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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영화9 .빛나는 우리 영화들 1 -전규환의 타운 3부작.<모차르트 타운>

신의 영화들/FILM FLOATING

by 폴사이먼 2011. 12. 14. 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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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당신이 살아가고 있는 도시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을,아니면 그 도시의 가장 평균적인 인물을 떠올릴 수 있는가? 그래본 적이 없다면 지금 한 번 시도해 보라.그리고 만약  당신의 뇌리에 어떤 한 인물의 이미지가 떠올랐다면,그 인물이야말로 당신이 당신의 도시를 바라보는 프리즘으로 기능하는 것에 다름 없다.

 

가령 우리나라 TV의 드라마 작가들과 연출자들이 그들의 도시를 묘사하는 데에 사용하는 그 수많은 실장님들과 재벌2세들,그리고 히스테리컬한 아줌마들 (특히 김수현의 경우) 과 절대로 화장끼가 지워지지 않는 비슷비슷하게 생긴 여배우들은,대중을 상대하는 방송이 그들의 도시를 바라보는 관점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준다.(또한 그들이 대중에게 주입시키고 싶어하고 그래서 더욱 대중이 선망하게 되는 이미지라고도 할 수 있다)

 

또 가령 부산이란 도시를 누구를 통해 바라보는가 역시 그런 식으로 파악될 수 있다.그가 노무현인지 김진숙인지 YS인지 그도 아니면 이대호인지에 따라,좀 심하게 말한다면 그 사람 자체의 세계관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미지의 감독 전규환이 그의 소위 '타운 3부작'에서 제시하는 인물들이야말로 사실은 바로 그의 세계관이다.그는 자신의 인물들을 영화 전면에 제시하며 관객의 마음들에게 지지와 찬성의 여부를 묻는다.그리고 그와 관객들의 화학작용에 의해서 새로운 도시가,또는 기존의 '타운'이 가지는 이미지의 생명력이 살아움직이고 약동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또 하나의 문제는 그가 내건 인물들의 배치와 또 -관객들에 의한 - 재배치,그리고 그 인물들 사이의 관계가 만들어내는 동력과 역학이다.그 배치와 관계들은 전규환이 바라본 우리 사회이며,비록 그것이 영화적 편의에 의해 그렇게 만들어졌다 하더라도,그 편의 역시 사회적 관계망의 상징일 수 밖에 없다.관계망 역시 영화적 중요성을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2011-34.모차르트 타운-전규환 2008

 

타운 3부작의 첫 작품은 <모차르트 타운>이다.우리나라의 대표적 도시에 모차르트를 갖다 붙인다는 것은 -특히 이 영화가 만들어질 당시의 서울시장이 오세훈이었으므로 -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지만,모차르트란 말과 이 영화의 인물들이 너무나 대조적으로 그려지므로,또한 그 대조 효과 때문에 이 제목은 특별한 함의를 갖기도 한다.

 

물론 영화 속에서 '모차르트 타운'이란 말이 나오기는 한다.영화의 시작 부분 모차르트를 강의하러 우리나라에 교환교수로 온 음악 교수 소니아가 서울이란 도시에 대해 얘기하면서 이곳이야말로 자신의 '모차르트 타운'이 될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며,피아노 수리점에서 일하는 노동자 청년 박승배의 인터넷 채팅 사이트 아이디가 또 '모차르트 타운'이다.그러나 역시 모차르트 타운이란 말이 서울이란 도시와 아주 먼 거리에 있다는 느낌은 여전하다.영화를 가로지르는 한없이 투명한 모차르트 음악을 들어도 역시 그렇다.

 

 

 

이 영화에서 전규환이 제시하는 인물들은 죄다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다.그들은 거의 우연에 의해 만나게 되고,그것이 필연이 되어 파국을 초래하기도 하고,또 서로 모른 채 그쳐 스쳐지나가기도 하지만,그들이 '타운'이라는 울타리 내에서 맺어지고 이어져 있는 것 만큼은 분명하다.문제는 이 이어짐의 이유와 형태다.영화의 영화적 승부는 거기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가 시작하고 등장하는 것은 음악 교수 소니아다.그녀는 자신이 1년 동안 체류하게 될 이 도시의 관찰자가 될 것이라고 다짐하며 서울에 '모차르트 타운'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지만,그것은 일종의 역설이다.이 영화안에서 그녀가 구체적으로 보고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그래서 소니아는 철저한 아웃사이더이며 관찰자가 되겠다는 자신의 다짐과도 사실상 거리가 멀다.어쩌면 우리의 '타운'에 대한 객관적 관찰이란 완전히 불가능하다는 말인지도 모른다.특히 스쳐지나치는 여행자라면 더더욱 그렇다는 말,그런 식의 겉핥기 식의 관찰을 진정한 관찰이라 우겨선 안된다는 말을,이 영화는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니아의 첫걸음 때문에 영화 속 인물들이 등장한다.박승배(이 영화의 영화 속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으므로 그냥 배우의 이름으로 대신하려 한다)는 그녀가 찾아간 피아노 수리점의 노동자이며,소니아가 횡단보도에 서서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건너편에 있는 공중전화박스에서 전화를 걸고 있는 사람은 또다른 등장인물인 나이지리아 출신의 노동자 블레이즈 그바토다.그리고 그 쪽 버스정류장 옆의 구멍가게엔 이 영화의 여주인공 격인 주유랑이 앉아서 장사를 하고 있다.그리고 소니아는 여기까지다.아웃사이더는 여기서 일단 퇴장한다.

 

버스정류장의 주유랑은 타운의 또다른 관찰자이다.조그만 가게 안에 앉아 그녀는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고 있고 현상한 사진을 가게에 걸어놓는다.그녀의 남편은 아마도 경제적 이유 때문에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고 그녀는 한없는 외로움 그리고 당연한 생활고와 싸워야 한다.그런 그녀는 왜 그렇게 열심히 거리의 사람들을 그렇게 사진 찍고 있는 것일까?

 

 

 

물론 그녀의 카메라 역시 연결기능을 한다.카메라 때문에 그녀는 이 영화의 중요한 두 남자 인물을 만나게 되는 것이며,그녀의 카메라는 마지막까지 영화에 출연한다.(그녀가 떠난 이후에도 카메라는 영화를 떠나지 않는다).그래서 어쩐지 이 카메라는 영화 자체를 생각나게 하기도 한다.관찰자이자 기록자..이것이야말로 한 타운에 대한 영화의 가치일 수도 있는 것이다.그리고 그 카메라에 의해 영화는 점점 퍼져나가는 것이다.

 

주유랑이 나이지리아 노동자 블레이즈를 촬영하고 난 후,영화의 카메라는 그가 아내와 함께 일하는 공장으로 향한다.임금을 상습적으로 체불하는 악덕 사장 밑에서 성적인 희롱까지 당하며 일하는 이들 부부에게 닥치는 것은 이민국의 단속이다.부부는 도망쳐야 하며 단속이 끝나고 돌아오면 다시 사장의 욕설과 구박을 감내해야 한다.영화는 그 과정을 아주 짧게 가감없이 보여준다.거기에 슬픈 정조나 멜로적인 감성은 없다.

 

 

버스정류장의 주유랑은 혼자 있는 밤이 되면 인터넷 채팅을 한다.채팅 상대는 - 그녀는 당연히 알 리 없겠지만 - 피아노 수리공 박승태다.그들의 이야기는 섹스로 연결되고 박승태는 주유랑에게 원나잇 스탠드를 말한다.이때 주유랑은 갑자기 채팅을 멈추고 변기를 붙잡고 구토한다.그녀의 구토는 중의적이다.채팅 중 계속 마셔댄 깡소주 때문일 수도 있고,섹스를 향하여 다이렉트로 연결되는 채팅 사이트 특유의 습성에 대한 혐오감이나 자기 존재에 대한 감정 때문일 수도 있다.영화는 이유를 정확히 밝히지 않는다.다만 토하고 잠들고 깨고 침대에 묻어있는 생리혈을 망연하게 바라보는 그녀를 보여줄 뿐이다.(이 구토는 영화 말미의 다른 여자 캐릭터의 구토로 이어진다.이렇게 이 영화는 계속 이어지고 그 이어짐이 어떤 결론적인 이미지와 구도를 창출시킬 수 있도록 디자인되어 있다)

 

그리고 다음 날 주유랑은 그가 전날밤의 채팅 상대인지도 모른 채,박승배의 사진을 찍어준다.그리고 그들은 모종의 관계를 향해 전진한다.그들은 드라이브 끝에 섹스를 위해 모텔로 향하는데,그들의 섹스는 시작도 하기 전에 끝나고 만다.콘돔 때문이다.그들은 모텔의 카운터에서 서로 따로따로 콘돔을 사는데,박승배가 욕실에 있는 동안 콘돔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주유랑은 울음을 터뜨리고는 그 방을 떠나버린다.

 

주유랑을 섹스에의 가능성으로 이끌었던 것은 전날밤의 생리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그것이 그녀에게 자신의 원초적인 욕망을 일깨웠던 것일 수도 있다.그러나 박승배나 그녀나 콘돔을 산다.생리 중엔 임신이 불가능할 것임이 분명한데도 그들은 나란히 - 서로 모르게 - 콘돔을 샀던 것이다.가장 외로운 여자로서 카메라를 통해서만 사람들과 소통했던 그녀는 테이블에 놓인 콘돔을 보며 소통의 완전한 불가능성을 엿본 것이다.섹스라는 커뮤니케이션 수단마저 최후의 저지선처럼 방해하는 콘돔은 이 '타운'에서는 일회성 교류마저도 불가능하게 한다는 자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물론 콘돔이 이런 식의 인스턴트 관계의 허무함을 일깨웠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하지만 그러기에 콘돔과 생리혈은 너무나 극적이다)

 

불가능한 소통,불가능한 섹스,몸대몸으로 만나는 섹스가 성기 삽입의 불가능함으로 표현되는 장면은 또다른 캐릭터 오성태를 통해서도 나타난다.일수꾼이자 사채업자이며 단란 주점 하나를 뒤에서 보호하고 관리해주는 그는 이 영화의 다른 스토리 하나를 구성한다.주유랑의 스토리가 다소 관념적인데 반해,오성태의 스토리는 철저하게 현실적이며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을 그대로 반영한다.오성태의 단란주점은 도박과 술에 빠져있는 사람들과,마담인 문형주를 유린하며 보호비를 뜯어가는 경찰관 같은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세계이며,낮 동안 그가 만나는 풍경들은 높은 이자의 일수를 감당해야 하는 서민들의 세계이다.

 

어느 괴로운 날 오성태는 문형주와 섹스하려 한다.단란주점 마담 문형주의 몸을 돌려세우고 그녀의 옷을 모두 벗긴 후에 그녀의 드러난 엉덩이를 대하며 그가 하는 것은 마스터베이션이다.그 역시 삽입섹스에 실패하는 것이다.오성태의 다른 부분 - 그는 취객에게 시달림을 당하는 가게 안의 주유랑을 구해주고 그녀의 카메라가 망가졌을 때 새 카메라를 사 준다.사채업자이자 가끔은 잔혹한 폭력을 휘두르는 그는 주유랑에게만은 마치 키다리 아저씨라도 되는 양 행동하는 것이다- 과 오성태의 지하세계에서의 행동은 이처럼 다른 것이며,그의 실제 존재는 지하에 소속되어 있다.그런데 지하의 그 역시 지하의 파트너인 문형주와 근본적인 커뮤니케이션이 불가능한 것으로 그려진다.거칠고 성기가 노출되고 실제 상황과 거의 구별이 불가능한 것으로 그려지는 <타운 3부작>의 섹스 장면 중,이 두 장면들은 매우 이례적이다.그들은 결국 마스터베이션에 매달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영화는 결국 어두운 현실을 향하여 줄달음치며 마무리를 향한다.등장인물들 사이의 느슨한 연결을 갑작스럽게 잡아채는 것이다.사채업자 오성태는 아프리카 출신 노동자 블레이즈의 공장 사장을 만나 돈을 갚으라고 폭행하며,사장은 밀린 임금을 줄테니 오성태를 죽이라고 블레이즈에게 명령한다.결국 오성태는 블레이즈의 기습에 의하여 항상 다니는 골목길 - 이 골목길 장면은 영화에서 세번 정도 등장하는데,대부분 폭력과 연관된 장면이다- 에서 칼에 찔려 죽는다.죽은 오성태를 놓아두고 블레이즈는 도망치고 과거의 폭행 때문에 오성태에게 복수하려던 동네 양아치들은 그의 시신에게 다시 폭행을 가하고 그의 지갑과 시계를 훔친다.

 

 

 

관객은 그의 죽음에 안타까워한다기 보다는 갑작스런 폭력 상황에 당황하게 된다.소니아가 연주하는 모차르트의 소나타에 따라 전개되는 이 장면은 돌발적이고 갑작스럽지만 이 영화의 결론처럼 제시된다.중요한 영화적 사건은 단란주점 마담 문형주의 술주정 장면 외엔 일어나지 않는다.

 

등장인물들에게도 결론이 다가온다.주유랑은 아마도 외국에서 걸려온 남편의 전화를 받고 해외로 떠난다.이때 공항 에스컬레이터엔 서로를 모르는 세 그룹 -한국을 떠나는 음악 교수 소니아와 주유랑,그리고 살인의 댓가로 밀린 임금을 받아낸 아프리카인 노동자 부부- 가 한꺼번에 모인다.떠날 자는 떠나는 것이다.죽음을 통해 떠난 오성태까지 포함하면 이렇게 네 그룹은 그들의 '모짜르트 타운'을 떠난다.

 

그렇다면 남은 자들은? 박승태는 피아노 수리공을 그만 둔다.그리고 여행 가이드를 시작한다.아버지의 관광버스와 주유랑이 남긴 카메라를 들고서 말이다.그런데 승객들은 아무래도 동남아 노동자들로 보인다.한 번의 관광 뒤 노동자가 될 법한 여행객들이다.박승태는 타운의 하부 질서에 편입된 것이다.보호비를 갈취하는 경찰관과 양아치 청년들도 남았다.그리고 악덕 기업주도 여전히 건재하고 단란 주점에서 술을 마시고 도박하는 사채업자 패거리들도 살아남았다.돈과 폭력과 작은 권력의 질서에 순응하고 기생하는 사람들만 우리들의 모짜르트 타운에 살아남은 것이다.

 

떠나지도 못하는 단란주점 마담 문형주는 - 아마도 오성태의 죽음 때문에 - 술을 잔뜩 마시고 술주정을 한다.그녀는 변기에 구토하고 - 물론 주유랑의 구토에 이어진 장면이다 - 단란주점의 홀에서 치마를 올리고 오줌을 싼다.사람들의 눈길에도 아랑곳 않고 말이다.남은 자들에게 남겨진 저항은 오직 그런 것 하나 밖에 안 남았다는 듯이.

 

느슨한 결합들이 이어졌다 풀리고 폭력적으로 연결되었다가 단칼에 끊어지는 일련의 과정들을 통해,이 영화는 우리 사회의 근본적 축도 하나를 엿본다.이 도시의 야만적인 폭력들,더러운 질서들,그리고 남는 자와 떠나는 자..물론 이 영화엔 약간의 서정이 있다.모짜르트의 음악이 있고 살짝 드러나는 로맨스가 있다.그러나 근본적인 시각은 변하지 않는다.즉,이 도시는 '모차르트' 타운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나마 있던 감성 조차도,전규환은 <타운 3부작>의 두번째 영화 <애니멀 타운>에서는 거의 박살을 내버린다.이제 그 영화 얘길 할 차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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