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뇌의 저 먼 아래 쪽에 위치한 기억으로부터 비롯되는 정신의 움직임은 매우 흥미로운 현상이다.그 움직임이 일으키는 묘한 파동들,그리고 그 파동의 어이없이 사소한 동기들은 뇌과학 연구자들에겐 매우 익숙한 상황일 수도 있고,또 얼마든지 설명 가능한 일일 수도 있겠으나,개인 존재에겐 거미줄 처럼 엉켜서 머릿속에서 이상한 연계를 자아내는 기억과 기억의 연결점이야말로 어떤 때는 매우 사소하거나 또는 치명적인 모순처럼 여겨지면서 왜일까,왜일까란 혼잣말을 반복하게 만든다.
나는 이런 희한한 현상을 수시로 경험하는 바,최근 내게 벌어졌던 이런 류의 일 하나를 기록으로 남기고자 한다.
1980년대의 어느 날 TV 에서 방영되었던 어떤 만화영화가 떠오른 건 꽤 오래 전 일이다.줄거리도,영화의 씬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데,그냥 거미,그것도 암컷 거미가 주인공 격으로 등장했었다는 사실 하나 만이 기억에 생생했다.나는 그 만화영화의 제목을 '거미집' 이라고 기억했다.기억의 두꺼운 책갈피 밑으로 잠수한 어떤 거미와 '거미집'은 어느 날 갑자기,특별한 계기도 없이 눈 뒷편의 어떤 곳으로 떠올랐고,나는 구글과 유튜브를 통해 '거미집' 이란 만화를 줄기차게 검색했다.거의 몇 년 동안,수시로 검색했다.그러나 도무지 '거미집' 이라는 이름의 극장판 애니매이션 영화는 찾아지지 않았다.
아무리 검색어를 이것저것 다르게 구성해 보아도 내가 찾는 애니매이션은 없었다.
거미가 주인공인 애니매이션 영화
거미가 등장하는 TV 애니메이션 영화
거미,주인공,만화영화..
영화 거미집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그러다 생각했다.나는 도대체 왜 저 만화영화를 기억하는가.저 만화영화의 어떤 요소가 나를 매혹시켰는가.줄거리도 장면도 생각나지 않는 저 애니메이션의 어떤 점이 내 두뇌 속 깊숙한 곳에 뚜렷한 흔적을 남기고야 말았던 것인가..
어느 긴 여름 날,난 드디어 답을 찾았다.그것은 목소리였다.거미의 목소리.부드러우면서도 깊게 깔리는,벨벳 같은 부드러움을 가졌던,배우 이혜영의 발성과 유사한 당시 방송 성우의 더빙된 목소리.바로 그것이었다.거미의 음성,거미의 발성,거미의 전언,거미의 대화.이름을 알 수 없는 어떤 방송 성우가 성대를 부드럽게 자극해서 울려대었던 그 목소리의 매혹이 이 애니메이션을 깊고 깊은 기억 속으로 침잠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결국 나는 이 애니메이션을 찾아냈다.또다른 검색어의 조합으로.거미가 주인공인 TV 애니메이션 영화.이런 식의 조합을 이미지로 검색했고,드디어 구글의 숱한 이미지들 중 내가 기억하는 당시 TV 속 거미와 가장 유사한 이미지를 찾아냈다.
이 거미.이리도 매혹적인 눈빛을 장착한 거미.
그러나 제목은 '거미집' 이 아니었다.샬롯의 거미줄 (Charlotte's web) 이었다.씨네 21 의 어떤 과거 기사가,1973 년에 만들어졌던 이 영화가 꽤 여러 번 한국의 방송에서 방영되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었다.그리고 샬롯의 거미줄은 꽤 유명한 동화였고 이 동화는 여러 번 영화화되기도 했다는 정보들이 인터넷 위에서 너울대고 있었다.2006 년에 만들어진 샬롯의 거미줄의 주인공은 다코다 패닝이었다는 사실 역시.
그러나 이 때쯤 내 의식의 흐름은 이미 애니메이션 영화 '거미집' 으로부터는 벗어나고 있었다.이젠 샬롯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거미의 우리 TV 더빙 성우가 궁금해지고 있었던 것이다.그 목소리로부터 비롯된 감각적 기억이 더욱 강렬해졌으며,도대체 그 성우는 누구였는가,그리고 그 성우의 목소리를 다시 한 번 들을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인가에 생각이 미치고 있었다.
1973 년 미국 애니메이션의 거미 샬럿의 목소리는 스타워즈 레이아 공주의 어머니인 데비 레이놀즈였다.2006 년 다코다 패닝이 등장했던 '샬롯의 거미줄' 의 거미 목소리는 다름 아닌 줄리아 로버츠였다.그렇다면 내 기억 속 거미 목소리의 주인공은 누구였을까..거미줄처럼 감아대며 뻗쳐 가는 글자 그대로의 웹 (WEB) 위에서 나는 또 무한한 궁금증에 빠져 갈 것이다.당장은 잊어버리겠지만 또 언젠가 찾아내서 이 글의 후속편을 쓰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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