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영화는 끝을 향하여 달려간다.그러나 그것은 필름의 시간이 끝나간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처음엔 엔딩 크레딧을 향하여 달려간다고 쓸 뻔 했으나,지금 돌이켜보니 이 영화엔 엔딩 크레딧 조차 없었던 것 같다.마지막 장면이 정지하면서 그냥 영화도 끝나버렸던 것 같다.이상하게 마지막 기억이 전혀 없다) 영화가 끝나고 극장 상영관의 불이 켜졌을 때에도 아무 것도 정지하는 것이 없었다.그저 실내에 빛이 들어왔을 뿐이었다.끝났다는 기분은 전혀 들지 않았었다.
마지막 장면이 거의 15분에 달하는 롱 테이크여서 그랬을 수도 있을 것이다.(거의 정신이 혼미해졌던 것이다.) 번쩍,하고 눈이 떠지면서 꿈에서 깨어나는 상황과도 유사했다.그러나 꿈은 아니었다.영화는 분명히 끝났다.
= =
어쨌든 이 영화 <떠돌이 개>를 매우 단순하게 정리하자면 대충 두 가지 방향으로 정리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첫번째는 한 가족의 이야기다.영화 속 시간의 뒤섞임이나 혼란,그리고 의문의 세 여성의 존재에도 불구하고,엄마 혹은 아빠가 먼저 집을 나간 후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되는 남은 가족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이 영화의 상황을 뭉뚱그릴 수 있는 것이다.여기에 버려진 건물,의미를 알 수 없는 벽화,개들의 왕으로서의 한 여인,배추 씹어먹기 등의 이미지가 관객에게 새로운 층위의 정감-이미지 (질 들뢰즈 식으로 말한다면) 와 궁극적인 두뇌 내부의 자유를 선사하는 영화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또 다른 의미는 이 영화를 만든 차이밍량의 조국 대만과 관계가 있다.비가 새는 건물,검은 벽지에 그려진 하얀 눈물로서의 빗자국,아파트 광고 피켓을 들고 권력과 유리된 민중을 노래하는 리캉생,딸에게 건물의 역사를 들려주는 엄마의 장면(대학살이 벌어졌던 대만건국과정을 은유하고 있다고 가정한다면),그리고 건물 벽에 붙여져 있거나 바닥에 나뒹구는 쟝제스나 역대 총통들의 초상화를 돌이켜 본다면 대만 사회 자체에 대한 알레고리로도 이 영화는 기능할 수 있다.물론 가능성이 매우 떨어지는 이야기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런 평범한 시각들은 결국 이 영화를 보는 관객을 압도하는 이 영화의 강력한 이미지들 ,그리고 다소 혼란스럽지만 결국 관객의 의표를 찌르고 마는 이 영화의 시간 개념들에 의하여 은근한 폄하를 겪을 수 밖에 없다.일반적인 여타 영화들과는 너무 다른,마치 설치 미술을 연상케하는 미쟝센과 시간을 거꾸로 돌리고야 마는 최후의 장면들(영화 전반부엔 엄마의 부재를 그리다가 영화 후반부엔 엄마야말로 가족을 지키려 했었다는 반전을 가능케 한) 때문에라도 그런 인상은 짙어지고 만다.
하지만 이 영화는 고작 거기에서 멈추는 영화가 아니다.그랬다면 이렇게나 오래도록 이 영화의 어떤 이미지들이 내 마음의 한 켠을 점령할 수 없었을 것이다.그것은 역시 이 영화 최후의 장면들이 준 어떤 감각이자 충격 때문이었을 것이다.
#8. 벽을 응시하다.쭈욱.
<떠돌이 개>의 마지막 장면은 엄청나게 단순하다.두 사람 -첸샹치가 연기하는 세번째 여인 (혹은 엄마)과 리캉생 (아이들의 아빠) - 이, 두번째 여인이 개들에게 먹이를 주고 쭈그려 앉아 오줌을 싸던 버려진 건물의 한 공간에 등장하여,그들 앞에 놓인 벽화를 바라보기만 하는 장면이다.이 장면에서 그들은 정말이지 벽화를 '응시한다','바라보기만 한다' 관객이 주의할 만한 그 어떤 행동도 하지 않는다.대사도 음악도 음향도 없다.내부 공간의 빛의 변화 조차 없다.그렇게 약 15분의 시간이 흘러간다.
카메라는 거의 고정되어 있었고 관객은 벽화를 바라보는 여인을 계속 바라보게 된다.(여기서 내 기억이 문제가 되는데,이 장면에서 문제의 벽화가 등장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가 불분명하다.등장했다면 카메라의 패닝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고 등장하지 않았다면 벽화의 구체적인 모습은 이전 장면들을 통해 관객의 기억을 환기했다는 얘기가 된다) 이 응시가 진행되는 동안,처음에 남자는 여인의 뒷쪽에 서 있다가 달팽이 보다 느린 속도로 여인에게 다가와서 그녀의 목덜미에 머리를 기댄다.여인은 눈물을 흘린다.이게 전부이다.
리캉생은 한참이나 저렇게 첸샹치의 뒷쪽에 서서 바라만 보고 있다가
(여인이 눈물을 흘릴 때쯤 여인을 뒤에서 안는다.매우 자신없는 듯한 동작이었다.결코 위로의 동작이 아니었다.거의 애원에 가까웠다)
저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저 미니멀하고도 미니멀한 동작들,그리고 저들이 바라보는 벽에 그려진 그림.이것이 이 장면의 전부를 구성하기 때문에,당연히 관객은 당황스러워 하고 답답해 하고 놀란다.그러나 관객은 결국 어떤 선택을 해야만 한다.저 둘 사이로 틈입해 들어가거나 ,혹은 함께 관객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벽화를 바라보거나, 저 둘,혹은 그들 중 한 사람에게 감응하거나,아니면 자신 만의 벽화를 만들어 내거나..어쩌면 이것이 저 장면의 의미이며 차이밍량이 관객에게 보내는 메세지인지도 모른다.관객 스스로의 영화를 만들어보라는 것.그래서 스스로 이 복잡다단하고 혼란스러운 스토리를 정리해 보라는 것.
그렇다면 벽 전면에 그려놓은 그림..사실 이게 문제가 된다.세번째 여인은 벽화에 대해 정말 무한몰입하고,강한 흡인력을 느끼고,눈물을 흘리며 안타까워 한다.벽에는 도대체 어떤 그림이 그려져 있는가?
이것은 누군가가 인터넷 어딘가에 그려놓은 벽화의 스케치다.시냇물이 있고,물가에는 크고 작은 돌들이 있고,그 뒤엔 숲이,그리고 멀리로 산들이 보인다.글자 그대로 자연이다.다시 묻자.이것은 무엇인가?
이 그림에 넋을 잃어버렸던 사람은 또 있었다.두번째 여인 역시 이 그림의 흡인력에 꼼짝달싹 못했었고,이 영화의 포스터 중 하나엔, 영화에서는 그림을 쳐다보는 장면이 나오지 않았던 아빠가 벽화를 바라보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기도 하다.
ㄱ.벽 위의 그림,벽 속의 세계
즉 벽 위에 그려진 저 그림은 이 영화의 핵심 중 하나이다.벽화의 존재가 이 영화를 평범함 이상으로 격상시킨다.벽화는 버려진 건물 내부에 사는 등장인물들을 매혹시키고 안타깝게 하고 슬프게 하는데,이 그림과 감정들을 관객이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이 영화는 결정적으로 달라진다.
(자,그런데,
여기서 '관객'이라는 단어를 그냥 버리기로 하자.그리고 '나는'이라는 말을 말머리에 내세우기로 하자.이제 이 영화는 철저히 개인의 레벨로 분화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벽화를 응시하는 두 명의 여인들을 보았다.한 번은 (두번째 여인의 경우) 여인의 등 뒷쪽에서 여인과 벽화를 함께 보았고,다른 한 번은 벽화를 보는 세번째 여인을 정면으로 보았다.(그녀의 남편이 그 뒤에 있었다) 처음에 보았던 벽화의 인상이 두뇌 어딘가에 남아,바로 내 기억 속의 벽화를 세번째 여인이 쳐다보고 있다고 느꼈었다.
이 영화의 여인들이 벽을 쳐다보며 내게 전달했던 감정은 벽화 속 세계에 대한 강렬한 끌림과 매혹이 그 첫번째다.그러나 단순한 유혹이 아니다.'지금 현재' 그들이 몸담고 있는 세계에 대한 결정적인 혐오와 거기서 비롯되는 탈출의지,그리고 어떻게든 자신의 존재 양상을 변화시켜 보겠다는 변천에의 의지가 한꺼번에 폭발적으로 표현되어 유혹의 외피로 나타난 것이다.벽화 속의 산과 강과 들은 벽 바깥의 세계,즉 버려진 콘크리트 건물,백화점과 수퍼마켓,광고판을 들고 서 있어야 하는 혼잡하고 거센 바람이 몰아치는 거리의 대척점에 있다.그들은 벽 속으로 탈출하고 싶어하고 벽화 속 세계를 이상향처럼 생각한다.(물론 이것은 전통적인 동양적 세계관일 수 있다) 버려진 건물의 금간 벽들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눈물이야말로 현실 세계의 상징이었으며,그들은 모두 그 눈물과 빗물을 떠나려 하는 것이다.(어쩌면 비 오는 밤 아빠가 아이들을 데리고 보트를 타고 탈주하려 했던 곳도 벽 속의 세계일 수 있다)
다른 감정들 역시 존재한다.가고 싶지만 가지 못하는,자기 실존의 한계를 느끼는 안타까움과 눈물 역시 벽화 앞 여인들이 벗어날 수 없는 굴레들 중 하나다.(눈물은 이 영화의 요소요소에서 분명한 한계와 절망을 나타내고 싶을 때 어김없이 출현한다) 어쩔 수 없는 삶의 유전인 것이다.그러나 <떠돌이 개> 는 진전된 여정을 보여준다.눈물과 절망 안에 머무는 사람과 떠나는 사람을 구분하는 것이다.
이런 구분은 벽 안의 세계로의 진입이 결국 개인마다 매우 다른 탈주선을 지닌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가령 세번째 여인의 경우,나는 결국 여인이 자신이 살던 세계를 떠났다고 생각한다.맨 마지막 장면에서 매혹과 안타까움과 눈물이라는 벽화에 대한 3단계 감정을 표현해냈던 그녀는 맨 첫 장면 - 잠든 아이들 옆에서 빗질하던 여인 - 에서 존재의 변환을 이루어냈고 결국 벽 속으로 들어갔다.빗질은 진입을 위한 준비이자 마지막 인사였던 것이다.
그래서 결국 존재의 변환이란 탈주이자 실종이며 소멸이자 죽음이다.
이 영화의 여인들은 이 모든 것을 다 해냈다.반면 아빠는 아이들과 함께 남겨졌으며 남겨진 자로서의 삶을 살아간다.이것은 아빠가 탈주자로서의 충분한 에너지를 가지지 못했다는 의미 보다는 삶의 운명과 타이밍에 의해서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다고 나는 생각했다.
좀 더 나아가서 나는,이 영화에 나오는 의문의 세 여인들은 동일한 사람의 변화된 세 가지 모습이라고 생각했다.첫번째 여인은 존재의 실종 직전의 모습이며 세번째 여인은 실종의 과정에 이르렀던 여인의 전사들을 고스란히 표현한 모습이다.
(벽 속으로 진입하기 직전의 모습이라고 여겨진다.사각거리는 빗질은 여인의 마지막 인사이자 다른 세계를 위한 준비였다.진입의 문턱에서 여인은 모든 감정에 무심해졌다.무감해졌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나는 존재는 어느 순간 그렇게 감정의 파고를 잃는다고 생각한다)
(남편의 애원 섞인 포옹 따위 역시 어쩔 수 없이 무시되어질 수 밖에 없는 어떤 과정이다.떠날 준비가 된 사람을 붙잡을 필요는 없다.무의미한 일이다)
그러나 두번째 여인은? 이 여인은 좀 다르다.
두번째 여인의 존재 양상을 생각하면서,나는 벽 속의 세계 안으로 진입해 들어간 사람들의 운명에 관해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비관과 낙관이 공존했다.내세를 믿는 종교인들의 태도처럼 벽화 속 세계가 극락이고 낙원이고 천국이라면 낙관 쪽에 속한 운명이겠지만,벽 바깥에 사는 나로서는 도저히 그 곳의 정체를 알 길이 없었다.가 보지 않으면,떠나보지 않으면,죽어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비관적 가능성 역시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만약에,만약에 말이다..벽화 속의 세계에도 버려진 건물들이 존재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벽화 속 산과 강과 강가에 어느 날엔가 지진과 홍수가 일어나고 또다른 눈물과 비탄이 생성되고 또다른 실존의 악순환이 주기적으로 생산된다면 어떻겠는가.왜 사람들은 이런 가능성을 아예 무시하고 이상향 만을 설정하는가.왜 사람들은 지금 세계를 떠나면 더 좋은 세계,더 밝은 세계,더 질서 있는 세상이 나타나게 될 거라고 상상하는 건가.이런 상상의 근거는 무엇인가.무슨 배짱이란 말인가..삶의 영원성과 순환성 속에서 악과 자멸이 완전히 소거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인간들의 낙천성의 근거는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말도 안되는 과도한 해석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어차피 손가락질 할 사람이 별로 없을 거라고 생각하니 맘대로 말하게는 된다) 그러나 나는 어느 순간 두번째 여인이 벽 안의 세계로 진입했다가 다시 벽 안쪽에서 바깥 쪽으로 돌아온 사람이라고 결론을 내렸다.무슨 논증이 필요한 사항은 아니라고 생각한다.이것은 논리 보다는 감각에 가깝다.
어떻든 두번째 여인은 그 버려진 건물에 살고 있다.그러나 그녀는 그 건물에 드나드는 떠돌이 개들의 왕이다.개들은 그녀에게 순종하고 그녀는 개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준다.그녀는 떠나기 이전과는 다른 존재가 된 것이다.하지만 이제 그녀는 비와 눈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아빠의 발작때문에 폭우 속에서 위기에 처한 아이들을 그녀는 침착하게 구해낸다.낮의 그녀는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제공하고 먼 거리에서 보살핀다.예전 생활로 귀환할 수는 없지만 여전히 옛 생활의 그림자를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벽 속 세계에 대한 동경을 잃어버리지 않았다.그녀는 여전히 벽화를 응시한다.물론 그 응시가 동경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회한이나 체득한 경험의 단순한 반추,혹은 앎 자체일 수도 있다.하지만 그녀는 건물과 벽화 그리고 가족과 연결되어 있다.그녀는 그녀들의 또다른 모습인 것이다.존재의 양상들..이것이 세 여인의 비밀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게 볼 때,이 영화는 탈주와 존재의 실종에 관한 제양상을 그려낸 영화였다고 나는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물론 나만의 결론,아무도 트집잡을 수 없는 절대결론이다.
모든 인간이 자신의 삶을 벗어나 탈주하는 것은 아니므로,이 영화는 예외적인,비전형적인 삶을 그려낸 영화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평범하게 사는 우리 역시 언젠가는 우리가 사는 건물을 버려진 건물로 파악할 수 있고,또 언젠가는 천장에서 눈물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고,또 언젠가는 우리 삶의 어느 공간에서 잊을 수 없는 벽화를 발견해낼 수 있다.그리고 기나긴 응시 끝에 '사라질' 수도 있는 것이다.우리는 소멸과 실종의 가능성을 매우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왜? 그것이 우리의 실존이니까..
ㄴ.유랑민과 정주민
이 영화를 보았던 10월의 그날밤,나는 건조한 깔끔함을 가진 해운대의 어느 모텔에서 이 영화에 관한 다음과 같은 메모를 썼었다.
-정주하는 사람들과 유랑하는 사람들의 실존에 관한,그리고 그 운명적 순환에 대한 가장 영화적인 기록.설치미술과 롱테이크,상징과 정치적 알레고리가 정교한 미적 감각으로 얽히며,미래의 영화장르까지 떠올리게 만든다
유랑과 정주.유랑하는 사람들과 정주하는 사람들에 관한 어떤 개념을 떠올렸던 것 같다.나는 버려진 건물 안에 있었던 사람들과 벽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유랑이라는 개념의 각 단계로 파악했었고,영화 말미에 정주하던 사람들이었던 그들이 유랑의 단계로 떠나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로 이 영화를 정리했었다.
그러나 지금,50일이 지난 지금,이 개념을 이 영화에 직접 적용하는 작업은 하지 않도록 한다.차라리 이 개념은 적어도 열 편 이상의 영화 텍스트를 가지고 다루어 봐야 할 내용이라고 여긴 까닭이다.그래서 미룬다...
그 밖에,리캉생의 배추 씹어먹기에 대한 단상을 이어나가는 것도 현재 체력이 다 했기 때문에 멈추기로 한다.아마 리캉생의 배추는 언젠가 다른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언급될 것이 틀림없다.그냥 배추가 아니었던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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