자처한다.드디어 그들이 한 공간 한 프레임에 위치하게 된 것이다.

 

 

 

택시에서 내리고 난 후 다시 미행이 시작되고 ,이제 오성철은 인적 드문 폐가에서 자살을 시도한다.그는 긴 끈을 이용하여 자신의 목을 매단다.김형도는 그 광경을 잠자코 관찰만 하더니,이내 오성철에게 다가가서 그의 목을 조르기 시작한다.그는 '이렇게 죽으면 마음이 편할 것 같으냐,이 짐승 같은 새끼야'를 외치며 오성철의 목을 조르다가,오성철을 죽이려고 품고 다니던 칼로 오성철이 목을 매단 밧줄을 절단해 버린다.어떤 의미에서 김형도는 오성철의 목숨을 구한 것이다.(오성철은 이때 바지에 오줌을 싼다)

 

그러나 이 장면은 대단히 이상하다.마치 복수심을 품고서 오성철을 미행하는 것 같던 김형도,더구나 폐지 줍는 아이에게 다가가는 오성철을 발견하고 아이를 구하겠다는 시도처럼 오성철을 불러서 택시를 탔던 김형도는 왜 갑자기 이렇게 변해버리고 마는 걸까?

 

오성철 스스로의 자살 가지고서는 복수가 완성되지 않는다는 뜻일까? 죽지 않고 살아서 현재의 고통을 더 경험해야 마땅하다는 김형도의 자각 때문일까? 물론 이런 해석도 가능하다.그러나 이 해석은 좀 평범하고 어찌 보면 영화적이지 않다.영화엔 영화 언어가 있으며 그것을 통해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김형도의 의중을 정확하게 평가하기 전에 우리는 오성철의 다음 장면들을 더 살펴보아야 한다.

 

절망에 빠져서 택시를 몰고 가던 오성철은 대로변에서 갑자기 뛰어든 멧돼지와 충돌하고 차창 밖으로 튕겨 나가 사망한다.(멧돼지는 영화 안에서 무슨 만병통치약처럼 나타난 존재가 아니다.영화 내내 뉴스의 내레이션 등을 통해서 영화는 도심에 나타난 멧돼지의 이미지를 반복하고 있다) 오성철과 멧돼지는 둘 다 죽어서 널브러진다.

 

 

 

이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그런데 두 애니멀의 시신이 저렇게 누워 있는데도 불구하고 옆 차선의 차들은 거의 아무런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그들은 가던 길을 계속 갈 뿐이다.다시 말해 차들은 멧돼지와 오성철에 대해서 전혀 동류의식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또 다시 말하자면 오성철 역시 멧돼지로 보는 것이다.분명히 위험하지만 대피나 피난의 위험을 느끼지는 않는다는 것,해를 끼칠 가능성도 있지만 아직 완전한 격리의 필요성은 갖지 않는 어떤 상징.,전자 발찌를 차고 있으면서 하부 권력의 끊임없는 감시를 받고 있는 생물들,가리워진 위험성이라고나 해야 할 것 같은 이 도시의 음습한 어떤 부분.바로 이것이 멧돼지이다.그리고 오성철이야말로 멧돼지인 것이다.

 

그러나 왜 이 영화는 멧돼지끼리의 충돌에 의해서 그들의 사망을 불러오는 것일까? 진짜 멧돼지였다면 경찰이나 소방대원의 마취탄이나 실탄에 맞게 되지 않았을까? 그리고 왜 하필 저 멧돼지는 오성철의 차에 충돌하고 만 것일까? (물론 이것은 완전한 우연에 의해서도 설명될 수 있다.우연 역시 이 도시의 진짜 위험을 설명할 수 있는 강력한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오성철 뿐만 아니라 김형도 역시 멧돼지 일족의 일원이라고 생각한다.그리고 저 멧돼지는 김형도의 대용이자 상징일 수도 있다고 주장하겠다.우리가 다시 김형도를 생각해보면,오성철 처럼 드러난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 뿐이지,그의 존재 역시 어두운 위험성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착실한 교회의 집사이자 평범한 생활인 그리고 성실한 직장인인 그는 오성철을 보자 마자 정신없는 변신을 겪는다.안 피우던 담배를 피우고 성경을 집어던지고 주머니 속에 칼을 넣어가지고 다닌다.김형도 역시 얼마든지 폭력화할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오성철이 집으로 성매매 여성을 불러들이는 것처럼 김형도도 성매매 업소를 찾아간다.누군가의 생계를 걱정하는 척 하면서도 또 누군가를 해고시키기도 한다.전과와 실제적인 폭력의 경험을 빼놓는다면,폭력의 잠재성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김형도와 오성철은 의외의 유사성을 가진다.

 

따라서 오성철은 김형도에 의해서 상징적인 죽음을 맞게 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인간 멧돼지끼리의 충돌이 상징화된 장면이 바로 저 장면인 것이다.

 

그러나 김형도는 또다른 의미에서 변화한다.관객은 영화 말미에 집으로 돌아온 그를 보게 된다.그의 아내는 김형도에게 딸이 아프다며 해열제를 달라고 하고는 딸의 방으로 들어간다.김형도가 아내의 뒤를 따라가 딸의 침대를 살필 때 딸은 침대에 없다.김형도는 방에서 나와 딸에게 주려던 해열제를 먹어버린다.사실 딸은 이미 죽은 것이다.김형도와 그의 아내는 딸의 죽음으로 인격과 정신이 일정 부분 파괴되었고,딸이 여전히 살아있다고 가정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혹은 김형도의 아내 역시 죽은 것일 수도 있다.(아내가 나오는 몇몇 장면에서 김형도는 전혀 아내를 마주 보지 않고,아내가 이미 죽어있는 쪽이 그의 고독과 잠재된 폭력성에 더 어울리는 설정일 것이다).

 

그러나 김형도는 해열제를 먹어버린다.(오성철이 죽기 전 그는 딸의 운동화를 사오기도 했다).딸이죽었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알아차린다.그의 자기 자신을 위한 방어기제인 환각이 벗겨져 버린 것이다.이제 그는 진짜 고통을 마주해야 하는 것이다.진실을 직시한다는 측면에서 이것은 그에게 구원일 수도 있지만,그의 뒷날을 우리는 모른다.김형도에게는, 여전히 멧돼지로서의 본성을 표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여전히 상존한다.

 

 

 

그렇게 영화는 끝난다.김형도의 공허한 시선이 마지막이다.그러나 이 영화를 대표하는 시선은 위의 스틸 사진에서 보이는 오성철의 시선이다.폐지 줍는 소녀를 바라보는 시선이다.그리고 전규환은 이 시선이야말로 우리들의 '애니멀 타운'을 대표하는 시선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내재한 폭력성과 가능한 잔학함,아무도 신경 써주지 않고 치유의 공간 조차 없는 애니멀적인 본성,시스템의 무능함..이런 얘기들을 그는 강력한 에너지와 함께 스크린 위에 늘어놓았다.

 

물론 여전히 대로로 뛰어들어서 오성철을 죽인 멧돼지의 문제는 논란이 되고 머릿속에 남을 것이다.애니멀은 그렇게 해서 소멸될 수 없다는 반론도 가능하다.그러나 오성철의 교통사고 장면 뒤에 붙여진 또 하나의 장면이 있다.그것은 폐지 줍는 소녀의 장면이다.어찌된 셈인지 소녀 역시 119구급대에 의해 앰블런스에 옮겨지고 있다.영화는 소녀의 사고에 대해 분명한 설명은 하지 않는다.그러나 우리는 적어도 소녀의 사고가 오성철의 사고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지는 않다고 유추할 수는 있다.하지만 분명히 소녀에게도 모종의 사고가 있었다.

 

그리고 아이의 작은 동생이 언제나 소녀가 끌고 다니던 트레이 앞에 앉아있는 장면이 이어진다.피해자 역시 대를 이어 이어진다는 것,언제나 피해를 당할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 만이 피해를 입는다는 것,그것이 우리의 타운의 또 하나의 속성이라는 것을 전규환은 마지막으로 덧붙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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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길게 썼지만,나는 이 영화에 대한 글은 어차피 길어질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극장에서는 내려졌고 이 영화를 볼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다는 이유에서도 그렇고,이 영화의 압축적인 에너지 때문에도 그렇다.더구나 아직도 못한 말들도 있다.<모차르트 타운>과 <애니멀 타운>에서의 소변 보는 장면의 문제,두 영화에서의 개신교회가 가지는 위상적 무능의 문제를 쓰지 못했다.교회의 문제는 <타운 3부작>의 세번째 영화인 <댄스 타운>에서도 또 등장하기 때문에 기회가 있을 수 있겠지만,소변은 여기서 끝날 것 같다.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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