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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리오:암살자의 도시>-완벽함과 허전함.

신의 영화들/FILM FLOATING

by 폴사이먼 2016. 3. 29.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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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함.


<그을린 사랑>으로 알려진 드니 빌뇌브의 <시카리오:암살자의 도시>는 거의 완벽한 영화다.기술적으로 완벽한 fc 바르셀로나의 티키타카 축구를 스크린 위에서 보고 있는 느낌이다.2중 3중의 함정과 함의를 영화 곳곳에 심어놓고 있는 노련하면서도 심장을 쫄깃거리게 만드는 내러티브들과 로저 디킨스의 감연한 카메라 워크,세계를 쳐다보는 운명적 세계관들을 상징하는 세 개의 캐릭터가 만들어내는 단순하면서도 굵직한 대립과 투쟁은 폭력과 전쟁 그리고 권력관계의 현대적 상황과 맞물리면서 극한적인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완벽하다.에밀리 블런트와 조쉬 브롤린과 베니치오 델 토로야 말로 빌뇌브의 MSN (메시-수아레즈-네이마르)이다.


허전함


그러면서도,이 영화의 영화적 완벽함은 또 다른 완벽한 허전함을 향하여 달려간다.그것은 물론 영화 내내 관객의 시점이 되어준 케이트,또한 시민들간의 무언의 합의 -생명존중과 인도주의 그리고 준법적 질서- 를 상징하는 여주인공 케이트의 결과적 몰락 때문이다.관객-케이트는 살인과 마약이라는 범죄의 그 어느 요소 하나에도 완성된 응징을 가하지 못한다.오히려 케이트는 조쉬 브롤린이 연기하는 매트가 상징하는 사실상의 국제 질서 - 미국이라는 거대국가가 마약이라는 국제 범죄를 컨트롤하는 이이제이의 법칙- 에 옴쭉달싹하지 못하고 무너지는 데다가,사적 복수를 감행하는 알레한드로 역의 베니치오 델 토로에게도 그 어떤 저항의 몸짓 조차 취하지 못한다.




그러한 케이트의 상황은 바로 극장에 앉아 꼼짝도 못하고 장면과 장면들을 바라보고 있어야 하는 관객들의 처지에 정확하게 조응해,그들의 허전한 실망감은 배가되고 또 배가된다.즉 우리가 아는 상식적인 세계의 질서,우리가 유지해야 한다고 모두가 합의한 공권력 사용 방식의 절대적 모순을 적나라하게 목격하게 만드는 것이다.그러면서도 우리는 저 공권력 적용의 현실적인 상황에 동의할 만한 목소리들 역시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매우 잘 알고 있고,우리의 운명이 끝나는 그 날까지도 이런 상황에 대한 혁명적 교정이 쉽지 않으리라는 사실 때문에 더 절망에 빠져들 수 있다.


그래서 이 영화는 공권력에 대한 환상,정의를 수호하는 법 집행자라는 공권력에 대한 관념에 균열과 혼란을 가져 온다.그리고 그런 혼란스러움이 바로 허전함의 이유인 것이다.



물론 현실이,우리가 아는 세계가,당연히 그런 질서와 체제 하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여태 모르고 있었느냐는 비아냥 섞인 반론 역시 가능하다.맞다.우리 체제의 승자들은 알레한드로나 케이트가 아니라 맷이다.(물론 맷도 하부에 놓여 있을 뿐이다) 케이트가 발걸음 하나 잘 못 옮기면 알레한드로가 된다.교과서적 정의란 없다.2년 전 남해 바다에서의 처참한 사고와 그 후에 벌어진 일들이 그 사실을 쓰라리게 증명한다.


그러나 적어도 이 영화는 헛된 위로나 거짓 섞인 사건들을 지어내지는 않는다.영웅적인 에피소드를 섞어서 관객과의 공모를 이끌어 내지도 않고 ,그렇다고 거만하고 높은 위치에서 관객을 계도하려 하지도 않는다.또한 차분하고 조용하게 상황을 관조하려 하는 것도 아니다.오히려 완벽한 영화적 스킬과 결론부의 허전함을 연결하는 방식을 통해,다시 말해 관객의 감정을 들었다 놓는 서사의 급경사를 통해 현실을 두뇌 깊숙한 곳에 각인시키는 효과를 노린다.물론 그 효과는 절망이지만..



이제 남은 것은 알레한드로다.사적 복수 이외에는 세상을 교정할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는 전직 검사.어쩌면,..생각의 시작은 바로 이 지점,그의 위치와 시각이어야 할런지도 모른다.이런 시작이야말로 불안함이다.21세기의 호흡곤란,불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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