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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돌이 개> PART 2 RAIN AND TEARS

신의 영화들/이백 편의 영화

by 폴사이먼 2013. 11. 29.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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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들의 왕

 

이때 여인 하나가 등장한다.그녀는 손에 플래시 하나를 들고  예의 건물의 복도를 걸어간다.영화 첫 장면에 나왔던 빗질하는 여인은 아니다.

(첫 장면의 여인이 아니라는 것은 이 여인의 머리칼  길이가 짧기 때문이다.물론 첫번째 여인이 머리카락을 짧게 잘랐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두 사람은 체형부터가 약간 다르다.하지만 영화 후반부에는 세번째 여인이 나온다.그녀와 이 여인의 헤어스타일은  유사하다 )

 

 

이 여인은 플래시 불빛에 의지하여  부서진 돌들이 깔린 복도를 능숙하게 걸어간다.손에 든 비닐 백 - 아까의 아빠도 음식이 담긴 비닐 백을 들었었으며 그 역시 플래시로 불빛을 비추며 건물 안을 전진한 적이 있었다 - 엔 무언가 먹을 것이 담겨 있다.언뜻 리등휘와 장제스의 초상화가 담긴 액자가 건물 바닥에 나뒹굴어 있다.(아까는 장제스의 초상화가 복도 벽에 걸려 있었지만 이번엔 다르다) 여인은 한없이 길게 뻗어있는 듯한 이 복도를 잘 알고 있는 듯 거침이 없다.그러니까 여인은 밤의 건물을 헤매고 있는 것이 아니다.여인에겐 건물 내부에 목적지가 있으며 그 곳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부산에 앉아있던 나는 저 여인을 보는 순간  사막의 동물들을 떠올렸었다.

 

사막의 동물들은 광대하고 어디가 어딘지 모를 듯한 사막의 거친 모래와 자갈길 사이에서도 신기하게 길을 찾아낸다.그들 역시 저 여인처럼 망설이지 않고 전진한다.그들은 사막에 나 있는 좁디 좁은 길을 잘 알고 있고 발과 배를 사용하여 그 길을 헤쳐 나간다.먼저 간 동물들 뒤로 또다른 동물들이 그 길을 따라가며 이로써 길은 점점 더 넓어지고 길 자체의 형태를 갖춰 나간다.(물론 바람에 의하여 길의 자취는 또 사라지고 만다) 그들 역시 저 여인처럼 전혀 길이 없어 보이는 환경 속에서 길을 만들어내는 것이다.즉  여인은 이 건물의 이방인이 아니라 입주민이다.이 건물을 임시 거처로 삼고 있는 3인 (혹은 4인) 가족과는 그래서 근본적으로 다르다.떠돌이라고 해도 다 같은 떠돌이는 아닌 거다.

 

여인이 당도한 곳은 어떤 사각 공간인데 거기엔 여러 마리의 개들이 흩어져 앉아 있다.(영화 제목 떠돌이 개가 연상되는 것은 당연하다) 여인은 머뭇거리지도 않고 개들 사이에 앉아 개들에게 먹이를 준다.개들 역시 그녀를 전혀 낯설어 하지 않는다.여인은 어느 순간 공간의 한복판에 앉더니 거기서 오줌을 싸기 시작한다.(대형마트의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았던 가족의 아들이나 갈대 숲 사이에서 숨어서 오줌을 쌌던 아빠와는 또 다르다) 마치 두목 개가 자기의 영역을 선포하듯.

 

그녀는 현재 그 공간의 지배자 - 개들의 왕 인 것이다.그녀는 인간이면서도 새로운 공간에서 새로운 존재-개 로 변한 것이며 그 세계에 이미 적응한 떠돌이인 것이다.

 

 그 사각형의 공간의 한 쪽 벽엔 거대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여인은 관객에게 뒷모습을 보이며 벽화를 정면으로 응시한다.정말 한참의 시간이 흐른다.여인은 손에 든 플래시로 벽화의 이곳저곳을 비추어보기도 하지만 그것은 탐색의 과정은 아닌 듯 싶다.오히려 응시를 위한 준비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그 어떤 종교적 의미라도 있는 듯 여인은 벽화를 한참이나 쳐다 보고 관객은 또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쳐다 보아야 한다.다시 롱 테이크다.당연히 관객의 눈은 그녀의 등으로부터 벽에 그려진 벽화의 그림 쪽으로 옮아갈 수 밖에 없다.차이밍량 역시 관객이 그 벽화를 바라볼 수 있도록 시간을 준다..그러나,관객의 눈엔 여인과 벽화 두 이미지가 한꺼번에 다 들어온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된다.

 

#4.바깥-폭우,구조,

 

그리고 영화는 갑자기 건물 바깥으로 나가버린다.마치 태풍이라도 부는 듯 강한 바람이 숲 속의 나무들을 후려치고 거세게 내리는 빗줄기들이 스크린을 메운다.나타나는 것은 아빠와 아이들이다.어찌된 셈인지,분명히 건물 안에서 잠을 청했던 가족이 바깥에 나와 있다.

 

 

 

아빠는 폭우 속에서 아이들을 보트에 태우고 어딘가로 가려 한다.그러나 뭔가 이상하다. 아이들과 아빠 사이엔 분명한 간극이 있다.비바람이 강하다고는 하지만 긴급한 대피를 필요로 할 정도는 아니며 아이들 역시 무언가 억지로 끌려나온 듯 당황해하는 인상이다.그러나 앞과 뒤의 설명이 전혀 없는 이 영화에서 이 장면의 의미를 미리 예단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여러 가지 가능성들이 떠오르는 것이다.건물의 침수 가능성,아빠의 정신적인 혼란이나 착란의 가능성,무언가로부터의 도주 혹은 어딘가를 향한 탈출..

 

그런데 이때 아까의 여인 (이제부터 이 여인을 두번째 여인이라고 부르자) 이 등장한다.그녀는 플래시를 든 채 숲 어딘가에서 나타난다(문제는 이 플래시인데 이것 때문에 내가 지금 등장한 여인을 두번째 여인이라고 가정하는 것 같기도 하다).무언가를 찾는 것 같다.

 

 

 

그런데 여인이 등장한 숲은 가족이 보트를 타고 탈출하려는 숲과 동일한 장소로 보이지만 약간의 차이가 있다.(어떤 차이인지 아시겠는가?)

 

 

 

그 다음 여인은 아이들을 구조한다.이때 아빠는 이미 온데간데 없다.어디론가 없어졌다.그런데 여인은  비옷을 입고 있다.여인의 숲 장면에서 나타나지 않았던 강한 비 역시 다시 등장한다.숲이 바뀐 것이다.비가 오는 숲에서 오지 않는 숲으로,그리고 다시 비 오는 숲으로..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가? 그냥 간단하게 아빠가 어느 순간 정신의 착란을 일으켜서 아이들을 보트에 태우고 어디론가 가려 하는 것을 두번째 여인이 구조한 것으로 보면 되는 건가? 그렇다면 비옷을 입지 않고 숲속을 돌아다니던 여인의 장면은 일종의 '옥의 티'인 것일까? 그러나 다른 가능성,여인이 숲에서 플래시를 들고 다녔던 저 장면은 전혀 다른 시간대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볼 수 있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왜 갑자기 그런 장면이 삽입된 것인가..

 

비는 분명히 가족이 잠들기 전에도 내렸다.아이와 아빠는 비옷을 입은 채 건물로 돌아왔고 두번째 여인 역시 건물 안에서 비옷을 입은 채 걸어가고 있었다.그러나 어느 순간 비옷을 입지 않은 여인의 장면이 끼어든 것이다.왜 이 건물 주위의 시간들은 이렇게 복잡한 층위에서 진행되는 것인가.왜인가.떠돌이 생활 자체가 시간 개념을 달리 하는 어떤 행성에 불시착한 것과 동일한 것인가?

 

물론 또 하나의 가능성.기억의 착란을 일으킨 사람은 다름 아닌 글을 쓰는 나라는 가설도 가능하다.(이런 가능성을 무시하지는 말자)

 

이 이상한 시간의 뒤엉킴.

 

차이밍량은 관객에게 어떤 판단과 선택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장면들이 순간적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지만 말이다.

 

하지만 또 하나의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아빠는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건가,또 아빠는 아이들을 데리고 어디로 가려고 했던 것인가,또 하나 왜 아빠는 저리도 다급하게 저 건물에서 탈출하려 했던 것인가.영화는 또다시 설명도 없이 대답들을 관객에게 요구한다.즉 요구의 방향이 거꾸로 된 것이다.관객이 이유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밍량이 관객에게 설명을 요구하는 것이다.

 

자,영화를 또 앞으로 돌리자.저 가족이 보트 탈출을 시도하기 전,두번째 여인이 등장하기 전으로 말이다.

 

 

 

매우 평범하게 잠 잘 준비를 하고 있는 장면이다.아이들과 아빠는 옷을 갈아입고 있고 아빠는 아이들에게 속옷을 잘 치우고 정리하라고 타이른다.(물론 이 장면이  보트 탈출의 그날밤과 동일한 밤에 벌어진 장면이라는 설명이나 확신은 없다) 아이는 낮에 마트에서 가져온 양배추를 가지고 있고 그 양배추를 간이 침대로 끌어들인다.아빠는 딸에게 양배추와 함께 잔다며 핀잔을 준다.(이 양배추는 나중에 또 등장한다.기억해 두시라)

 

이 장면 자체에는 전혀 이상한 것이 없다.그러나 다시 한 번 생각하자.우선 저 방은 영화의 첫 장면,아이들이 잠들고 있고 여인 하나가 머리를 빗고 있던 방과는 다른 방이다.그 방의 검은 벽지엔 흰 빗줄기가 그려져 있었지만,저 방의 벽은 그저 시멘트 벽이다.습기가 가득한 시멘트 벽.즉 두 방은 서로 다른 방이다.

 

 -그렇다면 첫 장면의 방은 일종의 초현실적 공간인 건가? 아니,어느 쪽이 현실인가.일상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고 해서 그 공간을 실제의 현실적 공간으로 본다는 것 또한 편견일 수 있다.이 상황에서 우리는 칼로 무우를 아니 양배추를 베듯 현실과 비현실을 판단할 수 없다.어쩌면 둘  다 비현실,또 어쩌면 둘 다 현실 세계에서 일어난 일일 수도 있다.

 

게다가 저 장면엔,장면 다음에 이어질 보트 탈출의 상황을 향한 그 어떤 조짐도 없다.그저 평범한 잠 준비일 뿐이다.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또다시 질문을 던질 수 있다.저 장면이 밤의 혼란상을 보여주는 장면과 연결된다고 어떻게 확신하느냐고 말이다.그것은 두번째 여인이 숲에서 플래시를 비추며 무언가를 찾고 있는 (비가 오지도 않고 비옷도 입지 않고 있는) 장면이 아이들과 부둥켜 안고 있는 (비도 내리고 비옷도 입고 있는) 장면과 연결되어진다고 확신할 수 없는 이유와 동일하다.즉 우리는 이 모든 장면들이 전부 다 같지 않은 시간대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상상할 수도 있는 것이다.

 

즉 이 영화는 모든 영화적 편집이 관객의 두뇌 내부에서 일어나도록 고안된 영화라고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관객은 시간과 공간의 혼란상을 접하며 처음에는 답답함을 느끼지만,시간이 흐르면 오히려 자신의 상상과 영화의 시간을 투 트랙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그러다 어느 순간 생각과 상상이 막히면 (차이밍량이 다른 인터체인지로 빠져 달아나게 되면) 관객 역시 또다른 도로로 접어들게 되고 ,상상과 상상이 무한한 가지를 쳐서 수백만 개의 결론이 유도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만약 이 무한한 가지들이 영상으로 옮겨질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미래의 영화가 될 것이다.

 

물론 이런 생각 자체도 그 중 하나의 상상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5.리캉생의 가공의 먹방

 

그리고 아빠 리캉생이 등장한다.그는 어떤 방의 침대에 누워 있다.그런데 그 방은 아무리 보아도 아이들과 함께 있던 폐건물의 그 방이 아니다.훨씬 밝고 아늑하고 깨끗하다.어쩐지 백화점의 디스플레이용 침대가 누워 있는 공간이거나 아파트 모델 하우스처럼 느껴진다.게다가 그는 확실히 술에 취해 있다.혼자서 술을 마시고 잠이 든 것이다.

 

도대체 이 장면은 '어디에서 이어진' 것일까? 관객은 또 의문에 사로잡힌다.폭우와 보트 탈출 장면에서 이어진 것인가 아니면 또다른 시간에서의 모습인가,그도 아니면 지금까지 일어났던 모든 사건들 이전의 어떤 시간을 플래시 백한 것인가..

 

그런데 다음 장면에서는 아빠가 누워 있는 침대에 아이들이 자고 있다.또다시 시간이 불규칙하게 점프한 것이다.그리고 딸 아이 옆에는 아이가 잠자리로 가지고 들어갔던 양배추가 놓여 있다.아이는 양배추에 여자의 얼굴을 그려놓았다.관객은 당연히 가족 안에 부재한 엄마의 모습을 상상할 수 밖에 없다.

 

 

 

 

아빠는 양배추를 집어들고 아주,정말,천천히 양배추를 씹어먹기 시작한다.관객들로서는 기가 막힐 일이다.화면 전면을 가득 메운 한 남자의 얼굴이 자신을 노려보며 절망과 분노에 차서 눈물을 흘리며 양배추를 씹어먹는 장면을 마주 대해야 하니까 말이다.그야말로 가공의 먹방이다.

 

관객은 생각할 것이다.왜 저 남자는 -자신의 아내이자 아이들의 엄마라고 추정되는 여인의 모습이 그려진 - 배추를 저렇게 오래도록 씹어먹는 것일까? 저 방은 도대체 어디일까..나아가 이 영화는 도대체 어떤 종류의 드라마에 속하는가,가족 드라마라면 저런 먹방은 아내에 대한 원망 혹은 존재 지우기.,또는 그렇게라도 소유하기라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거다..라고,관객은 생각할 것이다.아빠 개인의 심리 드라마라면 저 장면이야말로 아빠의 완벽한 분열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빠를 위주로 생각할 때,이 장면은 최악의 절망이 정점에 달한 어떤 순간 혹은 자살의 대용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또 한편 어떤 기억력 좋은 관객이 저 양배추의 출처를 생각해낼 수도 있다.어린 딸이 양배추를 가지고 온 곳은 낮의 대형 마트이고,양배추를 아이에게 건넨 사람은 두번째 여인이다.(이 관객은 언뜻 두번째 여인이 마트에서 일한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지금 내가 그런 것처럼 말이다).그렇다면 이 장면은 두번째 여인에 대한 방어이자 공격,그리고 항의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또 하나,여전히 이 장면의 시간 연결점이 분명하지 않다.정상적이라고 생각되는,앞으로 나아가는 시간적 관성에 의한 이야기의 편집을 생각해 보자면

 

1) 폐건물로 가족이 들어가고

2) 잠을 자고

3) 건물 내에서 뭔가 문제가 생기고

4) 그래서 보트를 타고 탈주하려 하고

5) 그러나 두번째 여인이 보트 자체의 위험을 감지하여 아이들을 오히려 구조하고

6) 분열을 일으킨 아빠가 어딘가의 방에 들어가 또 술을 마시고..

 

로 생각할 수 있다.그러나 그래보았자 여전히 양배추와 아이들의 문제가 있다.아이들은 분명히 두번째 여인에게 구조되었는데,다음 장면에서 아빠를 기다리면서 잠이 든 공간,그리고 문제의 양배추가 있는 공간은 폐건물이 아닌 다른 공간인 것이다.그렇다면 도대체 이 장면의 시간적 연결점은 어디에서 오고 어디로 향하는가..관객은 혼란에 빠질 수 밖에 없다.(물론 차이밍량도 양심은 있었는지 영화 말미에 연결점을 제시하긴 한다..)

 

어쨌든 관객은 또 하나의 선택의 교차로에 서게 된다.어처구니없이 친절하게도 영화의 롱 테이크가 우리에게 그 선택의 여유 시간까지 주는 것이고 말이다.

 

#6.tears

 

그런데 세번째 여인이 등장한다.그녀는 아무래도 아이들의 엄마로 보이며 집에 관한 일단의 진실을 딸에게 얘기한다.그녀의 장면을 또다시 유튜브에서 찾아냈다..

 

 

 

 

아이가 묻는다.왜 우리 집은 이렇게 엉망이냐고.엄마는 처음에 비밀이라고 대답한다.(비밀을 알게 되면 아이 역시 모종의 행동으로 나서리라는 불안감이 있는 듯 하다) 그리고는 말을 잇는다.예전에 아주 많은 비가 왔고 빗물이 샌 후 '집이 울게'되었다고.천정과 벽의 무시무시하게 갈라진 흠들은 집의 눈물이라고.그녀는 잠시 날카롭게 화면 바깥의 옆면을 쳐다보았다가 다시 천정을 바라보며 집이 흘린 눈물의 흔적을 아이와 함께 얘기한다.(세번째 여인을 연기하는 첸샹치는 정말 섬세한 연기를 보여 준다)

 

비.아빠의 갑작스런 탈출의 이유가 되었던 비.이 비는 집을 울게 했다.아빠가 양배추를 먹으며 우는 것처럼,그리고 나중에 세번째 여인이 벽화를 바라보며 우는 것처럼.비와 눈물,예전에 aphroditie's child의 노래 rain and tears 라는 노래가 생각 나는 이 장면.(아프로디테의 아이들은 비와 눈물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라고 노래했었다)

 

이것은 이 영화의 실마리 중 하나이다.

 

#7.Home coming

 

그리고 4인 가족 모두가 등장한다.아빠 리캉생이 귀가한 것이다.아빠의 귀가는 '가공의 먹방' 장면 다음에 붙어 있다.아빠는 여전히 술에 취한 것 같이 보이며 매우 지쳐 있다.엄마와 아이들은 누군가의 (아마도 아빠) 생일인 듯 불 밝힌 양초가 꽂혀 있는 생일 케이크를 준비한 채 그를 기다리고 있다.

 

 

 

여전히 벽은 집이 흘린 눈물로 인해 폐허 비슷하게 변해 있지만 아이들은 모른다.엄마와 아빠만이 그 비밀을 알 뿐이다.벽과 바닥이 아니라면 이 집은 유랑민의 집이 아니라 정주민의 집이다.어쩐지 모든 시간이 맨 앞으로 돌아가버린 듯 하다.저 장면 속 엄마의 존재가 관객으로 하여금 그렇게 생각하게 만들고,이것은 아무래도 진실에 부합하는 듯 하다.

 

이후 엄마는 목욕탕 욕조에 목욕물을 받고 아빠는 옷을 벗고 욕조 안으로 들어간다.엄마는 거의 누더기가 된 아빠의 옷을 차분히 살펴보다가 모아서 버린다.

 

- 이때 부산에서 영화를 보던 나는 무언가 심상치 않은 전조를 느꼈다.세번째 여인의 이 행동이 마치 최후의 배려 같은,마지막 작별 인사 같다고 느꼈던 것이다.

 

이래서 50일 후에 생각한다.이 영화를 가족 드라마로 본다면,먼저 문제를 일으켰던 사람은 아빠이고,엄마는 마지막까지 가정을 지키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다가,저 장면 이후 잠든 아이들 곁에서 머리를 한참이나 빗은 후 떠나버렸다고.정치가들의 초상화가 이 붕괴된 집을 대만 사회에까지 의미를 확장시킬 수 있고 사회적 안전망에서 유리된 사람들의 눈물이 이 영화를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하고.

 

그러나 이 역시 순간적으로 스친 생각일 뿐.완전한 해석은 아니다.마지막 클라이맥스가 관객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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