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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sus-The biography- <마태복음>

신의 영화들

by 폴사이먼 2010. 7. 1.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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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생애를 제외시킨다면 기독교는 그 토대를 잃는다.기독교는 그들이 파악하고 상정해놓은 커다란 우주와 긴 역사의 한복판에,팔레스타인 출신의 설교자이자 예언자,부분적으로는 사회운동가이자 내면적으로는 종교적 열광자인 30대 초반의 청년인 예수를 위치시켜 놓았다.그리고 예수가 살았던 그 짧은 삶의 의미로부터 기독교의 모든 철학과 사유개념들의 기원을 찾았다.그 의미에 대해 정리를 시도하지 않는다면 이 글 역시 핵심을 잃고 시작하는 것과 진배없다.

 

그러나 예수의 삶은 너무나 짧은 데다가 기록된 사실들 역시 너무나 빈약하다.공인된 역사서에 쓰여진 그의 삶은 마치 신비주의를 일부러 계획하기라도 한 것처럼 베일에 쌓여 있다.아무리 2000년 전에 존재했던 사람에 대한 기록이라고 해도 훗날 서양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람의 공식적인 기록이라고 믿기에는 사료의 양이 아주 많이 부족하다.

 

이런 얘기들을 기독교의 타종교에 대한 우위성 -부족한 사료의 양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종교적인 성공을 이루어냈다는- 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좀 어리석은 논리다.많이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 비밀스런 신비스러움이 오히려 증폭되었고,예수의 생애를 전파하던 초기 전도자들의 예수에 대한 독보적인 권리가 더 강력하게 주장되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더구나 예수의 공적인 삶이 3년이라는 -타 종교의 시조들에 비해서는 엄청나게 짧은 - 기간 안에 이루어졌기 때문에,더더욱 그의 생애는 젊음이라는,젊은 희생제물이라는 안타까움 속에서 폭발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예수 삶의 중요성이나 예수가 남겼던 말들의 중요성이 사그라드는 것은 아니다.정치적이고 종교적인 필요성,또 예수 사후의 철학적 지형에 따라서 첨가되고 삭제되고 변형되었으며 심지어 왜곡의 가능성까지 제기되고 있지만,예수의 말들은 어쨌든 최소한의 뼈대를 유지하며 후세에 전승되고 있는 것이다.

 

예수의 어록들이 가지는 이런 종류의 가변성 -신약성경은 공인된 개개의 경전들끼리도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은 종교적 상상력 특유의 해석의 확장시키는 효과를 가져다 준다.과거에야 그런 상상력이 형장의 이슬이 되거나 종교적 이단자로 몰아붙임당해 소외되고 한데로 밀려났을지언정,생각의 자유가 신장되고 종교적 도그마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진 지금은 그 정도의 비극으로까지는 쉽게 발전하지 않는다.(물론 다른 종류의 희극이 준비되어 있다) 따라서 공식적인 예수의 기록들이 많이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이 예수에 대한 생각들의 넓이들을 오히려 다양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예수의 삶을 다룸에 있어서,너무 혁신적인 텍스트나 거의 기괴하다 싶을 정도의 색깔을 가진 영화로 그 시작점을 정할 수는 없다.물론 그 어떤 예술가가 예수의 삶을 다루더라도,그 예술가 자신의 관점이 투영될 수 밖에 없다는 사실 만큼은 확실하다.조지 부시의 하나님과 핍박받는 제3세계 식민지 민중의 하나님이 어찌 같을 수 있겠는가..그래서 완전히 객관적인 예수에 관한 텍스트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 상황에서 내가 나름대로 공정하게 예수의 삶을 다루었다고 선택한 첫 영화는 1964년 이탈리아의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가 감독한 <마태복음>이다.파졸리니는 알지만 영화 <마태복음>은 아직 보시지 못한 분은 어떤지 가벼운 비웃음의 미소를 입가에 머금으셨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파졸리니는 마르크시스트다.그리고 동성애자다.그리고 사는 동안 내내 파시즘에 대항했던 영화인이자 시인이었다.그가 파시즘을 심각하게 공격했던 어떤 영화들 -예를 들어 <살로,소돔의 120일>같은-은 기괴한 취향들과 인공적인 양식들,새도매저키스틱한 반사회적 표현방법들로 가득 차 있다.그런 사람의 텍스트를 예수 생애를 얘기하는 첫번째 작품으로 꼽아놓은 것은 어쩌면 실수일런지도 모른다.파졸리니의 사회적 정체성 때문에 흰 눈을 뜨고 바라볼 분도 있겠다.

 

그러나 파졸리니에게는 또다른 모습들이 있다.우선 그는 카톨릭 신앙의 일단을 소유했다.그리고 기독교적 성스러움에 대한 고결한 인식을 끝까지 지니고 있었다.더구나 그의 영화 <마태복음>은 기존의 그의 영화들과는 조금 다른 면모를 가지고 있다.

 

우선 <마태복음>은 거의 철저하게 성경의 원전 '마태복음'에 충실하고 있다.이 영화에서 예수나 그의 제자들이 던지는 대사들은 성경에 쓰여진 문장과 말에서 거의 한 치도 어긋나지 않는다.게다가  파졸리니는 에수를 비롯한 이 영화 출연자들의 캐릭터 설정에 대해서도 인공적인 수정이나 현대적 해석을 가미하지 않았다.성경의 줄거리들을 마태복음 순서 그대로 따라가고 있고,시간의 뒤섞기나 영화적 기교로서 변형을 가하고 있지도 않다.영화는 거의 다큐멘터리의 양식을 유지하는 듯도 보이고 카메라는 리얼리즘의 구조 안에서 기능한다.이것은 거의 이 영화의 미덕이라고까지 해야 할 부분이다.

 

물론 파졸리니 역시 마태복음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들을 다 영화화하지는 않았다.버릴 건 버리고 취할 건 취했다.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그가 생각한 예수의 이미지를 스크린 위로 재현했다.마치 마태복음의 편저자들이 예수의 전승된 어록과 행적들을 취사선택했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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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시작되고 첫번째로 등장하는 사람은 물론 성모 마리아이다.마리아는 이미 예수를 임신하고 있다.그녀는 팔레스타인의 빈민답지 않게 맑고 까만 눈동자와 단정한 옷차림으로 자신의 신랑 요셉을 기다리고 있다.

 

 

단아한 모습으로 집 앞에 서 있는 예수 어머니의 모습은 유럽의 성화들을 일정부분 연상시킨다.반면 임신한 마리아의 모습에 경악한 요셉의 얼굴은 초췌함과 근심으로 가득해진다.이미 임신한 아내를 그는 맞이해야 하는 것이다.그런데 이 상황에서 파졸리니는 완전한 리얼리티로부터 약간 이탈하는 듯 보인다.마리아의 임신사실을 알고 괴로워하는 요셉에게 천사가 나타나는 것이다.천사는 양성적 속성을 다 가지고 있는 듯 보이는 마스크의 소년 또는 소녀로 요셉에게 마리아와의 결혼을 명령한다.

 

 

 

파졸리니는 이로써 동정녀 임신과 천사의 존재를 다같이 인정한다.이런 영화를 정통 마르크스주의자가 만든 영화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파졸리니가 전형적인 마르크스 레닌 주의자였다고 얘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어서 동방의 세 박사가 예물을 가지고 예수를 경배하러 팔레스타인을 찾아오는 장면이 등장할 때 쯤이면,우리는 파졸리니가 예수의 실존 여부와 같은 신학적 문제들을 논쟁하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쉽게 눈치챌 수 있다.파졸리니에게 예수는 확실한 신이자 신의 아들이고,그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예수가 어떤 종류의 '신'이었느냐 하는 것이다.

 

다만 동방박사의 장면들은 여타의 다른 영화들처럼 '고요한 밤 거룩한 밤'에 벌어지지 않는다.동방박사들은 해가 중천에 뜬 한낮에 예수를 찾아다니고 배경은 팔레스타인의 시장 거리이다.동방박사들은 시장 속의 민중들과 섞여있으며 마침내 예수를 찾았을 때에도,이 사건 특유의 신비한 경건함 따위와는 거리가 먼 분위기 속에서 행동한다.즉 그들은 마태복음에 써 있는 그대로 행동하긴 하지만,그들의 장면들은 어떤 의미에서 매우 일상적이고 평이한 분위기에서 진행되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말해,파졸리니가 예수의 신성 자체는 인정하는 듯 보이지만,그 신성을 둘러싼 세계의 환경적 아우라 만큼은 조용하게 소거해서 리얼한 세상에서의 신을 표현하려 하는 것이라고 유추할 만한 작은 근거를 제공하는 것이다.예수가 태어나고 ,태어난 예수에게 동방으로부터 당도한 마법사들이 경배를 드리는 베들레헴 역시,우리가 크리스마스 카드에서 익히 봉왔듯,별이 빛나는 밤하늘 아래 펼쳐진 고요하고 거룩한 장소가 아니다.차라리 이미 철거된 과거의 사당동이나 봉천동의 모습이 파졸리니의 베들레헴과 더 비슷하다.

 

 

험한 비탈에 다닥다닥 붙여 지어진 집들,허름한 차림으로 뛰노는 아이들,구세주의 등장에도 인생에 찌든 듯 힘든 표정을 지어보이는 베들레헴 주민들,..파졸리니는 신의 아들인 예수가 그런 하층계급의 빈민들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요한 세바스챤 바하로 시작되었던 이 영화의 음악은 영화의 카메라가 베들레헴의 모습을 패닝할 때,미국 흑인들의 초창기 블루스로 바뀌어진다.그것도 블루스 음악 자체가 대중적인 인기와 자금력을 획득하던 시카고 블루스가 아닌,그 이전의 델타 블루스,즉 블루스 연주자들이 흑인 노예들의 삶을 묘사하면서,그들 자신부터가 구걸과 방랑을 일삼으며 떠돌아다니던 음유시인 시절의 블루스가 연주되기 시작하는 것이다.그럼으로써 파졸리니는 은근히 당시의 유대 민중들을 백인의 압제에 시달리던 흑인 노예들의 상황과 매치시키려 하는 것이다.(영화가 만들어진 때는 바로 1964년이었다)

 

그렇다면 파졸리니가 예수를 민중계급 출신의 혁명운동가로 묘사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그의 탄생을 그려냈다는 설명이 가능할까? 언뜻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하지만,이어지는 장면들로 생각하면 반드시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예수의 출현을 알게 된 당시의 유대 지배자 헤롯이 예수 제거를 위해서 베들레헴 근방의 모든 아이들을 살해할 것을 명령할 때,예수는 예의 천사의 인도를 따라 이집트로 탈출해 버린다.그리고 이어 지배자의 군대들에 의해 자행되는 처참하고 충격적인 유아살해의 장면들이 그 뒤를 잇는다.칼을 들어 아기를 도살하는 장면 (물론 1964년이라 피와 절단이 등장하지는 않는다) 까지 포함된 생각보다 훨씬 긴 테이크들은,신의 탄생을 느긋하게 바라보던 관객들에게 깜짝 놀랄 만한 충격을 선사한다.

 

 

 

간단하고 짧게 처리해도 좋을 이 학살의 장면들에 파졸리니는 관례적인 시간들보다 훨씬 긴 시간들을 투입했다.물론 그가 당시의 권력층,그리고 그 뒤로도 이어지는 파시스트적 지배계층의 잔학한 속성들을 묘사하려고 그렇게 했을 수도 있지만,현대의 관객들에겐 그 당시에 죽어간 어린아이들의 모습이 무척이나 부당하게 느껴질 수 밖에 없다.

 

신의 탄생,그리고 구세주의 출현이 이렇게나 심각한 댓가를 치뤄야 했다면 그 구세주와 그를 보낸 신은 인간의 고통에 대해 도대체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냐는 고전적인 입장에서부터,더구나 그 신은 자신만 쏙 빠져 탈출했다는 분명한 사실까지 감안하다 보면,과연 예수의 탄생이 그의 친구이자 환경인 이웃들에게 도대체 어떤 의미였겠느냐는 근본적인 질문까지 가능하게 한다.

 

물론 이 전설적인 이야기는 후대의 복음서 저자들이,구약의 예언들과 당시 중근동 어딘가에서 벌어졌던 유아 대학살 -전염병 같은 원인으로부터 비롯된 비극적인 사망들일 수도 있을- 을 퍼즐처럼 연결시켜 삽입한 우화적인 얘기일 수도 있겠지만,예수의 탄생이 축하와 경배와 함께 슬픔과 고통을 민중들에게 함께 불러왔다는 것 역시 은연중에 흐르는 진실이다.다시 말해 예수와 기층 민중과의 관계는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층적인 상황에서 시작되었으며,탄생설화는 근대적인 의미보다는 고대적인 색채를 더 짙게 띠고 있다는 것이다.

 

동방 박사들이 예수에게 인사를 드리는 장면에서 들리는 음악은 미국 흑인 여가수 오데타의  sometimes I feel a motherless child라는 가스펠 음악이다.(odetta는 포크와 블루스에 기반을 둔 뮤지션으로서 1960년대 미국 인권운동에 앞장섰던 사람이다.) 예수는 세상에 왔지만,이로써 엄마 없는 아이들,아이 없는 엄마들이 생겨나고 말았던 것이다.

 

 

(실제 영화의 장면들로서,이 영화엔 전문배우들이 아닌 영화촬영지에서 바로 캐스팅된 아이들과 어른들이 많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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