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는 글이 이렇게 길어지는 이유는 종교에 대한 내 그간의 정체성을 미리 점검해야 하기 때문이었다.그래서 나는 내 종교적 이력을 이토록이나 쓸모없이 길게 늘어놓고 있다.물론 이 이력에는 몇 가지 근본적인 이야기들을 덧붙여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무신론자인가 아니면 신의 존재 - 물론 신이 물질적 존재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 역시 함께 제기되어야 하겠지만 - 를 믿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 같은 것 말이다.또 기독교의 성자인 예수를 그들의 정통 교리대로,신의 아들로 받아들이고 있는가랄지,또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을 문자 그대로 다 믿고 있느냘지,하는 신과 기독교에 대한 고전적이고 기본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 역시 선행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글쎄,이런 질문들은 대개 함정이 많고 대답은 또 다른 질문들과 대답들을 호출한다.그리고 그런 질문과 대답,번뜩이는 생각들과 턱없는 오류로 가득 찬 억측들 속에서 표현되는 것이야말로 종교적인 과정이라고도 얘기할 수 있다.또 사실 대답을 잘 모르고 있으니까 이렇게 글을 쓰고 있지 않느냐는 속 편한 말도 있을 수 있겠다.어쩌면 그것이 정답일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나는 이 머릿말을 시작하던 초기에 했던 말을 또다시 반복할 수 밖에 없다.만약 내가 무신론자라면 이렇게 긴 시간과 정력을 들여 이 긴 글들에 생각을 투자할 필요가 없을 거라는 소리 말이다.무신론자들은 사실 신에 대해서 얘기할 필요가 없다.그들이 집중해야 할 부분은 신이라는 가면을 쓰고서,신의 말씀이라는 탐욕과 허위의 입술로 무장한 채,인류를 선동하고 오도하는 또다른 부류의 인간들과,그들이 만든 정치와 종교의 체제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길로는 가지 않을 작정이다.내 개성과도 들어맞지 않고 그런 작업들을 수행하는 분들은 차고 넘쳤다(물론 종교적 범죄인과 종교적 저능아들은 그 보다 더 넘치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겠지만)
그렇다면 나는 신의 종이자 신을 향한 간절한 구도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가? 신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내 존재의 기원을 신이라는 이름 아래에 두고 있는가? 생각해보면 또 그것도 아니다.우주 한 구석 어디 또는 하늘 한 쪽 어디에,한 손엔 진노의 번개를 다른 한 손엔 지고한 사랑의 그림책을 따로따로 쥐고 있다는 생각은,내겐 너무나도 받아들이기 힘든 만화적 상상력이다.
더구나 신은 개개의 인간에게 수천가지의 각각 다른 모습으로 출현하지 않는가? 심지어 한 사람의 마음 속에서 조차도 똑같은 형태의 신이란 없다.신은 10분의 시간차를 두고서도 그 모습을 변화시킨다.나는 그런 모습으로서의 신이라면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그렇기 때문에 이 글을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예수가 신의 아들이냐는 질문에는 그냥 글쎄올시다 라는 답을 할까 한다.이 대답은 I don' know도 maybe도 아닌 도대체 촌스럽게 아들이 무어냐는 대답이다.신의 아들을 든든한 지원자로 두고서 영혼의 평화와 내세의 구원을 획득하겠다는 생각은 지나치게 편의적이다.물론 희생의 제물과 구원의 매개자를 상정한다는 것은 인류가 시작된 이후 부터의 종교적인 패턴이긴 하다.그래서 이런 생각에 차가운 미소를 보내고 비아냥 섞인 말을 말리는 것은,그동안 이어져왔던 인류의 고결한 종교적 행위에 대한 질 나쁜 무례일 수 있다.그러나 예의와는 상관없이 이런 종류의 쉽고 얼마든지 이용가능한 방법을 선호한다는 것은 유머러스함에 조차 연결시키기 어려운 희비극으로 진행되기 쉽다.
기독교가 이어온 신과 성자의 기록인 성경의 무오류성에 대해서는 그냥 코웃음을 날리련다.사실 성경의 글자 하나하나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그곳에 내재해있는 생각과 영혼을 움직여낼 수 있는 깊은 주파수들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그러나 경전 자체를 신성시해서 질문과 항의 조차 용납할 수 없는 태도는 또 하나의 정신적 파시즘이며 유사 샤머니즘이다.
인류가 그런 꼴을 보자고 종교적 태도를 진보시켜왔고 정신사상사의 흐름을 유지시켜온 것이 아니다.성경은 생각들의 보고가 되어야하며 논쟁적 텍스트로서 기능할 수 있어야 한다.유연한 마음이 없다면,심지어 훈민정음 조차도 바보들의 놀이터로 전락해버릴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기독교에 대한 사유들을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성경에 쓰여진 대부분의 내용들을,사건들과 언설들의 기본적 기조들을 받아들여야 한다.가령,예수는 과연 실존인물이었느냐는 질문에 직면할 때,그가 이천년 전 여러 예언자와 랍비들이 짜집기된 모자이크 캐릭터라는 가설들을 대할 때,적어도 그 정도는 거부하고 시작할 수 밖에 없다.다른 걸 다 떠나서 내 글들을 완벽한 폐지로 만들어버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한 또 하나,기독교인들에 대한 지나친 멸시나 비하 역시 조심해야 마땅할 조건들 중 하나이다.사람들의 영혼 하나 하나 만큼은 소중하게 여겨지고 처리되어야 한다.그들의 마음을 조종하고 조절해서 이득과 권력을 취하려는 이들이야 파렴치범으로 취급당해야 하는 것이 정의의고,그릇되이 쌓아올려진 종교적 시스템이야말로 진정한 타격의 대상이 되어야 하지만,심약한 영혼에 대한 편안한 쉼터를 소망하며 모여든 사람들의 기본적 심성까지 타박하고 공격하기 시작하면,삶은 너무나 황폐해진다.콜라가 치아에 나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독극물이 아니라는 이유로 사람들은 콜라를 즐겨 마시는 것이다.(물론 독극물에 대한 각 나라 식약청의 기준은 서로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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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강 이 정도 해 두고 시작할까 한다.
이제부터 나는 종교 이야기를 시작할까 하는데,앞에서도 말했던 바와 같이 내 종교적 경험의 넓이가 기독교 -그것도 개신교 -에 협소하게 국한되어 있으므로,기독교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며 첫번째 이야기가 될 것이다.
또 하나,내 이야기들의 텍스트는 영화이다.영화를 종교 이야기의 텍스트로 삼은 것은 전적으로,부족한 내 지성적 능력 때문이다.그러나 어쩔 수 없이 영화라는 간접 매개물을 통해 나는 글들을 이어나갈 것이다.(일부 종교인들이 그들의 성인들이 없으면 사유와 종교적 행위들을 이어나갈 수 없듯이)
그 영화들의 리스트는 다음과 같다.
마태복음 (1964,이탈리아.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1988 미국 마틴 스콜세지)
몬트리올 예수 (1989 캐나다 프랑스 데니 아르캉)
프란체스코,신의 어릿광대 (1950 이탈리아 로베르토 로셀리니)
잔다르크의 수난 (1928 프랑스 칼 테오드르 드라이어)
신의 아그네스 (1985 미국 노만 주이슨)
비리디아나 (1961 스페인 루이스 브뉘엘)
어느 시골 본당신부의 일기 (1950 프랑스 로베르 브레쏭)
겨울빛 (1963 스웨덴 잉마르 베리만)
나자린 (1958 멕시코 루이스 브뉘엘)
분노의 날 (1943 프랑스 칼 테오드르 드레이어)
미션 (1986 미국 롤랑 조페)
제 7의 봉인 (1957 스웨덴 잉마르 베리만)
홀리 마운틴 (1975 멕시코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1989 한국 배용균)
노스탤지아 (1983 이탈리아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위대한 침묵 (2005 프랑스 필립 그로닝)
안티 크라이스트 (2009 덴마크 라스 폰 트리에)
수많고 많은 영화들 속에서,나는 겨우 이 정도의 목록 만을 작성할 수 밖에 없다.어쩔 수 없는 일이다.나는 나의 한계를 잘 알고 있다.또,쓰다 보면 한 두 편의 영화는 사라지거나 커트당할 수도 있을 것이며,또다른 영화들이 목록 내부에 편입될 수도 있을 것이다.그것 역시 내 한계이자 변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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