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 영화는 시간을 건너뛰어 세례요한을 향한다.여자가 낳은 자 중 가장 위대한 자,메시아 이전에 등장해서 메시아의 길을 닦아놓았다는 복음서 저자들의 찬사를 받은 세례요한.그러나 그는 이 영화에서 종교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 이 구호는 세례요한이나 예수의 전매특허된 구호라기 보다는 당시의 영적인 설교자들이 일상적으로 외쳤던 말일 가능성이 있다- 라는 설교에 이어,세례요한은 자신의 강변을 스쳐지나가던 당시 유대교 성직자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며 다짜고짜 욕설을 퍼붓는다.
이때 파졸리니는 당황하고 모욕당한 듯한 기득권층 사람들의 시선과 세례요한 주위에 서 있던 가난한 민중들의 시선을 두 번 교차시킨다.그러면서 요한이 어느 편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그리고는 최초로 예수를 등장시킨다.
파졸리니의 예수는 꽃미남이다.
직업배우 보다는 비전문 배우들을 선호했던 파졸리니답게,예수 역을 맡았던 배우도 파졸리니가 우연히 만났던 경제학 전공의 대학생이었다.연기는 그가 했지만 목소리 만큼은 전문배우의 것을 빌려썼다는 말이 떠돌 정도로 목소리와 연기가 묘하게 일치하지 않았던 이 배우 엔리케 이자로키는 이후 한 두편의 영화에 더 출연했으나 그후로는 영화계에서 사라져 체스 게임에 관련된 직업에 종사했다.
그런데 이 꽃미남 예수는 다른 영화들의 예수와는 조금 다른다.그는 영화 내내 거의 미소를 짓지 않는다.그가 온화한 웃음을 내보일 때는 그에게 다가오는 어린이들을 대할 때 뿐이다.
또한 이 예수는 그가 만나게 되는 육체적 고통이나 정신적 슬픔 마저도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이것은 다른 영화 속 예수들과 근본적인 차이면을 이루는 것으로,이로써 파졸리니는 예수의 인간적인 측면들,인간적인 희로애락의 감정들을 거의 의도적으로 배제해버린다.굵은 송충이 눈썹에 째려보는 눈,창백한 안색에 작은 키를 가진 파졸리니의 예수는,마치 성경 속 신의 아들이자 예언자인 메시아의 문자적 이미지나 영적 이미지 그 자체로만 존재하는 듯 보인다.그의 얼굴은 클로즈업된 무표정이며 그의 존재와 면목들은 그가 입을 열어 강렬한 웅변들을 통해 자신들 드러낼 때에만 표현된다.
심지어 현대의 기독교인들에게 익숙한 이미지 -매맞고 침뱉음 당하고 가시 면류관을 쓰고 머리에서 피를 흘리고 드디어 병사들에 의해 맨 손바닥에 못질을 당하는 - 는 거의 있는 듯 없는 듯 축소된다.몇 년 전 나왔던 멜 깁슨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와는 거의 양극을 이루는 대조로서,아마 파졸리니가 깁슨의 영화를 보았다면 구역질부터 삼키려 들었을 것이다.그러나 왜 파졸리니는 이렇게 하는 것일까? 여기엔 무언가 이유가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나는 파졸리니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예수의 신성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그리고 고통받는 예수의 이미지,인간적인 예수의 이미지를 세세하게 재현하는 것은 예수의 신성을 훼손하는 일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
좀 이상하게 ,또 비전형적으로 들리기도 하지만,이것은 일리있는 생각이다.파졸리니가 견디지 못했던 것은 대중들이 그들의 신에게 품고 있는 쉬운 동일화,그리고 편의적인 종교적 태도였을 것이다.기독교인들은 예수가 채찍질 당하는 광경을 지켜보며 자기 자신이 매를 맞는 것 같은 아픔을 느낀다.예수의 손에 박히는 대못을 바라보며 스스로의 손바닥에 통증을 느낀다.기독교인들이 예수의 고난을 지켜보며 극장의 상영관 내부를 흐느낌으로 가득 차게 만들었던 경우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 국한되지 않는다.과거의 예수 영화에 있어서도 신자들은 결코 울어야 할 타이밍을 놓치는 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파졸리니는 이런 태도를 우습게 생각한다.실은 나도 그렇다.예수의 고통에 공감하며 아파하던 사람들은 교회와 영화관을 나서자마자 태도를 싹 바꿔버린다.그들은 화면으로 보았던 예수의 고통에만 공감하지,그들의 눈에 속속 들어오는 타인의 고통들에 대해서는 얼렁뚱땅 방관해 버리거나 아예 그 고통의 주파수들을 감지하지도 못한다.
이것은 기독교 특유의 논리 - 대리 고통 ,대리 속죄- 때문에 그렇다.교회는 예수가 육체적으로 고통을 당하고 처참하게 사형당함으로써 신도들의 고통을 대신 겪었다고,그래서 그들의 죄악을 대신 갚아주었다고 주장해왔다.그래서 신도들은 예수의 고통을 떠올릴 때마다 자신들의 죄많은 영혼들을 함께 떠올리고,그 이미지를 스스로의 시뮬레이션된 상황들에 연결시키고는 해방감을 맛보는 것이다.이것은 전형적인 자본주의적 해결책으로서 조금만 제정신을 가지고 생각해본다면,어딘가 공허한 부분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금방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나,뭐,그렇다고 쳐 보자.그래서 인간의 실존적 고민들이 조금이나마 경감되었다고 치자.기소된 사건들은 유예되었고 이제 새로운 삶들이 기다리고 있다고 치자.그러나 그렇다고 해도,이 모든 일들은 바로 그 지점에서 -예수라는 희생양이 고문을 당하는 광경을 목도하고 교회나 영화관을 나서는 바로 그 순간에 - 끝나버린다.아,정말로 끝난다.감성적인 에피소드 몇 개가 자신의 영혼을 구원해 줄 수 있을 거라는 단순명료한 논리들을 아무런 재고도 없이 받아들이고는 일제히 편안한 일상으로 복귀해 버린다.눈물은 강력한 카타르시스를 가져오는 영매이자 진통제로 작용하고 삶은 또 아무 일 없이 진행된다.
더구나 태초로부터 지정된 신의 계획이 그러했다는 달콤한 설명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기독교인이라는 명찰에 만족해버린다.백번 양보해서 신의 마스터 플랜이 그렇게 짜였다 하더래도 이것은 과정의 사기다.신을 인간의 지위로 끌어내린 다음 이리저리 조리돌림해서 정신적 만족을 구하고 다시 신의 자리에 앉히는 일을 반복하는 것이다.
파졸리니가 예수의 인간적인 모습들,특히 감각의 양상을 대폭 축소시키고 신으로서의 모습을 강조하는 것은 아마 종교인들의 그런 태도 때문일 것이다.예수를 신의 모습 그대로 목격하고도 똑같은 일들을 되풀이할 수 있을지 스스로 시험해보라는 의도였다는 말이다.그래서 그는 예수를 둘러싼 기적 같은 일들이나 초자연적인 현상들도 쉽게 받아들인다.예수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하늘에서 소리가 들리고 주변의 사람들이 다같이 무릎을 꿇는 장면이 삽입된 것도 다 그런 이유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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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파졸리니가 예수의 모습을 단순한 신의 모습으로만 설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파졸리니는 그 정도의 바보가 아니다.예수의 이미지를 무슨 초능력자나 초인 또는 강력한 대천사의 모습으로만 그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파졸리니의 반을 잃는 것이다.그가 예수의 일대기에서 피하려 했던 것은,예수의 감각적 인간으로서의 모습이었지,종교적 성찰자로서의 모습은 그대로 온존시켰다.파졸리니는 예수가 종교적인 열광자이자 내면의 탐구자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젊은 시절 예수가 겪었던 가장 대표적인 내적 경험인 '광야에서의 세가지 시험'을 영화 안에 포함시켰다.
물론 복음서의 저자들도 예수의 이런 측면을 인지하고 있었고,또 인류가 창조해낸 대부분 종교의 시조들은 예외없이 이런 과정 -철저하고 절대적인 고독 속에서 세속적인 욕망의 가치들과 존재의 결투를 치르는 -을 겪는다.예수도 물론 예외가 아니다.
예수는 여기서 악마에게 -아마 내면의 악마였거나 예수 자신의 환상 또는 전통에 따른 복음서 작가들의 문학적 기교로의 악마이며,파졸리니의 영화에서는 광야의 예수를 향하여 걸어오는 두 발들로만 악마들을 묘사한다 - 세 가지 시험을 받는다.재물 혹은 물질,그리고 죽음 또는 허영,그리고 세속적 세상 전체를 최종적으로 거부하면서 예수는 자신의 내면적 수련기간을 끝낸다.
역시 파졸리니는 이 장면들을 매우 심심하게,아무런 감흥이나 극적 긴장도 없이 대화와 대화만으로 끝내버리고 마는데,이는 혹시 예수의 정통 후예를 자처하는 현대의 주류 기독교인들이,광야의 예수를 따르기는 커녕,악마가 제시했던 세 가지 유혹에만 모든 능력과 감각을 집중해서 예수르 무력한 목격자로만 만들어버리는 어처구니 없이 심심한 현실을 반영하는 것 같아 씁쓸하다.그러나 구도자로서의 입문 과정의 완성,과정의 전진으 이 에피소드들은 조용히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는 드디어 세상 속으로 나아간다.각성한 예수가 맨 먼저 만나는 사람들은 농민들이다.
극적인 상황은 역시 연출되지 않는다.그저 농기구를 들고 걸어오는 농민들에게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예수가 속삭이는 예의 대사,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가 전부이다.그 대사가 농민들에게 어떤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아니다.예수의 말을 들은 농민 하나가 잠깐 고개를 돌려서 예수의 뒷모습을 일별하는 것으로 이 장면은 끝난다.
그러나 파졸리니는 굳이 '농민'들을 만나는 것으로 예수의 공적 삶의 시작을 표현하고 그 농민들이 쇠스랑 같은 농기구를 손에 들고 어깨에 걸머멘 '노동하는' 농민들이라는 것이 중요하다.예수가 노동자와 농민들의 종교적 상징으로서 커밍아웃했다는 뜻이 아니라,실제의 예수가 활동했던 지역,갈릴레아가 바로 그런 곳이었다.
거의 바다처럼 넓고 풍요로운 자원을 가지고 있는 갈릴레아 호수를 배경으로 한 이 지역은,그러나 가진 자연에 상응하는 보답을 그곳에 거주하고 있는 주민들에게 주고 있지 못했다.이 비옥한 토지들은 대부분 수도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기득권층이 소유하고 있어서 주민들은 경제적 수탈에 시달렸고 정치적으로도 차별받는 곳이었다.로마 정부,또 그들과 결탁한 예루살렘의 지주들에게 이중적으로 시달리던 갈릴레아에는 봉기와 저항이 끊이지 않았고,예수는 가장 감성적인 젊은 시절을 바로 그런 땅에서,그런 저항의 분위기 속에서 보냈던 것이다.그런 그가 농민들에게 말을 가장 먼저 건네는 이유는 당연한 일이 아니라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한편 예수가 영화 속에서 사람들에게 던진 첫 말,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참 여러 각도에서 조명할 수 있는 말이다.대개 우리나라 교회 관계자들이 사용하는 '회개'라는 단어의 용례는 지나치게 협소하다.마치 양날의 칼처럼,교리범위 내부에서의 회개를 경험하지 않으면 영원한 고통과 지옥에서의 형벌이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식으로만 호도되는 것이다.그리고 그들은 회개의 증거들로서 문자 그대로의 순한 양으로 변해버린다는 의미에서의 순종과 복종,때로는 정서적 광란이 동반되는 눈물들,그리고 어떤 때는 재정적인 헌신까지를 요구한다.
그러나 영원한 지옥을 눈 앞에 내건 회개가,현실의 모순 보다는 내세의 지복을 염원하는 심리적 기반에 기초한 회개가,인간 존재의 변화와 개심을 유도한다는 촉매로서 정상적인 것인가? 공포에 기반한 통치는 원래 파시즘의 주무기이며 억압과 부자유만을 유발해왔다는 역사적 진실 앞에서,주류 기독교가 내세우는 이런 '회개'는 얼마나 진실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인가?
회개,뉘우침.영어로는 repent,헬라어로는 메타노이아라는 이 말에는 보다 폭 넓은 의미가 담겨 있다.그것은 일종의 권유이자 명령으로서,다른 방법으로 살아보라는,현재의 인생행로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걸어보라는,현재 가고 있는 길을 좀 바꾸어보라는 보다 정신적이고 현실적인 말이다.
교회에서 보내는 시간 동안에는 기독교인으로 행세하다가 교회 바깥으로 걸어나오기만 하면 비기독교인들 저리 가라 할 정도의 비종교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런 종류의 '회개'와는 완전히 거리가 멀다.예수 가르침의 문학적 건조자이자 철학적 창건자 중 하나인 사도 바울이 '거듭남'을 얘기할 때,그 의미 역시 인격의 전격적인 변화이자 살아간다는 행위의 달라짐을 의미하는 것이지,'기독교인'이라는 정체성에만 얽매여서 자신 보다 약한 사람들을 차별하고 소외시키라는 뜻은 아니었던 것이다.
따라서 자신이 속한 사회를 선도하기는 커녕,그 체제에 흡수되어 체제의 모순을 변호하는 데에만 앞장서는 교회는,그냥 콘크리트 건물로서의 구조물이지 진짜 교회는 아닌 것이다.이런 의미에서 주류 기독교의 역사는 끝없는 편의적 왜곡의 역사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반면 이 '회개'가 전혀 다른 어떤 것을 가리키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그것은 좀 더 다른 정신적인 의미에서의 열광,밀교적인 의미에서의 다른 세계를 향한 편입이라는 뜻으로 사용될 수도 있다.불교의 열반,정신의 극렬한 열락,인간 개인을 둘러싼 외부세계와 인간 내부세계의 통합이라는 정신적 반응으로서,이 회개라는 단어가 사용된다면,'천국이 가까왔다'는 '회개하라'의 댓구 역시 그 이해가 빨라진다.
즉 천국은 이미 지상에 구현되어 있으며 ,메타노이아라 불리는 정신적 에너지가 인간의 모든 불안,그 지옥도에서 개인의 존재를 초월시켜줄 수 있다는 생각이 성립되는 것이다.그러나 1964년의 파졸리니가 그런 얘기를 주장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그는 여전히 마태복음의 단계들을 차분하게 밟아가고 있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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