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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밑바닥

신의 영화들/정체에 대해 떠들기

by 폴사이먼 2018. 4. 13.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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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들어 나는 점점 내 기억력을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깜빡 깜빡하고 있다(?)는 소리가 아니라 나이가 들어갈수록 내 기억이 보이는 정확도를 의심하게 되었다는 말이다.스스로 이렇게 말하긴 뭐하지만 사실 나는 내 기억력이 꽤 우수하다고 생각해 왔다.별별 아무 것도 아닌 일들을 다 기억해내는 통에 그렇게 생각해 왔던 것도 같다. 나는 지금도 초등학교 1학년부터 대학 시절까지 나를 거쳐간 모든 일련번호들을 다 기억한다.담임선생님의 이름들도 다 기억한다.웃기는 일이지만 교장선생님의 이름까지 다 생각난다.게다가 우리 집이 소유했던 모든 차량들의 번호와 우리가 살았던 모든 집들의 전화번호를  지금도 다 기억해 낼 수 있다.집 주소도 마찬가지다.심지어 1970년대 후반부터 살아왔던 모든 아파트들의 동과 호수 역시 기억할 수 있다.뭐 이 정도 가지고 내 기억력에 신뢰를 보낼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내 두뇌에 내장된 장치들이 특히 숫자로 이루어진 기호에 대해 강세를 보이고 있다는 얘기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내 기억력의 범위가 꼭 숫자에 국한되는 것만은 아니다.아주 오래 전의  tv 드라마들과 만화영화들,거기에 나왔던 배우들과 캐릭터들의 이름들로 내 기억력의 범위가 확장될 때도 있다.특히 내가 좋아했던 배우들의 장면에 이르러서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기억력을 보인다.예를 들어 백윤식의 장면들이 있다.그가 지금처럼 강력한 조연 내지 유니크한 주연 배우로 활약하기 이전,즉 kbs의 탤런트로 활동하던 무렵의 꽤 많은 장면들을 나는 기억한다.그는 주로 단막극들 -예를 들어 문학작품을 단막극 형태로 극화했던 <TV문학관>-의 주인공으로 나섰는데,내 기억 속에는 꽤 많은 그의 장면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청준의 소설 <이어도>라고 생각되는 소설을 극화한 어떤 <TV 문학관>의 에피소드에서, 그는 험하고 높은 파도가 몰아치는 배 위에서 술에 취한 채 바다를 향하여 뱃ㅈ전에 기댄 채 몸을 구부리고 있었다.그시절 그는 언제나 유약한 지식인 역할을 주로 맡았는데,그 드라마에서도 아마 소설가 역할을 했을 것이다.내가 기억하는 장면에서,그의 옆을 지나가던 늙수그레한 선원 하나가 그에게 나지막한 경고의 말을 던진다.

-선생님 파도가 높아서 위험합니다.상어들이 많아요..


뭐,이런 종류의 대사였을 것이다.

내 기억은 맞을까? 글쎄다.알 수 없다.대사의 정확성 자체는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하지만 나는 그 장면의 이미지 만큼은 거의 정확하게 기억한다.밤이었고 갑판이었고 백윤식은 바바리 코트를 입고 있었다.무섭도록 거친 바다의 이미지가 거기에 있었고 위험하게 몸을 구부린 주인공의 상체가 거기 있었다.


내 기억은 맞을까? 구글로 검색했다.

그런데 세상에,<이어도>의 주인공은 백윤식이 아니었다.노주현이었다.


(이어도의 주연 배우는 노주현과 이경진이었다)


가장 기본이 될 원작 소설의 이름 마저도 내 기억은 오작동을 일으키고 있었다.그래서 하염없이 검색의 바다로 빠져 들었다.도대체 내가 보았던 그리고 기억하고 있는 백윤식의 선상 장면은 어느 작품에서 등장하는 것일까.그러나 백윤식은 <TV 문학관>의 단골 주연배우였다.수많은 작품에서 그는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었다.지금은 꼴통으로 인식되고 있는 작가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에서 부터 심지어 김동리 원작의 <을화>에 이르기까지 그는 많은 작품에서 자신의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매우 매우 찾아내기 어려웠다.



( <을화>에서는 장미희가 백윤식의 엄마인 무당 역할로 등장하고 있었다.김지미 정도가 했어야 할 역할인데 말이다)


그밖에 <잃어버린 사람들><돌의 초상><목선><묵시><설야><저문 강><언젠가는 다시 만나리> <황홀한 귀향><어두운 기억의 저편> <죄와 벌><어머니의 성>

<해녀 뭍에 오르다-이 작품의 여주인공은 무려 오수미가 맡고 있었다> (겨울의 초상><거미의 집><신들의 주사위> 등등등 그가 등장했던 작품들의 리스트는 줄줄이 이어지고 있었다.


계속 이어진 검색 끝에,나는 내가 기억하는 백윤식의 그 장면이 아마도 <막차로 온 손님들>의 한 장면이었던 걸로 결론지었다.물론 증거는 없었다.추측에 불과했다.

끝맛이 씁쓸했다.왜 나는 백윤식과 그의 배 위의 장면과 이청준의 <이어도>를 연결시켰던 걸까.내 기억 어느 곳에서 그들을 잇는 오작동이 일어났던 것일까.게다가 그 오작동은 꽤 오랫동안 기억의 늪 안에 똬리를 틀고 앉아 거의 확신의 수준으로 자신의 존재를 확정시키고 있었던 건 아닌가.도대체 내 기억의 밑바닥엔 무엇이 존재하고 있는 것인가.혹시 아무 것도 없는 것은 아닌가.기억의 자의성이 수많은 오류들을 자의적으로 만들어내 전혀 다른 세계 하나를 연속적으로 만들어내고 있는 건 아닌가.


(아버지의 친한 친구인 소설가 이청준,그리고 소년 시절 읽었던 그의 전집,그리고 이어도의 '도'-그러니까 섬-가 백윤식의 배 위 장면을 연결시켰을 거라고 나는 추정했다.물론 이것도 추정에 지나지 않지만 말이다)


이것이 어제 벌어진 일이다.


그런데 오늘 아침 또다른 기억의 오작동이 내 머릿속에서 사건을 일으켰다.나는 아침 출근 시간에 우연히 Rickie lee Jones의 노래 ,<rainbow sleeves>를 듣게 되었다.뭔가 익숙하면서도 또 완전히 낯선 노래였다.그러나 순간 나는 내가 들었던 Rickie lee Jones 의 첫 노래 제목에 rainbow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었다고,또 그 무지개에 대한 내 기억은 확실하다고 생각했다.그러니까 이 노래는 내가 들었던 리키 리 존스의 첫 노래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그러나 차 안에 흐르는 그녀의 노래는 또 분명 그 때 들었던 그 멜로디가 아니라는 생각도 머릿속을 스쳐갔다.그렇다면 도대체 최초의 그 노래는 무엇이었을까.


점심시간, 이번엔 유튜브를 통해서 Rickie lee Jones의 노래를 검색하기 시작했고 그녀의 노래 중 제목에 rainbow가 들어간 노래는 <rainbow sleeves>하나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나는 이 노래를 여러 번 반복해서 들었다.아침에 들었던 것처럼 낯설지는 않았다.어쩌면 이 노래가 문제의 '첫 노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리고 점점 바닥을 보여가는 내 기억력을 한탄했다.그러다가 이번엔 이 노래와 비슷한 어떤 노래와 혼동과 착각을 일으킬 수도 있겠다고도 생각했다.그 노래는 jennifer warnes의 one more hour였다.




이 노래의 어떤 분위기가 rainbow sleeves의 어떤 분위기와 그 주파수를 같이 한다고 나는 느꼈다.그리고 어쩌면 이 노래에 대한 선호가 rickie lee jones의 rainbow sleeves의 어떤 지점과 조응하면서 리키의 무지개를 예의 '첫 노래'라고 생각하게 만들었을 수 있다고 추측할 수 있다.그러나 또 rainbow sleeves가 실제로 내가 들었던 rickie lee jones의 첫 노래였을 가능성 역시 상존한다.


즉 문제는 내 기억의 세계인데,또 내 기억의 인식 패턴의 문제인데,사실 그 밑바닥에 도달해 보면 기억력의 정확도 자체가 완전히 의미가 없어지는 시점과 공간이 존재할 수도 있겠다는 과히 기분을 좋지 않게 만드는 또 하나의 설명 역시 또 하나의 가능성으로 대두될 수 밖에 없다.


기억의 세계는 그야말로 자의적인 세계다.또 얼마든지 통제를 벗어나 스스로의 세계를 창조해낼 수 있는 장소다.따라서 우리는 절대로 스스로의 기억을 완전히 믿고,자신의 기억력에 근거해 과거의 사건을 강변하고 재단해서는 안된다.자기 자신을 방어하려는 본능,그리고 자신의 욕망이라는 또다른 요소들이 기억의 세계에 잠입할 때,기억은 어떤 때 완전히 오작동을 일으켜 거짓 기억을 진실로 믿게 되는 일까지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기억의 오작동과 자의성.

이제는 서울시장 선거 레이스에서 사라져 버린 정봉주의 예를 가장 선의로 해석해 보려 할 때 동원될 수 있는 용어들이다.그의 기억이 오작동 되었거나,어떤 자의적인 메커니즘을 통해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게 되었다고 말이다.물론 이것은 그를 향한 가장 선의의 해석이 될 것이다.그러나 지금도 그의 결백을 믿으며 그를 탄핵한 언론과 그에게 성적인 공격을 당했던 여성을 비난하는 지지자들의 경우는 다르다.그들은 그저 믿고 싶은 것을 믿었을 뿐이다.그것은 기억과는 상관 없는 욕망의 문제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봉주와 대척점에 서 있었던 피해 여성의 경우와 그 여성의 기억을 그대로 믿고 정봉주을 저격했던 언론 프레시안의 경우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그 여성의 기억 역시 오작동을 일으켰을 가능성은 전혀 없는 것일까? 프레시안의 담당 기자는 도대체 어디까지 피해 여성의 기억을 믿었던 것일까.또 그들은 그들이 가해자라고 믿었던 정봉주가 기억을 되감아 자신의 과거를 되짚어 볼 여유를 얼마나 주었던 것인가.그들의 고발 행태 역시 기억의 세계 특유의 불완전성에 비추어 보면 지나치게 성급했거나,가해자로 생각되는 사람의 방어권을 지나치게 제한했던 것은 아닌가?


정봉주 문제가 혼선에 혼선을 거듭했던 것은 어느 정도 기억의 복원력에 관한 문제와 상관이 있다.이 사건에 관계한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기억 세계의 불완전한 작동에 당황했고 혼란에 빠졌다.(물론 이것은 정봉주를 가장 선의로 해석했을 때 가능한 얘기다) 결국 모든 문제를 매듭지은 것이 신용카드 조회기록이라는 사실은,우리의 진실이 어떤 종류의 기제에 가장 결정적으로 의존하느냐 하는 문제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가능하게 했다.


기억.겸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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