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그램 유저이긴 하지만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어쩌다 텔레그램에 가입하게 되었는지도 지금은 가물가물한데, 아마 근혜와 명박 정권을 지나며 일반적으로 우리가 사용하는 SNS 역시 그들의 감시망에 놓여있게 되느니 뭐니 하며 불안감이 높아지던 그때였던 것도 같다.그러나 가입해 놓고 잊어버리고 만 사이트가 한 둘이 아니듯 역시나 텔레그램 역시 기억 속에서 사라졌었다.
어쩌다 다시 텔레그램을 다시 다운로드 받게 되었는지도 그 계기 역시 모호하다.언제나 그렇듯 매우 우연적이며 찰라적인 뇌 속 변덕 때문이었을 것이다.또한 가을 날의 아른함과도 연관이 있었을 것이다.그런데 그 가을, '그' 텔레그램으로부터 메세지가 날아들었다.
-잘지내고있지!!곧보자 비아그라준비허께
000 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이 맞춤법이나 띄어쓰기와 전혀 상관없는 전언을 날려 왔다.그 이름은 어쩐지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 것도 같고 완전히 모르는 사람인 것도 같은데,거기다 비아그라라니 (나는 비아그라 유저가 아니다) ,만약 이 메신저가 내가 아는 사람이라면 나를 놀려대려고 보낸 게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불행인지 다행인지 내겐 이런 넘들이 많다)
-누구신가요?
이렇게 할 수 밖에.
- 00이여.
충청도 사투리의 대답.
그 때 바빠져서 난 텔레그램을 닫고는 이 대화 자체를 잊어먹었다.
그로부터 15일 후 그는 다시 연락을 취해 왔다.나는 도대체 누구냐고 물어볼 수 밖에 없었다.그가 짧게 대답했다.
- 옛날네애인
모든 음절을 붙여쓰기 하는 건 여전했다.나는 그와 속사포 같은 대화를 나눴다.
- 다른 사람 잘 못 연락하신 것 같음
- 다음달당신보러올라감니다
-ㅋㅋ 올라오긴 어디서 올라와.장난치지 말고 정체를 밝혀라
팔계 네 이놈
팔계란 내가 그 상황에서 이런 장난을 치고 있다고 생각했던 후배의 별명이다.게다가 이 낯모르는 메신저가 사용했던 이름은 (물론 그 이름이 그의 진짜 이름일런지도 모른다 아니 아마 진짜 이름일 것이다 ) ,팔계의 이름 세 음절과 무려 두 음절이 동일했다. ( 팔계야 너를 오해해서 진짜 미안하다..)
그러나 그는 꿋꿋했다.
- 아직못다이룬우리사랑년말대행사치룹시다
그의 붙여쓰기야말로 꿋꿋했다.
- 그러자 연락해라.전화번호는 기억하냐?
팔계 본 지도 오래 되었다고 생각하며 나는 그를 초대하고 싶어졌었다.
- 어찌잊겠어요 곧보게요
그가 약간의 띄어쓰기를 시도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나는 대꾸했다.
- 넌 요새 어디 있니?
- 가을중심에있어요
자꾸 그의 띄어쓰기가 신경 쓰이고,이 녀석이 낮술을 먹었나 싶기도 하면서 나는 조금 재미가 없어지기도 했다.
- 니가 요즘 좀 이상해졌구나.ㅋㅋㅋ
- 가을타고요 보고파요
-이젠 겨울이야.춥다고.어쨌든 제가 모르는 분이 분명합니다만.ㅎㅎ
그러나 그는 굴하지 않았다.
- 보시면알거예요
당연하지.보면 알지.
- 본명을 밝히시오
그러나 급조된 이름이 배달되었다.
- 최달순
실소가 터져 나왔고 퇴근 시간이 되었으므로 나는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몇 시간이 지난 한밤중,그가 다시 말을 걸었다.
-이제진정사궈봅시다
살아가는동안이제균진씨랑소통하며살고싶네여
균진씨는 또 뭐야.팔계야,이넘아 그만 해라.이러면서 나는 그냥 잠이 들었었다.
그러나 다음 날 저녁 다시 텔레그램의 알림이 울렸다.
-쉬시나여
쉴 수 없는 야간 당직 날이었다.일이 끝나자 자정이었는데,너무 피곤해서라도 나는 그에게 답을 보냈다.
- 달순씨 저는 균진씨가 아니랍니다
- 그럼종균씨나여?
균진이도 아니고 종균이도 아닌 나는 무언가 찜찜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대화를 이어나갔다.
- 한 자도 못 맞추네
- 당신은내이상향이니까요
그제서야 나는 그가 내 후배 팔계가 아닐런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그러나 피로함이 결국 발목과 손목을 잡았다.
- 뭐야 이분 아직 포기 안했네 차단의 시간이 가까워 옵니다
그리곤 당직실 침대에 누웠다.언제 나를 찾는 전화가 올런지 알 수 없는 밤 아닌가.
다음 날 오후 그가 다시 내게 메세지를 보냈다.
- 가을에중심에서서 균진씨사랑해요
결국 균진과 종균 사이에서 그는 균진씨를 선택했나 싶었지만,몹시 바빴으므로 나는 저녁 늦게야 답을 보냈다.이젠 오해를 풀어야겠다 싶었기 때문.
- 그 균진인가 하는 인간은 어디 사는 사람이에요?
그는 답이 없었다.나는 약 5 분 정도 상황을 생각했지만 이 정도면 되었겠지 싶기도 했다.그러나 그는 자정 넘어서 답을 보내 왔고 난 그 답을 읽지 못했다.
- 화성이예요
다음 날 오후에야 화성에 산다는 그에게 답을 보냈다.
- 경기도 화성이 되었든 태양계 화성이 되었든 전 가 본 적도 없는데,이렇게 저한테 계속 글을 보내시는 이유가 뭔가요
보내면서,좀 너무 했다 싶기도 했다.
그의 대답.
- 제텔레그램에친구균진이가등록되어지금껏보내고있는데이거도깨비장난인가요 진정균진씨아니에여?
- 네 저는 균진이란 사람을 모릅니다
그리고 덧붙였다.
- 사실 저는 제 남자 후배가 장난치는 줄 알았어요.걔 별명이 팔계거든요.
팔계야,다시 한 번 미안하다.
그는 다음 날 내게 질문했다.
- 어케내것과연결됐나요
띄어쓰기는 여전.
- 글쎄 그 이유를 어떻게 알겠습니까.저도 궁금한 데요
그리고 그와의 몇 일에 걸친 대화가 끝났다.그리고는 팔계에게 전화를 걸었다.팔계는 매우 무관심하다는 듯 심드렁하게 간단하게 요약된 내 얘길 들으며 웃기만 했다.(팔계야 혹시 이 글을 읽는다면 이런 일이 있었던 거였다.)
6개월이 흐른 어젯밤,그는 이번엔 카톡으로 동영상 하나와 짧은 글을 보내 왔다.
글은 오월신록 네 글자.(띄어쓰기는 여전)
그리고 동영상엔 정말 신록이 가득한 숲 속 카페에서 파전과 막걸리를 마주한 두 사람의 남자 모습이 올라와 있었다.
아마 그 중 하나가 문제의 균진씨인 모양이다.내게 동영상을 보낸 그가 휴대폰으로 그 둘의 모습을 찍고 있는 가운데,균진씨는 막걸리를 들이키며 신록을 찬양하고 있었다.마주 앉은 그의 친구는 계속 동영상 촬영을 신경 쓰며 살짝 살짝 렌즈를 외면하고 있다.음,역시 숲은 진리야,라고 생각하며 나는 그 두 친구의 숲과 사진 찍는 그의 심정을 헤아려 본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다시 답을 보낼 수 밖에 없다.
- 카톡을 잘 못 보내신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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