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폭력의 시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수많은 폭력과 폭력 현상 속에,그리고 폭력적 상황의 가능성에 휩싸여 살고 있다.집을 나가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가변적이고 위험스런 상황들이 수없이 펼쳐지고,우리는 언제나 거기에 맞서 싸우거나 침착하게 대응해야 할 태세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자잘한 교통사고에서부터 범죄적 폭력에 이르기까지,갖은 종류의 불미스럽고 위태로운 일들이 우리의 생활 주변을 맴돌고 있는 것이다.잘 사는 동네일수록 더 완벽하고 더 잘 설치되어 있는 CCTV들만 보더라도,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 세상에서 완전히 안전한 사람은 거의 없는 것 아니냐고 여겨질 지경이다.(물론 위험 자체가 눈 앞에 현존하고 있는 지역들도 있다.전쟁과 테러와 학살이 일상생활이 되어진 곳들은 좀체로 줄어들지 않는다.문명의 발전을 얘기하는 것이 우스워질 지경으로 말이다)
개인의 안전을 위협하는 폭력 상황만 폭력이 아니다.우리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엔 다양한 폭력적 양상들이 도사리고 있다.치고 받고 싸우는 일상적인 폭력 (매주 내겐,타인으로부터 폭행을 당했다는 사람이 적어도 세 사람은 나타나 상해진단서를 떼어간다),조직폭력배,절도범,강도범,성폭행범과 같은 악의적이고 금전을 노린 고전적이고 전형적인 범죄와 연관된 폭력,그리고 계급 구조와 권력관계 그리고 소유관계에서 엮여나오는 구조적 폭력에 이르기까지 폭력적 상황이란 매우 다양하며 어찌 보면 매우 일상적이다.(광주 인화원 사건 같은 경우 여러 종류의 폭력적 상황이 한꺼번에 얽혀 있다.이 문제의 해결이 난마처럼 얽혀 있는 것은상황을 단순하게 처리하지 못하는 관계당국의 무능 때문만이 아니라,여러 가지의 문제를 동시에 처리해야 하는 고충 때문이기도 하다.)
특히 학교와 군대로 대변되는, 한국 남자들이 필수적으로 통과해야 하는 시스템 내부에서의 구조적 폭력은 그들 개인에게만 상흔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그 통과의례를 거친 연후에 그들이 살아가야 될 사회 자체에도 영향을 끼치고,개인들로 하여금 그들이 당했던 폭력 경험을 그대로 반복하게 하기도 한다.군대는 한국 남자들에게 조직을 운용하는 기본 틀을 알려주고,다른 배움이나 경험 또는 다른 스타일의 운영 학습을 해 본 적이 없는 한국 남자들은 군대의 틀에 맞춰서 자기가 속한 조직들을 꾸려나가려 한다.(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은,박정희와 전두환을 이어온 병영 독재시대에 가장 효율스런 조직틀이 바로 군대라는 것을 몸과 마음으로 느꼈던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많기 때문이다)
예전보다는 좀 나아졌다고도 하지만 - 그 이유는 '자본'이 끼어들었기 때문이다.'자본'은 병영식의 군기잡기가 이제는 그리 효율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도 체육대학생들의 신입생 얼차려가 매년 반복되는 걸 보면,아직도 후미진 구석에서는 병영식의 폭력이 우선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학교나 군대 위엔 또다른 유사 조직들이 있고 맨 위엔 바로 국가가 있다.사회적으로 공인된 거대한 몸통 같은 국가는 폭력 역시,'공적인 합의'를 빙자한다.특히 약자를 향해 무소불위의 힘을 휘두를 때,그런 '공적 합의'들은 종종 치졸해지고 살인적이며 비도덕적으로 변화한다.그리고 이 정도 상황에 이르르면 그 국가의 구성원들은 반드시 국가적 폭력의 당위성과 정당성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부글부글 끓게 되는 것이다.(그래서 영리한 국가 권력은 자신의 폭력성을 조절할 줄 안다)
물리적인 폭력만 있는 것이 아니다.말과 몸짓으로만 이루어진 은밀한 폭력도 있다.직장 내의 왕따,해병대의 기수 열외를 폭력적 상황에서 제외할 수는 없는 것이다.최근엔 우리나라 대부분의 시민들이 인터넷을 이용하게 되면서,인터넷 위에서 벌어지는 폭력도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인터넷 커뮤니티 속의 왕따,비이성적인 스토킹,분명히 정신병리학적인 모습을 띠고 있는 인터넷 유저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생각 보다 인터넷 위의 폭력은 심각하고 공포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특히 정상적인 대화를 거부하는 댓글러 (이런 종류의 사람들은 소위 '악플러'라고 불리우는 사람들과는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 들의 모습은 안타까움과 가엾음을 확실하게 넘어선다.특히 폭력의 한계를 넘어설 때 그렇게 된다.
특히 현대의 폭력은 가해자와 피해자를 고의적으로 혼동시킨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특히 정치적인 이슈가 문제가 될 때나,사회적인 약자가 폭력의 피해자로 타겟팅 될 때,가해자의 입장에 선 사람들이나 세력은 끊임없는 이데올로기 주입과정을 통해 자신들의 정당성을 강변한다.수구언론들의 레드 컴플렉스에서부터 최근노사문제에서의 '국가경제 타령''귀족 노동자 타령'에 이르기까지,이제 가해자들 역시 자신들의 논리를 반복해서 정당화한다.거기에 수많은 도우미들이 - 보수기독교회 지도자들이 그 중 한 틀이 되고 말았다.아주 오래 전부터 그렇게 살아들 오긴 했지만 최근처럼 노골적으로 극우의 목소리를 높이기는 역사상 처음일 것이다.사적 이익과 감성적 우겨댐이 수치심 마저 제거한 것이다- 각계각층에서 나서기 시작하고,그들 사이의 상하관계까지 들여다보면 하나의 기업 형태를 이루면서 공생관계를 이루고 있다.그 피라미드 맨 밑바닥엔 댓글 달아제끼는 인터넷 알바에서부터 박원순이나 정동영 뒤통수를 가격하는 60대 여성 스나이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군상들이 자리하고 있고 말이다.
그러나 이제 폭력은 모호함의 틀 위에 위치하고 있고,그러면 그럴수록 물리적 폭력의 황당함은 도를 넘어선다.그리고 그것은 폭력적 양상에 대한 보통 시민들의 감각을 매우 둔하게 만들어 버리기까지 했다.웬만한 폭력엔 그냥 눈감게 되고 심지어 가해자와 피해자 양측에 혐오감을 드러내는 사람까지 생긴 것이다.여기에 힘을 가진 사람들의 현실적 위협 - 그들은 이제 생계 자체로 개인들을 위협한다 - 까지 덧붙여져,힘과 힘의 정당한 대결을 애초부터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그러나 영원한 굴종,영원한 패배,영원한 노예상태란 없다)
가령 예전엔 한 학생의 죽음이,한 노동자의 분신이 사람들의 고결한 분노를 일으켰었다.김주열과 박종철과 이한열의 죽음은 시민혁명을 가능케했던 것이다.그러나 21세기의 시민들은 죽음에도 자살에도 반응하지 않는다.그들이 겁을 집어먹었기 때문 만은 아니다.가해세력들의 자기 정당화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물론 그것은 이데올로기적으로만 기능하지 않는다.그들은 현실을 매개로 수많은 공작을 펴고 수다한 미끼와 제물들을 뷔페식 밥상에 진열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종류의 다양한 폭력들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 것일까?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으로 복수에 나서야 하는 것일까? 욕설엔 욕설로 주먹엔 주먹으로 총엔 총으로 싸워나가야 하는 것일까? (그러기에 우리나라의 치안력 또한 만만치 않다.우리나라에서 무장 혁명이 불가능했던 것은 시민들의 비폭력 선호 성향 때문이 아니라 ,강한 경찰력과 군대를 장악한 정치 세력 때문이기도 했던 것이다.역으로 우리나라가 총기 사용이 가능한 나라였다면 군부 쿠데타가 불가능했을 거라는 주장도 있다)
2011년엔 이런 의문의 일부에 영화적인 대답을 내어놓은 웰 메이드 영화가 하나 있었다.덴마크의 봉준호라고 불린다는 수잔 비에르의 <인 어 베러 월드>가 바로 그 영화가 되겠다.이 영화는 덴마크라는 유럽 국가와 아프리카 사이를 오가며 폭력의 양상 몇 가지를 제시한다.폭력의 당사자들과 관찰자들을 다양하게 등장시켜서,폭력과 응징과 복수와 용서에 대해 몇 가지 관점들을 얘기한다.
웰 메이드란 단어에 걸맞은 요소들을 많이 가지고 있는 영화다.생길 수 있을 것만 같고 앞뒤가 정연한 내러티브와,아역배우들과 어른 배우들의 좋은 연기,사막과 호수를 그려내는 아름다운 카메라,그리고 적절하게 삽입되는 음악들,관객의 감정을 제어하고 요리하는 휼륭한 연출에 이르기까지 이 영화,웰 메이드가 맞다.
2.덴마크
영화는 덴마크의 의사 안톤과 그의 아들,그리고 아들의 친구를 중심으로 진행된다.안톤은 불륜 때문에 아내와 별거중이며 아프리카를 오가며 난민 캠프에서 의료 활동을 벌이고 있다.그의 아들 엘리아스는 심약한 성격과 체격 때문에 학교 안에서 왕따 당하고 힘센 친구들의 폭력적 괴롭힘에 시달리고 있다.여기에 전학생 친구 크리스티앙이 나타난다.말기 암 때문에 엄마를 잃은 크리스티앙은 엄마의 죽음이 아버지를 포함한 가족 때문이라고 여기고 있다.이 소년의 날카롭고 인상적인 눈빛은 이런 식의 대상이 분명치 않은 복수심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런 크리스티앙이 엘리아스의 상황에 개입한다.그런데 이 소년은 마치 눈에는 눈으로 대항하여야 한다는 듯,압도적이고 결정적인 폭력적 장면을 연출하며 엘리아스를 괴롭히는 보스 소년을 무력화시킨다.(그는 비어있는 화장실 안에서 목에 칼을 들이대고,자전거 체인을 돌려대기까지 한다) 그렇게 그는 엘리아스의 학교 내부 상황을 평정한다.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이 소년의 행동을.
3.아프리카.
정확히 어느 나라라곤 명시되지 않은 아프리카 어느 국가에서 의료활동을 벌이는 안톤이 맞닥뜨리는 것은 일상적인 폭력이다.난민 캠프 근처의 민병대는 재미 삼아 사람을 죽이고,임산부의 배를 갈라 성별 알아맞히기를 오락처럼 생각하는 폭력집단이다.안톤은 거의 매일 이런 희생자들을 치료해야 하고 희생된 주민들의 가족들은 그야말로 치를 떤다.
이때 민병대의 우두머리인 '빅맨'이 심한 상처로 안톤에게 치료를 요청한다.난민 캠프의 다른 사람들은 안톤이 그를 치료하지 않기를 바라는 눈치다.그는 그 지역의 먹이사슬 최고에 올라있는 실세이며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자이기 때문이다.그러나 안톤은 그를 받아들인다.대신 최소한의 민병대 인원만이 상주할 것을 요청하면서 말이다.타협은 이루어진다.
환자라면 그가 어떤 인간이라 하더라도 치료해야 한다는 의사로서의 직업윤리 때문이었을까,아니면 민병대의 폭력 위협 때문이었을까.그러나 안톤은 총 정도에 굴복하는 사람으로 그려지지 않는다.(그랬다면 그곳으로 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환자들의 흰눈과 그를 도와주는 아프리카인 의사의 '선생님은 참 이상한 사람인 것 같아요'라는 힐난 섞인 말에도 불구하고 안톤은 빅맨을 치료하는 것이다.혐오감을 느끼면서 말이다.
이 지점,우리는 약간의 가정과 상상력을 동원해야 한다.첫째,빅맨은 치료가 끝나도 여전히 빅맨일 거라는 사실이다.그를 치료해준다고 해도 그의 악행은 끝나지 않는다.또 빅맨이 죽어도 또다른 빅맨이 나타날 거라는 것도 분명하다.(실제 영어 대화가 가능한 빅맨은 자신의 부하 하나를 가리키며 내가 죽기만 바라는 녀석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둘째.의사의 직업윤리는 꼭 이런 식으로만 작동되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안톤이 옳다면 조조를 치료하는 것을 거부하던 화타는 나쁜 의사다.(또는 화타가 조조를 죽이려 했다는 설도 있다)
한편 우리는 화타에게 그렇게 심한 손가락질을 보내지 않는다.사실상 우리에겐 어떤 '대의를 위한 폭력행위'는 용인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그렇다면 그 '대의'는 어떤 기준에서 세워지는 것인가?
그런데,영화에 변화가 일어난다.아이 하나가 또다시 죽어서 실려왔을 때,빅맨은 그 아이의 시체를 자신의 민병대에게 인도할 것을 요구한다.시간(시체와의 섹스)을 원하는 부하 때문이었던 거다.그때 안톤이 폭발한다.그는 부하들을 쫓아내고 두목 빅맨을 병실 천막 바깥으로 버린다.빅맨은 그가 죽였던 희생자들의 가족에 의해서 그야말로 처참하게 살해당한다.
우리는 여기서 안톤이 한 행동을 생각해야 한다.그는 사실상 빅맨의 죽음을 방조했다.아니,방조가 아니라 주도했다고도 볼 수 있다.그는 어떻게 되리라는 걸 잘 알면서도 빅맨을 난민 캠프 사람들에게 넘겨버렸다.잔혹한 살인자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그를 치료하겠다고 다짐한 사람의 분명한 이율배반이다.그는 왜 그랬던 것일까? 그의 행동이 '눈에는 눈,이에는 이'의 원칙과 무엇이 다르다는 건가.그를 돕던 아프리카 조수 의사의 이상하다는 눈빛도 여전하다.
그는 자신이 고수해왔던 비폭력 원칙과 정반대의 행동을 했다.그리고 거기엔 시체 마저 훼손하려는 폭력 집단의 의도에 대한 결정적 분노라는 계기가 있었다.만약 그들이 그런 의도를 내비치지 않았다면,안톤은 그냥 그대로 빅맨을 치료했을런지도 모른다.즉,그에겐 어떤 '역치 (threshold)'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도저히 그냥 놓고 볼 수 없는 어떤 한계,그것이 안톤에겐 시신 훼손이었던 것이다.
비폭력이라는 원칙에서 보자면 그의 태도는 옳을까? 또 모든 사건에 적용될 수 있는 역치가 존재할까? 빅맨이 죽었다고 해서 죽음과 폭력의 악순환이 사라질까? 여전히 또다른 빅맨이 나타날 테고,아프리카의 상황을 구조적으로 변혁시키기 전까진 또다시 그냥 그대로의 일들이 벌어지게 될 것이다.오히려 난민 캠프에 대한 더한 복수와 살인이 이어질런지도 모른다.
우리는 죽은 빅맨에 대하여, 죽어 마땅할 인물이며,그런 인물은 언제든지 죽여 없애야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역사를 통해 이런 실례들을 얼마든지 살펴 볼 수 있다.그런데,어떤 살해는 정당화되고 어떤 살해는 그렇게 되지 못한다.또한 어떤 정당한 살인은 그냥 묻히지만,어떤 살인은 매우 상대적이어서 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나는 일부 뉴라이트 하는 사람들이 안중근 의사도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라 추측한다)
그러나 안톤의 태도엔 또다시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덴마크에서의 그는 완전히 달랐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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