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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년 영화 2. <홀리 모터스>.레오스 카락스

신의 영화들/이백 편의 영화

by 폴사이먼 2013. 12. 18.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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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스 카락스

 

그의 영화를 맨 처음 보았을 때 그의 이름은 레오스 카락스가 아니라 레오 까라였다.20세기 우리나라 극장에 첫 개봉된 그의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을 소개하던 우리나라 언론에 그의 이름은 레오스가 아니라 레오였고 카락스가 아니라 까라였다.그래서 한동안 내 입에 맴돌던 그의 이름 역시 레오 까라였다.

 

조조상영이었고 호암아트홀이었다.하마터면 처남이 될 뻔 했던 후배와 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좀처럼 꺼지지 않는 천정의 실내등을 흘겨 보며 조조라고 무시하냐,며 농담을 주고 받았었다.그러나 <퐁네프의 연인들>은 그야말로 이미지의 향연이었다.거기엔 그때까지 내 눈을 잠식해왔던  영화들과는 약간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우리 언론의 과대평가 만큼이나 감동받지는 못했지만 이 영화를 본 후로 나는 눈에 안대를 한 여인이 스크린에 나올 때마다 줄리엣 비노쉬를 떠올리곤 했다.드니 라방이 지하 터널에서 불쇼를 벌이던 장면은 너무나 많은 영화와 광고에서 패러디되고 인용되어서 거의 식상할 지경이 되기도 했지만,그  식상함이 레오스 카락스를 손상시켰던 것은 아니었다.

 

(이 불꽃놀이를 기억하시는 분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폴라 엑스>를 끝으로 사라졌다.<소년 소녀를 만나다>를 집에 틀어박혀서 본 후에 보았던 <폴라 엑스>는 별로였지만 사라진 레오스 카락스가 가끔 그리웠었다.비노쉬의 안대도..

 

 

 

 

 그가 올해  <홀리 모터스>를 들고 다시 나타났을 때,나는 자연스럽게 내 옛 기억을 되살리지 않을 수 없었고 이번에야말로 조조상영을 보면 안되겠구나,하는 말도 안되는 생각을 했었다.그리고 어느 토요일 오후 광주극장엘 갔다.(그러나 이 극장은 조조상영 자체가 없다..)

 

홀리 모터스

 

 

 

13년이 지났어도 레오와 레오스는 같았고 까라와 카락스는 동일했다.그는 여전히 영화를 만들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이 영화,,생각 보다 훨씬 걸작이었던 것이다.어찌 보면 매우 단순한 스토리 라인을 지니고 있었지만,그 안에서 자꾸만 세계 전체를 향하여 의미망이 뻗어가고 있었고,씬 하나 하나의 완결성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영화였다.그 어느 미쟝센에도 소홀하지 않았고 가끔씩 거의 이거야말로 작품이구나,하는 화면이 눈 뒷쪽을 향하여 침투해 들어왔다.

 

드니 라방의 연기는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링컨>과 더불어 올해 최고의 연기였지만,라방은 데이 루이스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괴물이었다.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자신의 캐릭터에 완전히 동화되면서 캐릭터를 거대한 실체로 통합시키는 스타일의 괴물이라면,드니 라방은 자신을 갈래갈래로 분해하여 수많은 인물군을 창조하여 그 의미와 이미지를 관객의 면전을 향하여 던져버리는 스타일의 괴물이었다.

 

영화를 보고 난 내 머릿속은 이미지와 의미들로 가득 들어찼고 집에 오는 차 안에서 얽혀 있는 의미망을 이리저리 떼어내고 분리하느라 즐거웠다. 참 holy한 영화라고나 할까..

 

3.영화에 대한 영화,필름을 넘어서는 필름.

 

이 영화엔 세상의 거의 모든 영화가 등장한다.그리고 세상의 모든 배우들이 다 들어 있다.레오스 카락스는 영화를 만들지 못했던 13년 동안 만들고 싶었던 영화들을 모두 이 한 영화에 우겨넣은 듯 싶었다.그는 그렇게 하기 위하여 매우 단순한 구조 하나를 창안했다.

 

인상적인 프롤로그 (감독 본인이 직접 출연하는 이 프롤로그는 이 글의 말미 쯤에 따로 얘기할 것이다)가 지나고 나면,중년을 훌쩍 넘긴 드니 라방이 자크 타티의 영화에나 나올 듯한 모더니즘 가득한 주택에서 가방을 들고 나와 그를 기다리는 리무진을 향해 걸어간다.어쩐 일인지 부속건물엔 총을 든 경호원이 서 있고 드니 라방의 뒤에도 BMW 차량 하나가 그를 호위하듯 뒤따른다.

 

제복을 갖춰 입은 에디뜨 스쿱 (퐁네프의 연인들에서도 운전사로 나왔던 그녀는 무려 1937년생이다)이 문을 열어주고 뒷자리에 올라탄 드니 라방은 분주하게 이곳저곳에 전화를 걸며 그날의 업무를 시작한다.아마 무슨 금융 전문가인 듯 하다.총을 구해야 한다는 수수께끼 같은 통화 내용이 포함되긴 하지만.

 

그러나 리무진은 그냥 리무진이 아니다.리무진은 영화의 공장이며 오스카(드니 라방)를 위한 분장실이다.그는 리무진 안에서 그날 주어진 대본을 읽고는 그 캐릭터에 맞추어 분장한 다음 일정한 약속에 의하여 리무진이 멈추는 장소에 내려서 금방 읽은 시나리오에 쓰여 있는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다.가령 리무진이 갑자기 세느 강변 어느 도로에 내려서면 걸인 노파로 분장한 오스카가 리무진에서 내린 후 구걸을 시작하는 식이다.그리고 구걸 행각이 끝나면 다시 리무진에 올라타 정해진 다른 역할 연기를 수행하기 위해 다른 지점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이렇게 드니 라방은 아홉 개가 넘는 배역을 리무진을 타고 돌아다니며 연기한다.단 하루만에 말이다.

그 캐릭터들의 리스트를 작성하자면 다음과 같다.

 

1.걸인 노파

2.모션 캡쳐 전문 배우

 - 그러나 이 역할을 하는 와중에 드니 라방은 쌍절곤 시연을 포함한 무술 액션,러닝 머신을 뛰어가며 벌이는 총격전,거의 현대 무용을 연상시키는 3D 애니매이션용 퍼포

    먼스를 선보이기 때문에 단순히 하나의 배역이라곤 볼 수 없다.감탄스러운 드니 라방의 퍼포먼스에 애니매이션까지 등장하는데,짧은 시간 안에 거의 수 편의 영화를 포

   함시키고 있다.

 

 

 

 

3.지하 도시에서 출현한 광인

에바 멘데스가 공연하는 이 에피소드는 옴니버스 영화 <토쿄>에서 이미 그가 연출한 바 있는 이야기를 확장시킨 것이다.지하 세계에서 출현한 광인이 사진 모델을 납치하여 지하 세계에 유폐시킨다는 이 이야기는 <델리카트슨>에서 <매트릭스> 그리고 <킹콩>까지  많은 영화들을 연상시키는데,미국 고전 영화스러운 음악들이 흐르는 가운데 진행되는 때로는 끔찍스럽고 때로는 아름다운 화면들은 결국 '아름다움'에 대한 집착,미의 의미에 대한 시사를 관객에게 던져준다.

 

4.딸의 거짓말에 절망하는 중년의 택시 운전사

 

그리고 이 역할이 끝난 후 다시 리무진에 올라타 정해진 대본에 쓰여진 '중간 휴식 시간'이라는 글자를 본 순간 나타나는

 

5.어코디언 연주자

 

올해의 영화음악이라고 해야 할 장면이다.

 

 

 

 

 

6.중국인 킬러

드니 라방은 이 에피소드에서 중국인 킬러로 등장하여 '테오'라는 이름의 남자에게 총을 쏜다.쓰러진 남자에게 다가간 라방은 그의 머리카락을 자르고 면도하여 자신의 형상과 똑같은 얼굴로 만드는데,그 순간 살아난 테오가 그에게 칼을 휘둘러 두 사람은 나란히 쓰러진다.이윽고 두 사람 중 한 남자가 일어나 비틀거리며 리무진 쪽으로 다가가고 리무진 운전사 셀린느가 그를 부축하는데,일어난 쪽이 테오인지 아니면 배우 오스카인지는 불분명하다

 

7.또 하나의 암살 시도자

 

그러나 이 충격적인 장면 이후,명배우 미쉘 피콜리가 영화를 만드는 '회사'측에서 파견한 중간 관리자로 등장해서 '영화의 죽음'에 관한 담론을 오스카와 나눈다.미쉘 피콜리는 오스카에게 '지친 듯' 보인다며 도대체 무엇 때문에 지금까지 연기를 하고 있느냐고 묻는다,또한 변화된 영상 문화환경 -어디에나 눈이 있다- 을 얘기하며 으름장을 놓기도 한다.

 

그때 오스카는 갑자기 차를 세우라고 외치고는 총을 들고 노천 카페에 다가가 카페에 앉아 있는 자기 자신-맨 처음으로 리무진에 올라탄 자기 자신- 을 총격하는 장면이 나온다.즉 오스카가 오스카를 죽이는 것이다.그러나 물론 이것도 영화다.총은 가짜 총이고 피도 가짜 피다.그래서 이 캐릭터가 오스카가 연기해야 할 시나리오에 포함되어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파악하기는 힘들다.그리고 이러한 암살 시도가 시나리오에 있는 내용인지 그렇지 않은지도 파악하기 힘들다.미쉘 피콜리도 어디론가 사라진다.

 

8.죽음을 앞둔 부호

다음 역할은 죽음을 앞둔 노인이다.임종 직전 침상에 누운 그에게 그가 사랑했던 조카딸이 등장한다.그런데  조카딸 역시 정체가 불분명하다.처음엔 조카딸이 아니라 여성 간병인이었는데,발에 깁스를 한 간병인이 옆방으로 걸어가 옷을 벗고 거울에 자신의 전신 속옷차림을 한 번 비추어본 후 옷을 갈아입고 조카딸로 변신하는 것이다.즉,그녀 역시 배우의 한 사람인 것이다.

 

 

 

 

그 역할을 끝낸 후 오스카는 한때 그의 연인이었던 카일리 미노그와 마주친다.카일리가 탄 리무진과 오스카가 탄 리무진이 충돌 사고를 일으키는 것이다.배우인 그들이 재회하는 것이다.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20분.느와르 분위기와 애절함이 섞이면서 카일리 미노그가 노래를 부른다.what are we.카일리나 오스카나 스스로의 정체성을 제대로 모르는 것이다.

 

 

 

 

 

9.집으로 돌아가는 가장.

 

마지막 역할은 집으로 퇴근하는 가장이다.그러나 이 가장은 오스카의 상황과 일치한다.오스카 역시 그 날의 일을 끝내고 퇴근하는 것이다.아침에 출근했던 집과는 전혀 다른 공동주택.가족들은 죄다 침팬지들이다.(혹성탈출을 연상하라는 건가..) 오스카는 리무진 운전기사 셀린느에게 그 날의 일당을 받고 다음 날 만날 약속을 한다.

 

이렇게,아홉 개로도 또는 열 두개로도 생각할 수 있는 인물들을 드니 라방은 단 한 틈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연기한다.이 많은 에피소드들은 그 자체로도 완벽한 완결성을 가지고 있다.밀도 높은 에피소드들이 유려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에피소드들이 단순히 영화들의 연결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만약 섬처럼 떨어진 영화들이 드니 라방의 빛나는 퍼포먼스에 의해서 반사광을 얻는 구조였더라면 이렇게 이 영화에 대한 글을 쓰고 있을 필요 조차 없었을 것이다.이 에피소드들은 모두 한 몸이다.섬이지만 군도다.하나의 유기체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유기체적 영화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영화는 드니 라방의 단순한 원맨쇼가 아니다.<홀리 모터스>속 영화'들'은 병렬식으로 놓여있는 것이 아니라 유기체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드니 라방이 연기하는 오스카 역시 한 인물의 삶 전체를 조망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가령 드니 라방은 점점 변화한다.죽음과 끝을 향해 가는 것이다.영화 자체의 죽음에 대한 함의와도 연결이 되는 이 죽음들은 여러가지 형태로 나타난다.첫번째 죽음은 오스카가 중국인 킬러를 연기할 때 등장한다.그런데 이 중국인 킬러는 암살의 대상을 살해한 다음 자신과 똑같은 형태로 그를 분장시킨다.테오라는 이름을 가진 피살자를 오스카 자신과 똑같은 외양으로 만드는 것이다.그러나 갑작스럽게 살아난 테오가 다시 오스카를 칼로 찌르고 두 사람은 함께 쓰러진다.쌍둥이처럼 닮은 두 사람이 누워 있게는 것이다.이때 둘 중 한 사람이 일어나 원래의 리무진으로 다가가는데 이 사람이 테오인지 오스카인지 알 길이 없다.관객들은 약속된 내러티브의 기호 때문에 그를 오스카로 생각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한 번의 죽음을 경험한 오스카는 완전히 지쳐 있다.중국인 킬러 이전 '딸의 거짓말에 절망하는 아버지'역할을 하면서도 완연히 화가 나고 지쳐보이던 그는 죽음 이후 그 지침의 강도가 더 심해진다.그때 갑작스럽게 등장한 '회사'의 중간관리자 미셀 피콜리가 '지쳐보인다'고  말을 건네며 두 사람은 '영화의 죽음'을 얘기하기 시작한다.오스카는 '과거의 카메라'가 그립다고 얘기하며 지금의 카메라는 너무 작아져서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고 말한다.모든 것이 영상으로 변해버린 현대문화의 상황 속에서 영화라 불리는 예술의 특별함이 없어졌다는 뜻일 거다.

 

그러자 중간관리자가 그에게 질문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 때문에 (영화를) 계속하느냐고'.

 

오스카의 대답하는 영화 연기의 이유는 '연기의 아름다움 '이다.연기 자체의 미학,영화 자체의 미학이 그로 하여금 피로와 분노를 무릅쓰고 일을 지속하게끔 만든다는 것이다.그리고 자신의 분노를 발산하려는 듯 갑자기 차를 멈춰세우고 노천 카페에 앉아있던 자본가(영화를 좌지우지하는 자본 그 자체?)에게 총을 발사한다.또 하나의 죽음이 발생하는 것이다.물론 이 죽음 역시 가상의 죽음이다.육체의 죽음이 아닌 영화와 영화자본의 상징적인 죽음이다.그래서 오스카 역시 죽지 않는다.자본가의 경호원이 오스카에게 총을 쏘고 그는 총탄에 맞아 쓰러지지만 리무진 운전사 셀린느의 부축에 의하여 또 다시 일어나는 것이다.

 

죽음과 죽음,분노와 분노,아름다움과 아름다움.<홀리 모터스>의 각 에피소드들은 하나의 심상에 의하여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죽음들만 연결되어 있는것이 아니다.오스카가 얘기했던 아름다움은 세번째 에피소드인 지하에서 등장한 광인의 행동과 일맥이 상통한다.광인은 묘지에서 꽃을 먹고 사람들을 밀치고 돌아다니다가 아름다움의 이상형인 에바 멘데스를 발견하고 그녀를 납치하여 지하세계 어느 곳에  가둔다.그녀의 옷을 찢어서 새로운 옷을 만들어 그녀를 장식하가까지 한다.이때 그의 성기는 한없이 발기하고 발기한 성기를 꽂꽂이 세운 채 그는 에바 멘데스의 무릎에 몸을 눕힌다.그녀는 자장가를 부르고 그는 잠이 든다.

 

 

 

이 장면 말고도,아름다움을 소유하기 위한 광끼.아름다움에 대한 <홀리 모터스>의 내러티브와 이미지들은 이곳저곳에 숨어 있으면서 가끔 나타나 존재감을 발한다.

 

에피소드들 사이의 연결은 그것 말고도 또 있다.

딸의 거짓말에 분노하여 절망하는 아버지의 에피소드는 죽음을 앞두고 조카딸을 만나는 노인의 장면들과 연결되어 있다.

 

 

그는 딸에게 '너 자신이 되라'는 벌을 내린다.거짓말에 대한 벌이다.

 

그런데 침대에서 임종을 앞둔 부자 노인 역시 '거짓말하지 말라'고 말한다.이 말이 자신의 조카딸을 향한 말인지는 분명치 않다.그리고 그는 계속 수수께끼 같은 혼잣말을 해댄다.

- 고의로 하진 말았어야지 ,테오(테오는 중국인 킬러로 변신했을 때 그가 죽인 갱단원이다)

- 난 혼자이고 그들은 어디에나 있어 (연기자인 그와 자본가인 회사 사람들 사이를 지칭하는 듯도 하다)

- 미치게 되는 계획이 있어 (당연히 지하세계광인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마치 삶의 마지막에 자신의 모든 배역들을 돌아보는 것 같다.그런데 그때 침대맡에 앉아있던 사람은 조카딸이 아니라 간호사 혹은 간병인이다.그녀는 일어서고 다리의 깁스 때문에 절룩거린다.그리고 다른 방으로 가서 겉옷을 벗고 전신 거울에 자신의 속옷 차림을 비춰본 다음 다른 옷으로 갈아입는다.그리고 다시 노인에게 다가왔을 때 노인은 그녀를 조카딸이라고 생각한다.다른 종류의 연기가 시작된 것이다.그리고 그들의 대화는 어린 시절 거짓말을 했던 딸과 아빠의 대화에 맞닿아 있다.

 

노인은 '정말 왔구나'라고 말하며 그녀의 존재를 반가워하며 조카딸은 '거짓말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즉 '자기 자신이 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노인의 반대를 뿌리치고 사랑을 찾아갔었다고 말한다.그녀는 벌을 이행했고 노인은 그녀를 기다렸던 것이다.노인은 '사랑받았다는 걸 기억하라'는 말을 남긴 후 죽는다.조카딸은 딸이며 노인은 아버지라는 뉘앙스를 풍기는 것이다.

 

그리고 연기를 끝낸 노인은 침대에서 일어서고 방을 나간다.그들은 서로의 이름을 묻고 다시 만날 것을 기원한다.연기이자 영화인 것이다.

 

이런 겹침과 겹침이 의혹을 가중시키는 것은 아니다.차라리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의 우연과 겹침을 상기시키면서 상황의 실재성을 강화하는 쪽으로 작용한다.우연적 겹침이 영화의 유기적 실재성을 보충하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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