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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영화 7. <다른 나라에서>- 존재의 닻

신의 영화들/이백 편의 영화

by 폴사이먼 2012. 12. 21.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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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난번 글에서 <북촌방향>에서 나타나는 시간의 교란과 빈틈을 유준상이라는 소시민적 지식인의 실종 혹은 일탈,그리고 시간이라는 권력에 대한 작은 저항으로부터 비롯된 그의 자연발생적인 욕망 때문이라고 얘기했었다.물론 이것은 그냥 가설이다.내 생각을 굳이 맞다고 주장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그로부터 또 하나의 질문이 튕겨나올 수 밖에 없다.만약 내 가설이 맞다면 시간의 교란,시간의 혼란은 그 영화 <북촌방향>에서 영원히 해결되지 않고 끝나버리는가,시간의 두 라인은 봉합되지 못한 채,마주 보고 달려오는 두 기차나 혹은 한 방향으로 달리는 기차가 의지하는 두 개의 철로선처럼 영원히 만나지 못하고 끝나는가,하는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끝난다면,유준상이라는 그 영화의 캐릭터 하나는 시간의 혼란을 몸에 담은 채 영화적으로 사라지고 영원한 실종을 맞게 될런지도 모른다.(물론 그렇게 된다고 해서 우리의 우주적 질서에 균열이 오는 것은 아니다.즉 <멜랑콜리아> 식의 멸망이 다가오는 것은 아니란 뜻이다) 다만 개인의 실종이 있을 뿐이다.그래서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결국 영화를 만든 사람의 시간관이다.그가 이런 사태를 용인할 것이냐,말 것이냐 하는 문제..

 

나는 홍상수가 그 문제에 답을 내놓았다고 생각하고 그 대답 역시 영화 내부에 놓여 있다고 여긴다.영화의 마지막 날.유준상은 또다시 북촌에 도착한 듯 보인다.그는 헌법재판소 앞에서 또다시 김상중에게 전화한다.(역시나 전날 밤 그들이 이미 만났다는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그는 마치 처음으로 김상중과 통화하고 있는 듯 대화한다).그리고는 또 여러 사람들을 만난다.영화제작자들과 배우와 음악가..그리고 마지막에 고현정이 등장한다.(고현정은 홍상수의 전작에 출연했었다)

 

 

 

 

유준상은 처음에 고현정을 예전부터 알았던 영화 관계자라고 착각하는 듯 하지만,그녀는 자신이 그냥 취미로 사진을 찍는 사람이라고 말하면서,유준상의 사진을 찍겠다고 말한다.이때 유준상은 뭔가 망설이는 듯 하며 '원래 사진 찍히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말하지만,결국 엉겁결에 포즈를 잡게 되고,고현정의 셔터 누르는 소리가 영화의 공간을 가차없이 메꾼다.찰칵,찰칵,찰칵,...

 

이때 카메라는 유준상의 표정을 클로즈업하는데,그야말로 형언할 수 없는 얼굴이다.뭔가 당황해하는 것 같기도하고,슬퍼하는 것 같기도 하며,괴로워하기도 하는 것 같은 모습,어딘가 붙잡힌 듯 불안해하는 모습이기도 하다.그러나 카메라의 포착은 여지없다.그야말로 '캡쳐(capture)'된다.

 

 

 

나는 이 영화의 이러한 엔딩을 시간 교란에 대한 홍상수의 대답이라고 보았다.사실 사진술이란 이중적이다.사진은 순간에 대한 포착이며 시간에 대한 정지작용이다.즉 어떤 순간을 그 시간 안에 가두는 것이다.<북촌방향>식으로 얘기해보자면,그 동안 이어왔던 시간의 두 라인을 한 방에 포획해서 통합시키고 가두는 것이다.강제로 말이다.즉 시간의 양 선로가 멈춰지며 그 흐름을 붙잡아둘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에 대한 유준상의 반응은 슬픔이다.더 이상의 자발적인 실종은 어렵게 되었다는 것,우연히 만난 고현정의 카메라에 의해서 자신의 '시간 놀음'이 멈춰지고 말았다는 것..그러나 홍상수는 이 마지막 사진 찍기를 통해 <북촌방향>과 유준상의 시간 속에서의 영원한 실종을 막아냈다.시간은 멈춰지고 인물은 어떤 자리,어떤 시간으로 고정되어지고 영화는 끝나고 엔딩 크레딧은 올라간다.

 

말하자면 고현정의 마지막 사진찍기는 <북촌방향>이란 영화에서 시간의 닻이다.이렇게 어느 우연한 바닷가에 닻을 내림으로 해서 배는 방황을 끝낸다.(역시 그렇다고 우길 생각은 없다).그러나 사진,사진술의 함의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사진은 다분히 영화의 선배이며,영화란 어찌 보면 사진을 빠르게 이어붙인 것이다.따라서 고현정의 첫번째 셔터와 두번째 셔터 사이에서도 분명한 시간 차가 발생한다.그녀가 300번 내지 30000번의 셔터를 누르게 된다면 그 안쪽의 시간들만으로도 '영화'가 발생될 수 있다.즉 셔터가 '닻'의 기능을 하지 않을 가능성도 여전히 있다.

 

그러나 여기서 끝내기로 한다.닻 (anchor) 특유의 휘어진 고리를 생각하면서 말이다.

 

다른 나라에서 - 또 하나의 닻,존재의 닻

 

1)<북촌방향> 다음 영화인 <다른 나라에서> 에서도 홍상수 영화의 특징들이 고스란히 드러난다.반복,차이,캐릭터들의 궁상스러운 찌질함,질투,사랑,등등등..을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다.

 

2) 홍상수 영화의 사랑스러운 배우들인 문성근,정유미,윤여정 등에 대해서도 따로 언급할 필요가 없을 듯 하다.완전히 영화에 녹아든 배우들에 대해 무슨 얘길 할 수 있겠는가.다만 이 영화에 출연한 프랑스의 위대한 여배우 이자벨 위뻬르에 대해선 글의 말미에 약간 언급해야 할 것 같다.그녀의 연기에는 우리나라 영화의 여배우들에게서 잘 보이지 않는 연기 테크닉이 있다.(그렇다고 우리 여배우들에게 문제가 있다는 건 아니다.차이가 있다는 뜻이다)

 

 

 

 

가상,픽션,시나리오

 

이 영화는 영화의 시작부터 앞으로 펼쳐질 영화의 내러티브가 가상의 이야기라는 것을 분명히 짚고서 시작한다.즉 정유미와 윤여정 모자가 채무 때문에 도피한 전라북도 부안 모항의 펜션 '웨스트 블루'에서 쓴 시나리오-픽션이 이 영화의 얘기라는 것을 명시한다.

 

시나리오는 세 명의 앤을 가정한다.세 명의 서로 다른 프랑스 여인인 앤이 (이자벨 위뻬르가 세 명의 앤을 연기한다.) 이 펜션을 방문하고,그 후엔 홍상수 영화 특유의 일들이 벌어진다.이것이 극중 윤여정의 딸인 정유미가 쓰는 시나리오이다.

 

세 명의 앤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조금 있다가 얘기하자.사실 별 것 아닐 수도 있는 일들이다.그러나 <북촌방향>에서의 시간의 닻으로 이용되었던 고현정의 카메라처럼,또 흐름을 나타내는 시간의 표지자인 후배 여배우처럼 이 영화 <다른 나라에서>에서도 비슷한 기능을 하고 있는 상징들이 있다.그러나 앞 영화와 이 영화에서의 상징들의 기능은 매우 다르다.이것이 지금부터 내가 쓸 이 영화에 대한 글이다.

 

다른 나라로 향하는 열쇠인 우산과 존재의 닻으로서의 해상안전요원 유준상.

 

1.첫번째 앤

 

 나는 세명의 앤에게 다같이 벌어지는 비슷한 요소들 중의 하나로서 우산과 유준상에게 주목했다.우선 첫번째 앤.그녀는 프랑스에서 온 유명한 영화감독이며 한국의 감독인 권해효와 그의 아내 문소리와 함께 이 펜션에 투숙한다.

 

이 첫번째 앤이 권해효 부부와 식사를 한 다음 날(권해효는 앤에게 과거의 키스를 상기시키며 유혹했었다.그녀는 부드럽게 거부했다),그는 펜션 바깥으로 나서며 펜션에서 일하는 듯한 정유미에게 우산을 원한다.그리고 혼자서 우산을 들고 나간 다음,길을 지나는 할머니에게 그 지역의 볼거리라는 '등대'의 위치를 물어보지만 할머니가 그녀의 영어를 알아들을 리 없다.

 

혼자서 등대를 찾아나선 앤은 등대(light house) 대신 유준상이 연기하는 해수욕장의 안전요원(life guard)을 만난다.유준상은 근육질의 몸매를 드러내며 바다에서 수영을 마친 후 등장하는데,앤이 그의 수영하는 모습을 유심히 바라본 다음 둘은 대화를 나눈다.등대에 대한 이야기이고,이내 그들은 유준상의 텐트로 가고,거기서 유준상은 앤에게 자작곡을 들려준다.순진하고 낭만적인 유혹과 긴장이 그들 사이에 있다.

 

 

 

 

그러나 앤은  펜션에서도 일하는 유준상과 정유미의 즐거운 대화를 엿듣게 되고 그날밤 식사에서 숯불 시중을 드는 유준상을 차갑게 대한다.그리고 유준상에게 편지만을 남긴다.그리고 떠난다.편지엔 '아름답다'라는 말이 포함되어 있다.질투와 아쉬움이 있다.(물론 유준상은 프랑스어로 쓰여진 그녀의  편지를 해독해내지 못한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빌린 우산과 유준상이다.첫번째 앤은 우산을 빌렸고 유준상의 텐트엘 갔고 그냥 돌아왔다.

 

2.두번째 앤

 

빨간 원피스를 입은 두번째 앤은 한국에 사는 프랑스 남자의 아내인데,그녀의 정부인 영화감독과의 밀회를 위해 이 펜션에 온다.그러나 영화감독은 급한 약속 때문에 제 시간에 도착하지 못하게 되고,그녀는 하염없이 그를 기다리게 된다.

 

그런데 그녀는 펜션 안에서 잠을 자다가 두번 꿈을 꾼다.첫번째 꿈에서 그녀는 펜션 바깥으로 외출하게 되는 데,첫번째 앤과는 달리 정유미에게 우산을 빌리지 않는다.정유미와 대화도 하고 첫번째 앤과 동일한 상황에서 정유미와 함께 펜션 바깥으로 걸어나가는 데도 말이다.이 꿈 속에서 그는 영화감독 문성근을 만나 키스하지만,그 순간 다른 한국 남자가 나타나고 때마침 보인 안전요원 유준상의 뒤를 종종종 쫓아간다.그리고 꿈에서 깨어난다.

 

두번째 꿈에서도 그녀는 유준상을 만난다.유준상은 첫번째 앤을 만날 때와 동일하게 바다에서 수영하다가 해변으로 뛰어나와 앤과 대화를 나눈다.그러나 이것도 꿈이다.(여전히 그녀는 우산을 들지 않았다)

 

깨어난 그녀는 바깥으로 나와 이번에는 정유미에게 유산을 빌린다.그리고는 길을 걷다가 우산을 길가에 숨긴다.(정말 희한한 일이 아닌가) 그리고는 유준상을 만난다.그리고 첫번째 앤이 유준상과 나눴던 대화와 유사한 대화를 나눈다.그리고 텐트를 향한다.텐트를 가지고 싶다고 앤이 말하자 안전요원은 '가지시라'라고 말한다.(이 영화에서의 텐트는 유준상의 존재 그 자체일 수도 있다)

 

여기서 영화는 다시 해변가로 나가고(좀 뜬금없다) 그곳에서 앤은 문성근과 만나서 키스한다.그러나 그녀는 키스하다 말고 문성근의 뺨을 두번 때린다.왜일까,

 

 

 

 

가정1) 그가 늦게 도착한 데 대한 보복?

가정 2) 이번엔 꿈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려는 동작?

가정3) 유준상에 대한 욕망,(텐트로 들어가지 못한 )이 제지당한 데 대한 화풀이?

 

다 맞다.이때 안전요원은 망원경으로 그들의 키스를 보고 있는 듯 하다.그리고 한숨을 내쉰다.그도 앤에 대한 욕망을 가졌던 것일까?

 

어쨌든 우산의 소유여부에 따라 꿈 속의 앤과 현실의 앤의 유준상에 대한 태도와 결과가 달라졌다.이것만은 분명하다.즉 우산을 가진 다음에야 현실의 유준상을 만난 것이다.즉 우산을 가지지 않은 앤은 해상안전요원 유준상과 현실적인 '관계'와 욕망을 가지지 못한다.단 첫번째 앤은 유준상의 텐트에서 그에게 노래를 받았고 두번째 앤(우산을 길가에 숨긴)은 유준상 대신 문성근과 키스하고 유준상은 그런 그녀를 망원경으로 보며 한숨을 내쉰다.

 

3.세번째 앤

 

그리고 정유미의 시나리오엔 가장 중요한 세번째 앤이 등장한다.이 앤은 한국 여자에게 남편을 빼앗긴 프랑스 여자이다.그녀는 절에서 스님으로 나오는 김용옥을 만나 대화를 나누고 펜션에 돌아온다.그런데 이때 절에서 이미 '우산'이 등장해 있다.즉 그녀는 이미 우산을 가졌으므로 유준상을 만날 자격을 갖는다.

 

그런데 그녀는 오히려 나중에 정유미를 만나서 '우산을 잃어버렸다'고 말한다.욕망으로,또 다른 세계로,다시 말해 다른 나라로 들어갈 열쇠를 잃어버린 것이다.그럼에도 그녀는 결국 유준상을 만나게 되고 그와 소주 병나발을 분 다음 결국 그의 텐트에서 그와 섹스한다.(정사씬이 나왔다는 뜻이 아니다.그녀는 심하게 코를 고는 유준상의 몸 아래에서 깨어난다)

 

그리고 그녀는 화면에서 없어지고 그녀를 찾아헤매는 김용옥과 윤여정이 등장한다.외국 여자를 보지 못했느냐는 질문에 해상'안전'요원 유준상은 '못봤다'고 말한다.그리고 홀린 듯 앉아 있다.꿈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나는 아직 앤과 안전요원 사이의 정사가 꿈인지 현실인지에 대해서 판단을 유보하고 있다)

 

앤은 걷는다.그리고 두번째 앤이 숨겨놓은 우산을 찾아낸다.당연하다는 듯 말이다.그리고는 우산을 든 채 어딘가로 떠난다.그 뒷모습은 매우 가볍고 경쾌하며,마치 다른 세계로 향하는 듯 새롭다.그녀는 다른 차원의 세계로 실종되는 것이다.

 

다시 우산과 안전요원

 

다시 말하지만 우산이 없으면 안전요원 유준상을 만날 수 없다.우산은 열쇠다.단 세번째 앤은 우산을 잃어버렸다.그러나 한 번 우산을 가졌던 그녀는 유준상과 섹스하고,잃어버렸던 우산을 찾아낸 다음 새로운 세계,새로운 나라로 떠난다.세번째 앤이 두번째로 쓰게 된 우산은 그러므로 언제나 열쇠다.즉 이 영화의 우산은 '다른 나라'로 들어가는 출입구인 것이다.

 

그러나 안전요원 유준상의 문제가 남는다.나는 그의 존재야말로 <북촌방향>의 시간의 닻과 같은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단,그는 시간의 닻이 아니라 '존재의 닻'이다.근육질의 남자이지만 어딘가 맹하게 보이고,또 그렇게 행동하는 그는 그러나,세 명의 앤들에게는 낯선 나라의 매혹이다.그는 '당신을 보호해 주겠다'라고 얘기하기도 하고 'this is a song for you'라며 앤을 위한 노래를 부른다.앤들이 그를 만나면 언제나 섹슈얼한 긴장관계가 형성된다.

 

 

 

 

그러나 모든 앤이 그와 섹스를 나누는 것은 아니다.첫번째 앤은 자신의 질투 (정유미와 유준상의 사이를 의심하는) 때문에 실패하고,두번째 앤 역시 문성근의 존재 때문에 실패한다.그러나 세번째 앤은 다르다.하지만 그녀 역시 유준상을 떠나 새로운 세계로 진입한다.

 

그렇다면 안전요원은 그녀들의 욕망의 투사점,그리고 지향점이라는 얘기일까? 그것이 다일까? 그렇지 않다.그에게는 다른 존재의미가 있다.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항 해수욕장이라는 공간 자체의 의미까지 사라진다는 것이다.그가 없다면 이 영화는 그저 다른 나라로 들어온,즉 펜션으로 놀러온 다양한 사연을 가진 외부인들의 사랑 놀음에 그치고 만다.그러나 안전요원 유준상은 모항 해변에서,마치 원래부터 그곳에 존재했던 것처럼 그려지고 있으며,외부에서 온 앤들은 강한 자기력에라도 끌린 듯 그에게 다가간다.

 

그러므로 그는 외부인인 앤들에게 유일하게 제시된 '현지에서의 변수'이다.즉 그는 프랑스에서 '다른 나라'로 온 앤들에게 '또다른 나라'의 대표자이자,이 영화공간의 존재를 대표하는 '존재의 닻'이다.그가 없으면 이 영화는 성립하지 않는다.앤들은 그의 존재 주위를 회전하고 닻으로서 콱 텐트와 함께 그 땅에 박혀 있는 그와의 관계 형식에 따라 그녀들의 존재 방식까지 결정된다.

 

즉 그는 이 별의 자전축이다.또한 앤이란 행성들이 중심으로 회전하는 태양이다.그의 존재가 하나의 나라를 형성하는 것이다.그러나 세번째 앤에 이르러서 영화는 대반전한다.그 앤은 이 별을 경험한 - 안전요원과의 텐트 안의 섹스를 통해- 두번째 앤이 숨겨놓았던 우산을 찾은 후 (다른 나라를 향한 열쇠를 발견한 후) 새로운 나라로 떠난다.갑작스럽게 그녀의 뒷모습으로 줌인되었다가 다시 뒤로 물러나는 카메라는 그녀에 대한 마지막 인사다.

 

 

나는 이 엔딩씬에 참 감동했었다.그녀는 이제 실종을 두려워하지 않는다.스님과의 선문답을 통해,자신이 어리석다는 것,자신이 거짓말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자신의 비참한 삶에 대한 원인을 발견한 그녀는,이 나라를 완전히 경험한 후 새로운 세계를 향한다.즉 이 영화의 결론은 <북촌방향>의 가장 반대편에 있다.그녀는 시간과 공간 속의 실종을 두려워하지 않으며,자유롭게 길을 떠난다.

 

나는 이 엔딩에 이르러서 비로소, 홍상수 영화에서 처음으로 해방감을 느꼈다.그녀의 뒷모습에 담긴 자유로움에 감동했으며,그녀의 삶을 열렬히 응원하고 싶은 강한 열망을 느꼈다...

 

그리고 이자벨 위페르

 

이자벨 위뻬르라는 한 위대한 여배우의 퍼포먼스가 이 영화에 개성적인 향기를 부여했다는 사실을 덧붙이지 않을 수 없다.그녀는 세 명의 여인을 연기하면서 거의 비슷한 헤어스타일에 옷 색깔만 달리 하면서 외양의 차이를 만들지만,세명의 앤은 그 존재방식에 있어서 확실한 차이를 보인다.

 

예를 들어 첫번째 앤의 그 지식인적 고적함은 그녀의 피워올리는 담배 연기 하나만 가지고서도 완성된다.빨간 원피스를 입은 두번째 앤을 연기하며 그녀는 그 앤의 존재의 가벼움을 종종거리는 걸음걸이 하나만 가지고서도 능숙하게 표현해낸다.소주 병나발을 부는 세번째 앤은 절망과 쓴 삶을 딛고서 자유를 쟁취해내는데,마지막 뒷모습에서 피어나는 자유의 아우라는 아무나 만들어낼 수 있는 뒷모습이 아니다.

 

 

 

연기 방식의 차이겠지만,나는 한국 여배우들의 연기가 지나치게 감정적이고 감성적이라 생각한다.울고 소리치고 미워하고 사랑에 빠지기를 너무 자주 한다.강한 소음과 강한 감정을 관객에게 전달하는 것이 스스로의 임무라 생각하는 경향도 있다.물론 그것은 연출자와 작가에게 일차적 책임을 물어야겠지만 ,관객들 역시 그 책임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다.우리는 '강함'에 너무 약한 것이다.

 

그러나 위뻬르의 이 영화에서의 연기에서 강렬함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영리한 그녀는 동작과 말투,분위기를 제어하는 캐릭터 이해도,그리고 무엇보다 지성을 통해 1인 3역의 함정을 쉽사리 통과한다.부럽고 멋있는 여배우다.이자벨 위뻬르.

 

 

 

 

 

홍상수의 다음 영화가 기다려졌다.처음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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