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종교를 원하는 것,자신보다 더 거대한 존재에게 경배를 드리는 것,자신의 영혼의 일단을 내어주고 종교적인 가르침에 따르는 것,이런 행위들,그리고 정신들.다시 말하자면 종교적인 현상들은 도대체 왜 일어나는 것일까? 종교의 어떤 매력들이 사람들을 그들의 전당으로 이끌고 있는가? 인류역사에 나타났던 그 수많은 종교들의 제양상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해낼 수 있을까?
물론 각 종교 사이에는 분명히 드러나는 편차들이 있어서,이 종교들을 모두 '종교'라는 단 한 개의 범주 안에 집어넣고 얘기하려 하는 것은,또 하나의 오류를 창조해내는 첩경인지도 모른다.사실 그들은 서로 비슷하면서도 다른 존재들인 것이다.그러나 서로 강도는 다를지언정,그들이 사람들의 심성을 끊임없이 스스로의 자기장으로 끌어들여온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실패와 성공을 거듭하면서 각각의 종교들은 세상 구석구석에서 그들의 호흡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종교들은 자신들이 주장하는 교리가,자신들이 내세우고 섬기는 신이,자신들의 간판스타격인 성인이 보다 우월하고 보다 진리에 가깝다고 우긴다.또 어떤 종교들은 타종교에 대한 배타적인 성향을 자제하고(그러나 그 어떤 종교도 완전히 배타적이지 않은 적은 없었다.역사의 어느 시기에 이르르면 종교는 반드시 스스로의 배타적인 성격을 드러내고야 말았다) 좀 더 개인의 -신도들의- 영혼 내부에 집중한 채 그들의 수련에 성의를 쏟아붓기도 한다.또 다른 종교들은 그들이 속한 사회 전체의 정치사회적 시스템을 완전히 총괄하고 지배하여 하나의 거대하고 촘촘한 그물망을 형성하고,그 구조 자체를 통해 신도들의 영혼을 사로잡아 궁극적인 구원에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 밖에도 많은 양상들이 종교라는 크나큰 카테고리 안에서 인류역사를 통틀어 다양다기한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지만,각 종교들의 역사를 훑어보면,그들이 벌이는 일들은 시간 차이만 날 뿐이지 본질적으로는 유사한 행위들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냐는 의문 역시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은 종교적인 '현상들'이다.그런 현상과 역사들에 대한 고려를 하기에 앞서,왜 사람들은 종교라는 ,형이상학으로 시작한 정치적 사회적 철학적 체제들을 고안하고 받아들이고 발전시켜왔던 것일까? 또 그것보다 앞서,왜 인류는 종교를 그들의 생활 내로 끌어들이고야 만 것인가.
그 많은 부작용과 위험을 감수하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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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으로 올바른 삶을 위해서란 대답은 그리 유효하지 않다.그것은 종교만이 이룰 수 있는 일은 아니다.종교가 바른 삶을 위한 적당한 조건과 이유를 제공해주기는 하지만,그런 삶을 살기 위해 반드시 우리가 종교라는 체제를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개인의 각성과 정신적 초월이라는 또 하나의 관점이 등장할 수도 있겠지만,그런 필요를 느끼는 사람들은 인류의 대부분이 아니라 소수에 불과하다.지성의 수련을 지고의 목적으로 받아들이기에는,사람들의 인생엔 신경써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다.이 역시 종교현상의 이유 전체를 설명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좀 더 근본적인 쪽으로 생각의 흐름을 바꿔야 한다.사람들의 내부 어딘가의 갈망,그들 내부의 심연 어느 곳의 결핍이 신과 종교에 대한 갈망과 복종을 만드는 것 아니냐는 얘기다.
사실 인간은 근원적으로 영웅이 아니다.오히려 작은 존재다.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외부로부터의 위협이며 내면적인 욕망이다.외부로부터의 위협은 재난과 배고픔,그리고 결정적으로는 죽음이란 형태를 띠고서,언제 어느 곳에서라도 터질 수 있다는 폭발의 가능성과 함께 인간을 포위한다.그 중에서도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죽음이다.종막에 가서는 결국 죽어야 하지만,우리는 죽음의 시기를 최대한도로 늦추려 하고,죽음 이후의 보장을 약속받기를 갈망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종교는 바로 그 지점,죽음에 대한 불안해소의 시도로서 인류사에 등장했다.
죽음,사멸.멸절...이것은 근본적으로 자기 존재에 대한 불안감이다.자기 자신의 존재가 영원하지 못할 것이라는 분명한 사실로부터 우러나오는 불안감이 종교의 맹아로 자리잡는 것이다.사실 우리가 무덤을 남기는 것도,후손들이 조상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제례를 올리는 것도,심지어 족보나 성씨나 이름의 항렬에 이르기까지,우리가 가지는 죽음 이후의 두려움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는 행사와 관념들이다.
죽음 이후에도 누군가가 기억해주기를 바라며 우리는 제사의식을 만들어냈고 이집트의 제왕들은 피라미드를 만들어냈다.그것은 당연히 죽음 이후에도 또다른 세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생각,죽었지만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니어서 영혼은 불멸하며 세계라는 거대한 시공간적 수레바퀴를 돌고 또 돈다는 생각,그리고 죽었지만 다시 숨결을 부여받아 부활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발전해나갔다.인류는 이것이 죽음으로 인한 영혼의 불안함을 해소할 수 있는 구원의 방도라고 생각하기도 했고,차분하게 죽음을 응시하며 그 거대한 부조리와 정면으로 맞서보려고도 했다.
그러나 인류가 개발하고 발명해낸 그 어떤 방법들도 존재의 불안감으로부터 비롯된 죽음이라는 구체적 사실로부터 인류를 완전히 해방시키지 못했고,종교는 그야말로 수만년 동안 그 틈새시장에 버티고 앉아 자신의 존재형태를 재발견하고 재창조하면서 지금 이 시간에 이르른 것이다.
따라서 죽음에 대한 불안감과 두려움을 극복하고 오히려 현세의 삶을 찬양하며 지금 이곳에서의 열락을 강조하는 생각과 태도들은 '대부분' 종교의 반대편에 위치해서,종교 시스템과 긴장관계를 유지할 수 밖에 없는 생래적인 운명을 지니고 이 세상에 등장하였다.이 두 태도 사이의 변증법적인 통합을 주장하는 생각들의 입지가 어쩔 수 없이 좁아질 수 밖에 없는 이유는,이 두 생각이 근대 이후 인류사상사의 대립적인 두 가지 흐름을 조성할 수 밖에 없게 되었고,인류의 근원적인 불안감은 통합이나 제3의 생각 같은 뜨뜻미지근한 해결책을 받아들이기에는 점점 치열해지고 점점 확대되어 오기만 했던 것이다.
그래서 죽음-존재의 사라짐-근원적인 실종 에 대한 불안감은 종교의 기원과 근거에 대한 가장 주요한 토대로 자리잡았다는 것이 이 글을 써내려가고 있는 현재의 내 생각이다.(그런데 내 생각이라는 것이,대체로 가변적이기 때문에 이 글의 말미쯤엔 또다시 변화를 맞을 수도 있겠다)
반면 불안은 또다른 욕망을 생산하기도 한다.욕망은 근본적으로 아나키즘적이며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동체 사회에 대한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거나 또는 은연중에 암시한다.심지어 죽음에 대한 가장 래디컬한 반항 중 하나인 자살마저도,인간의 욕망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아서 종교는 욕망에 대한 새로운 대적자로까지 등장하게 되었다.
멸절에의 불안과,욕망에 대한 또다른 불안감은 종교로 하여금 견고한 성채를 건설하는 데에 주요한 요인으로서 일조하게 되었고,종교는 규범과 금지와 '죄'라는 깔끔하고도 무시무시한 개념을 정립함으로써 (물론 종교만 그리 했다는 것이 아니다.이 개념들이 권력으로서의 종교의 토대가 되었다는 뜻으로 나는 이 단어들을 사용하고 있는 중이다) 때로는 심대한 위협으로,때로는 달콤한 유혹으로 인류사에 굳건히 작용하게 되었다.
적어도 사람들이 '자유'라는 개념을 두뇌 저 밑바닥에 유폐되었던 서랍으로부터 무거운 먼지들을 탈탈 털어대며 끄집어내어,도그마가 된 종교에 반하아하기 전까지,종교는 자신의 성채를 감옥으로 변환시키고 자신의 충성스런 신도들을 수인으로 만들면서까지 그 어떤 양심의 거리낌도 느끼지 않았다.종교는 자신의 기본적인 토대들을 본능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유'라는 깨지기 쉽고 유약하며,그 어지럽고 가벼운 내성 때문에 매혹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개념 덕택에,사실은 종교에 대해서라면 당연히 손톱 만큼의 관심도 가지지 않아야 정상일 무신론자들 마저도,종교와 그들의 신에 대해 어쩔 수 없는 눈들을 돌릴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러나 무신론이라는 것도,또 유신론이라는 것도,어찌 보면 생각하기에 따라서 매우 복잡한 개념이 된다.신에 관한 생각들이라는 것 역시 가지 많은 나무들처럼 다양하게 뻗어올라가,그 내부를 둘러보면 전혀 다른 신에 대한 생각들이,어찌 보면 수천만 개의 생각들이 제각각 자신의 존재들을 과시한다.범신론 다신론 유일신론 같은 대표적인 학문적 개념들로부터,신이 있다고 생각하는 개인들의 내부를 들여다보면,어쩌면 모두 다 똑같지 않은 수억 개의 얼굴로서 신의 모습은 그 형상들을 달리 하고 있다.
따라서 어쩌면,'신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처럼 어리석은 질문은 이 세상에 다시 없을 것도 같고,그런 종류의 우문이 있기에 거기에 따르는 수많은 현명한 대답들이 따라 나와,신에 대한 생각들을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래서 신에 대한 글을 쓸 때,신은 존재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명시한다는 것은,글의 진전을 방해하고고의적으로 딴지를 거는 이상스런 신원조회일 수도 있다.약간은 참고서 기다려주는 것이 미덕이며 선행일 수도 있는 것이다.(나는 이런 문장을 씀으로써,앞으로 길게 이어질 내 글의 딴지들에 대한 변호작업을 미리부터 수행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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