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장면은 갈릴레아 해변에서 예수가 제자들을 픽업하는 장면이다.예수는 대부분이 어부들인 그들에게 간단히 '자신을 따르라'고만 선언하고,제자들은 주저없이 예수를 따른다.그리고 카메라는 제자들의 이름이 차례로 호명되는 가운데,그들의 얼굴을 화면 안에 가득 채운다.그리고 예수는 제자들에게 경고한다.그들이 가게 될 길이 결코 평탄할 수 없음을,가는 곳마다 린치당하고 쫓겨나게 딜 것임을,예수는 그들에게 예언한다.
보통의 예수 영화라면,이 장면은 보다 비장하게,그러면서도 결론적인 승리자의 위치에 서게 될 사람들의 자랑스런 과거담처럼 그려졌을 것이다.그러나 파졸리니는 이번에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이 예언을 듣고 있는 제자들의 얼굴은 결코 희망적인 표정이 아니다.투사의 외양 역시 갖추고 있지 않다.지쳐있고 두려워하고있고 근심에 가득 차 있다.
여기서 파졸리니의 <마태복음>은 묘하게 그들이 살아갔던 현실 쪽으로 포커스를 옮겨가기 시작한다.사실 예수는 유대의 변방인 갈릴레아에서 활동했다.예수가 했던 대부분의 운동들은 철저히 비주류적인 활동이었고 강한 세력을 유지하지도 못했다.예수는 수도인 예루살렘에서 사형에 처해지는데,그때 예수를 사형시키라고 외쳤던 사람들은 평소에 예수의 가르침을 흠모해왔던 그의 추종자들이 아니었다.
가끔씩 일부 어리석은 설교자들이 예루살렘 사람들이 갑작스런 변덕을 부려서 예수를 십자가형에 처하게 했다는 식의 얘기를 하는 경우가 있지만 - 그들은 어떻게든 일반 대중들을 폄하시켜야만 속이 시원해지는 모양이다 - 실제로 예수의 축출을 주장했던 예루살렘 사람들은 예수의 지지세력인 갈릴레아 사람들과는 부류가 다른 사람들이다.(물론 이런 식으로 지방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세력을 분류하는 것이 어리석다는 것은 나도 인정한다)
부동산 값에 목을 매면서 MB정부를 지지하는 수도권의 강남 유권자들처럼 (물론 이 역시 거친 비유이다) 그들은 예루살렘의 지배층 사람들과 이해관계를 공유하고 있었다.그들에게도 예수는 체제 내의 자신들을 향한 떠오르는 위협이었다.
그러니 예수가 예수의 제자들에게 그들에게 닥치게 될 어려운 미래에 관해 미리 지침을 주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고 제자들의 반응이 우울한 것 또한 자연스럽다.이 얘기를 안티기독교 세력이나 불신자들 (국내외를 가리지않고 존재하는) 의 모멸감에 대한 예수의 예언이자 위로이며 나아가 승리의 표식으로 주장하는 일이야말로 넌센스 중의 넌센스다.예수는 애초부터 정치적인 힘 따위는 가지고 있지도 않았고 원하지도 않았다.무엇보다 그는 변방 출신이었던 것이다.
파졸리니의 이런 미묘한 변화 -드디어 그의 예수는 당시의 팔레스타인 현실로 잠입해 들어가기 시작한다 - 는 궁극적으로 그의 예수관을 넌지시 짚어가는 도입부가 되고 있다.(한편,좀 다른 얘기겠지만 예수의 '열 두' 제자에서 숫자 12를 실제 예수 제자들의 숫자로 파악하는 것도 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열둘은 기호이자 상징에 불과하며 후대의 정치적 신학자들이나 예수 사후 초기 시절의 예수교 브레인들의 합의된 설정이라고 보는 편이 훨씬 합리적이다.예수 역시 따르는 추종자들을 그 거리에 따라 구분했을 것이고,그러다보면 지근거리의 보좌관 그룹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을 것이다.)
이때부터 -예수의 본격적 행보가 시작되면서부터- 파졸리니의 카메라는 당시의 현실을 파고들기 시작한다.이탈리아의 가난한 남부 도시 마테라의,실제로도 빈민촌이었던 구역에서 촬영된 이 영화는,이제 황량하고 헐벗은 들판들과 통곡하는 민중들 그리고 그들의 경제적 빈곤의 실체를 관객에게 여과없이 전달하기 시작한다.
메마른 대지에는 사람의 것인지 동물의 것인지도 모를 골반뼈가 흩어져있고,
육체와 정신의 병을 지닌 환자들이 예수에게 다가온다.황막한 황무지 위로 죽음과 고통의 이미지가 하나 가득 펼쳐지는 것이다.
이때 좀 허접하게 분장된 문둥병 환자가 예수에게 다가와 치료를 요청한다.아주 잠깐 멈칫거리던 예수는 그의 병을 치료해준다.그러나 이순간에도 예수의 표정은 역시 무표정이다.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는 기계적인 표정에 가깝다.
이는 이 장면을 상술하는 성경의 형용사들과도 대치된다.성경엔,예수가 그에게 다가오는 병자들을 최소한 '측은히' 여겼다고 쓰여있다.(또 이 단어에서 '애끓는'이란 의미를 찾아내는 신학자들도 있다) 이 '측은함' 속에 개인에 대한 동정심을 넘어선 인류 자체에 대한 예수의 비관적 세계관이 끼어들어 있을지도 모르지만,적어도 파졸리니의 예수 얼굴엔 그런 감정반응이 잘 나타나 있지 않다.
반면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면,이런 식으로 병자들의 치유를 담당했던 사람이 꼭 예수 만은 아니었다.많은 민간치료사들과 종교인들이 예수가 했던 것과 유사한 치료행위를 벌였다.그러나 예수의 경우엔,이 치료행위가 단순한 치료행위에만 그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당시의 병자들은 종교적 권력에 의해서 죄인으로 낙인찍혀 있었다.육체의 병소는 신의 분노의 표지였고.병자들은 일상적 공동체 사회에서 격리된 채 비인간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어쩌면 이런 관습이 지배권력의 통치기술과도 연관을 가졌을 수도 있다.병에 대한 미신적 두려움과 사회적 약자들의 고의적인 설정을 통해 민중을 통치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다.
20세기 우리 사회가 병으로 지목했던 것은 빨갱이와 진보였고,이 과정을 통해 사람들을 감염시킨 레드 컴플렉스 바이러스는 압제에 항의하는 사람들을 말살하고 구석으로 몰아붙여버리는 기능을 담당하지 않았던가.
예수의 치유행위는 이런 종류의 딱지붙이기,병을 죄라고 이름붙여서 통치의 기술로 활용하는 태도에 대한 공격일 수 있었다.가정에 불과하지만 여타의 다른 치료사들의 그것과는 다른 예수의 이러한 행위의미들이 - 죄사함을 행할 수 있다는 선언과 어울려서 - 기득권 세력에게 위협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그래서 파졸리니는 예수가 병자들을 낫게 해주는 장면들에서,예수의 얼굴을 일부러 표정없는 신성함으로 포장함으로써,그의 신성과 사회적인 의미들을 다같이 강조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 역시 처음에는 권력이 가지는 힘을 어느 정도 경계했던 듯 보인다.그는 언제나 병에서 해방된 병자에게,다른 사람들에게 '소문을 내지 말고',지역의 종교책임자에게 육체를 내보여서 죄인이라는 사회적 굴레에서 벗어나라고 권유했던 것이다.그러나 종교의 힘을 통해 권력을 유지하는 사람들과 율법 자체에 매몰되어 경전적인 순결함 만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는 계층들과의 충돌을 피할 방도는 없었다.
이때부터 파졸리니의 영화는 예수의 어록들 -파졸리니는 성경에 쓰여진 말들을 그대로 스크린 위에 쏟아넣는다-과 권력과의 충돌,그리고 비참한 민중들의 실상을 교대로 보여주기 시작한다.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로 시작하는 산상수훈의 낭독장면들은 거친 황야를 걸어가는 예수 일행의 모습 뒤로 보이스오버 나레이션되고,예수와 유대 율법가들의 논쟁 장면들이 그 뒤를 잇는다.
병자들은 수시로 예수에게 다가오고 대부분이 빈곤한 사람들인 그들을 예수는 치유하고 일으켜 세운다.이럴 때 파졸리니가 삽입시키는 음악은 바하나 모짜르트가 아니다.블라인드 윌리 존슨 (blind willie Johnson).전설적인 미국의 블루스와 가스펠 뮤지션.이름이 가리키듯 양모의 학대에 의해 눈이 먼 그는 음악생활 초기엔 거의 깡통을 차고 구걸하며 연주했고 길거리에서 설교하며 노랠 불렀다.극심한 가난에 시달렸으며,심지어 집이 불타버린 다음엔,폐허가 된 집터에서 살 수 밖에 없었던 20세기 초반의 흑인 뮤지션.흔히 말하는 보틀 넥 기타,슬라이딩 기타 주법의 선구자였던 사람.결국 말라리아에 걸렸으나 흑인이라는 이유로 진료를 거부하는 병원 때문에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사람.그의 노래에는 그의 비극적 개인사와 어울려서 천대받는 미국 흑인들의 정서가 물씬 배여 있다.
그리고 하필 파졸리니는 블라인드 윌리 존슨의 음악을 차용하고 있는 것이다.하긴 예수가 그의 첫 치유를 행할 때 들려오는 음악은 미사 루바 (missa luba)의 음악으로 이들은 벨기에의 식민지였던 콩고에서 출발한 가톨릭 계열의 음악이었다.이렇게 파졸리니의 <마태복음>은 철저하게 제3세계 및 차별받는 인종들과의 연결의식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고,그가 생각하는 신인 예수의 출신과 계급을 명확하게 한다.
이때부터 영화는 예수의 생애를 입체적으로 재구성하기 시작한다.예수의 입을 통해 폭발적으로 들여오는 그의 말들과 그의 행적,그리고 그가 일으키는 갈등들이 쏟아져 나온다.
가령 오병이어의 기적은 문자 그대로 묘사된다.굶주린 사람들은 환호하고 서로 나누어 먹기를 즐긴다.
기적의 가능성 여부를 떠나서 이것은 파졸리니의 사회주의자적인 면모를 그대로 보여 준다.예수의 기적을 인정하면서 파졸리니가 말하는 것은 일종의 나눔의 체제이다.물고기와 떡을 먹는 사람들의 환희는 더 많은 떡과 더 많은 물고기들을 곳간에 쌓아놓고서 소유욕을 불태우며,그 소유 자체의 안위에 대한 불안감에 떠는 가진 자들의 상황과 정확히 대비된다.
하늘에서 음식이 쏟아져 내려 그냥 배불리 먹고 즐겼다는 에피소드,예수의 거대한 능력을 예증하는 일화로만 이 얘기를 읽어낸다면,인생은 역설적으로 처참하게 가난해진다.일회적인 자선과 나눔으로만 이 얘기를 한정시킬 것이 아니라,좀 더 근본적인 가치를 상징하는 의미로 우리는 이 에피소드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파졸리니는 또 하나의 초현실적인 예수의 기적 씬을 이 장면 뒤에 이어놓는다.예수의 가장 유명한 초자연적 일화인 물 위를 걷는 예수가 바로 그것이다.물 위로 걸어오는 예수를 발견하고 제자들이 놀란 후,제자 하나가 자신도 스승과 똑같은 기적을 시험하려다가 물에 빠지는 장면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 일을 너무나 신화적으로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사실 종교적 얘기들은 수많은 이적들로 가득 차 있다.초자연적인 기적의 양으로만 치면,예수의 기적으로는 양적으로는 좀 부족한 편에 들어간다.또 물 위를 걷는달지 하늘을 날아다니는 일 자체가 그렇게 중요하지도 않다.힘과 능력을 숭배하려고 종교생활을 이어나가는 것 또한 지극히 곤란하다.초자연적인 에피소드를 미신적으로 포장해서 인간의 오감을 자극하는 것 또한 적절하지 않다.외부의 힘을 숭앙하는 사람은 그 보다 더 큰 힘을 가진 존재가 나타나면 언제든 숭배의 대상을 바꿔치기하려 할 테고,그렇게 하다가 그의 짧은 인생은 끝나버린다.
물 위를 걷는 예수에 대한 이 이야기는 예수의 초능력성 보다는,오히려 그의 강력한 종교적 정신에 대한 이야기로 읽는 것이 마땅한 듯 하다.굳이 예수를 따라 하려다가 물 속에 빠지는 베드로의 장면을 집어넣은 것은,고양된 정신의 수준에 이르지 못한 사람의 운명을 은유하려 하는 것 같다.물론 그렇게 물 속에 빠진 사람이 물 위를 걷는 사람 보다 더 저열하다는 것은 아니다.다만 정신의 거대한 능력을 우리가 신뢰하게 될 때,인간 개인에게도 어떤 기적 같은 일들이 벌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조용한 우화로,우리는 이 이야기의 의미를 변형시켜 파악할 수 있다.(여기서 허경영을 떠올리시면 곤란하다) 사실 물 위를 걸어다는 게 그렇게 대단한 일인 것인가..
그러나 이런 기적들에 관한 일련의 일화 이후,예수는 점점 반항적이고 분노에 사로잡혀간다.그동안 일관했던 정적인 모습에서 벗어나,반대편에 서 있는 그의 적들에게 저주와 비난을 퍼붓기 시작한다.이것은 명확하게 변해버린 예수의 모습이다.
- (계속) -
영화에 삽입된 블라인드 윌리 죤슨의 dark was the night,cold was the ground를 들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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