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의혹에 싸여
2011년 5월 1일,평소 같았으면 어떻게든 휴식을 사수하려고 안간힘을 다했을 일요일 아침,나는 이례적으로 일찍 일어나서 부산하게 여행 준비를 시작했다.최소한도의 소음을 내려고 조심조심했던 까닭은 여전히 아내와 은별이가 침대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더구나 아내는 전날밤 전주로 출발하려는 나의 계획을 은근히 만류했었다.폭우가 내릴 거라는 기상 예보 때문이었다.나 역시 기상예보를 내세워 -내가 읽은 기상예보는 5월 1일 아침부터는 비가 그칠 거라는 '낭보'였었다- 전주로의 출발을 고집했었지만,그래도 미안한 것은 미안한 것이었다.(이제 나는 얼마나 건전한 중산층 가장이 되어버린 것인가)
몰래 몰래 발소리를 죽이고 걸어다니며 가방을 챙긴 다음 나는 밖으로 나왔다.아내에게 전화가 걸려온 것은 그로부터 거의 두 시간이 지난 뒤였으니,나는 거의 도둑처럼 은밀하게 집을 빠져나오고 만 거였다.
그러나 아내가 전화를 걸어오기까지의 두 시간 동안,나는 약간의 의혹에 사로잡혀 있었다.첫번째 의혹,봄날의 일요일 아침에 굳이 거리가 좀 되는 도시로까지 향하고 마는 나의 발걸음,나의 이 영화에 대한 허기는 도대체 어디로부터 비롯되어 나오는 것인가,또 이 굶주림의 진짜 원인이 혹시 내 현존재 자체에 대한 불만 때문에,나아가서 이런 종류의 여행은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일상생활에 대한 탈출구로서 기능하고 있는 것은아닌가 하는 스스로에 대한 불신이 어려 있는 의심.대충 그런 의혹이었다.나는 2011년 5월 1일 아침,이런 평범한 생각을 하며 고속도로를 달려가고 있었던 거였다.그러나 그런 의심은 곧 부정되었다.이런 대답들은 너무나 진부하고 아무런 영감도 주지 못하는 변명들이었다.대답들이 겨우 그 정도라니,이 정도로 밖에 이유를 대지 못하는 스스로가 오히려 한심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나 또 하나의 의혹도 이어진다.그것은,과연 나는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인가,아니면 영화를 보고 무언가 생각을 좀 해 보려고 가는 것인가,그것도 아니면 혹시 글을 쓰기 위해서 전주에 가고 있는 것인가.라는 좀 더 이상한 생각하고 맞닿아 있었다.이런 생각들 속엔 지금 이 시기의 영화들이 가지는 어쩔 수 없는 왜소함이 자리잡고 있었다.나는 가끔 영화를 본 후 그 영화에 대한 글을 쓰지만,이 글이 영화 때문에 쓰여진 것인지 혹은 내 기존의 생각들이 영화를 매개로 표현되는 것인지,그것도 아니라면 영화란 단순히 사유의 도구에 불과하거나 내 생각을 떠들기 위한 알리바이로서만 기능하는 것인지.,내게 영화란 여전히 약간은 불분명한 미심쩍음이었다.나는 그런 문제에 대해서야말로 조금은 확실하고 굳건한 대답을 갖추어놓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대답은 어려운 게 아니지만 그런 대답을 말로 표현한다는 것이 어려운 지도 몰랐다.
자동차가 정읍쯤 다다랐을 때,나는 그런 의혹들에 대해서도 잠정적인 답을 내놓았다.그건 모두 다 내 탓이라는 거였다.영화는 여전히 영화로 존재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나는 자꾸만 영화 바깥으로 달아나려 하고 있는 것이었다.나는 영화 외적인 어떤 것에 계속 구조 신호를 보내고 있었고,그 튼튼해보이는 동아줄을 잡을 때마다,흡사 나 자신이 그런 동아줄들의 제작자인 양 의기양양해 하고 있었던 거였다.영화 속에서 영화의 고유한 것들,영화적인 것들,영화만이 표현해낼 수 있는 개성을 쳐다보아야만 한다.그러나 나는 계속 나를 둘러싼 세상 탓을 하면서 바깥으로 바깥으로 달아나고 있는 것이었다.
정읍 휴게소에서 커피를 마시며 이런 종류의 캐릭터를 (영화로부터의 탈출과 영화 속으로의 고의적인 틈입을 교대로 반복하고 있는) 소설 속에 써 먹으면 재밌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것은 오로지 내 탓이기만 한 걸까? 지금 내가 만나러 달려가고 있는 영화라는 녀석에겐 아무 책임도 없는 것일까? 오히려 영화 쪽에서 자신이 응당 지녀야 할 빛나는 개성을 나에게 전달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지금의 영화는 자꾸만 자신의 본래적 면모와는 다른 요소들을 자꾸만 끌어들이고 혼성교배함으로써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훼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또 혹시 이런 종류의 영화의 존재 방식은 산업 사회를 살아가는 쟝르 스스로의 자구책이거나 진화의 결과는 아닐까? 그렇다면 원래의 영화는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나는 그 질문에 명쾌한 대답을 내놓을 수 있을까? 또 그 대답이 영화라는 예술에 존재 방식에 도움이 되는 것일까?
정읍 휴게소를 떠나 전주로 달려가는 그 시간 동안 나는 또 다른 의혹에 싸여있었다.그리고 혹시라도 오늘 보게 될 영화 네 편이 이런 질문에 답을 줄 수 있었음 좋겠다는 ,갑자기 나타난 어처구니 없는 희망의 심정을 느꼈다.어쩌면 삶 자체가 이런 의문과 희망의 연속일런지도 몰랐다.
2.전주초등학교
나는 전주영화제에 올 때마다 꼭 전주초등학교에 차를 주차시킨다.(물론 이 곳은 영화제 기간 때에만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주차장이다) 이 학교는 도심에 위치해 있는데도 묘하게 농촌의 한가한 초등학교를 연상시킨다.나만 그런 인상을 받았을런지도 모르지만,이 고적한 초등학교의 아침 운동장은 영화제가 열리는 전주라는 도시에 대한 나의 기본 인상을 확인시킨다.이 은근히 부러운 조용함.직관적인 안정적임.
작년에 비해 주차된 차들의 숫자는 적었다.
3.마뇰 데 올리베이라.100살 감독.베닐드 혹은 성모
영화제에서 영화를 고르는 것은 물론 한계가 있다.내가 가는 날과 내가 보길 원하는 영화가 상영되는 날은 언제나 엇갈리기 일쑤이고,설사 운이 좋아서 '그 영화가 그 날 '상영 스케쥴이 잡혔다 하더라도,이번에는 예매라는 덫이 가로놓여 있다.게다가 어쩐 일인지 우리나라 영화제는 너무나 예매가 어렵다.보고 싶은 영화들은 심지어 5분도 안되어 티켓이 동이 나버리기도 한다.올해 전주의 경우,나는 이런 '광속클릭예매' 탓에 보고 싶었던 고다르의 영화 <필름 소셜리즘>을 놓치고 말았다. 그 누구도 원망할 수 없다.<필름 소셜리즘>을 영화제 기간이 아닌 때 볼 수 있었으면 하는 실현불가능한 소망을 가질 뿐이다.
그래서 나는 아예 영화제의 화제작이나 언론에서 많이 소개되는 영화,그리고 영화잡지들이 추천하는 영화들은 거의 포기하는 편이다.차라리 오래된 영화,특히 전설의 거장들이 오래 전에 만든 영화 하나쯤을 꼭 내 필견 리스트에 포함시킨다.그것은 지난 10년 동안 늘 그래 왔다.올해 내가 고른 나만의 클래식은 포르투갈의 마뇰 드 올리베이라 감독의 <베닐드 혹은 성모>였다.
1908년에 태어났으며 지금도 생존해 있는 전설의 포르투갈 영화인.100세가 넘은 지금도 현역이 아니라고는 말할 수 없는 남유럽의 대부님.이 영화는 그가 만든 1975년도 영화가 되겠다.나는 경의를 표하는 마음으로 극장에 입장했다.
영화는 종교적 광신에 빠져 자신이 수태한 아이가 천사에 의해서 잉태되었다고 주장하는,말하자면 스스로 성모 마리아라고 주장하는 소녀 베닐드에 관한 이야기이다.그녀를 둘러싸고,의사와 신부,그리고 그녀를 사랑하는 사촌 오빠,그의 어머니,그녀의 아버지가 벌이는 비극적인 소동극이다.올리베이라는 이 이야기를 연극적 양식으로 풀어냈다.연극 '적'양식이라기 보다는 아예 영화를 연극으로 만들어버리겠다고 작정한 듯,이 영화는 연극적 양상을 그대로 따라 간다.
영화는 자막을 통해 1막,2막,3막 하는 식으로 막과 장을 나누며 공간은 실내에 고정되어 있다.배우들의 동선 역시 연극 무대의 그것과 거의 비슷하다.그러나 거장께서는 그 공간을 심심하게 놓아두지 않는다.그는 빛을 사용하여 영화의 공간을 교묘하게 분할하는데,어떤 때는 그 분할을 인물들의 심리적 상황과 갈등에,어떤 때는 순수한 미학을 위하여 빛의 나눔을 이용한다.
그런 종류의 분할에 탄복하다가,나는 문득 작년에 전주영화제에서 보았던 포르투갈의 페드로 코스타 감독 영화의 '분할 미학'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깨달았다.포르투갈 영화인들에겐 화면을 가르고 나누는 미학적 유전자가 흐르고 있는 것이었다.그리고 올리베이라 할아버지야말로 그 유전자의 오리지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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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 그런 모멘텀적인 순간들이 있다.영화를 보다가 느끼는 이상스런 정지의 순간.두뇌가 스스로 멈춰서면서,몸의 오감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시간.영화는 어떤 순간 보는 사람의 두뇌 영역 일부에 급작스럽게 스며들고,그곳의 가장 부드러운 부분에 어린 나무처럼 심어진다.영화를 보는 방법 중 하나는 바로 이런 모멘텀을 찾아헤매는 것이다.영화가 인간 개개인을 향해 가장 쉽게 복무할 수 있는 방법도 바로 이것이다.그리고 이런 모멘텀은 결국 관객에게 행복감을 안겨 준다.
그런 심정들은 어떤 비장함이나 스펙터클한 광대함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가끔은 그냥 화면 한 구석에 홀린 듯이 서 있는 소품 속에서도 얻어진다.가령 오늘 영화들의 어떤 장면.
세상의 부조리함에 연약한 광끼로 대항하는 이 소녀의 또 하나의 부조리함은 테이블 위에 장식된 꽃병 하나로 상징된다.화면은 한동안 이 꽃병의 무심함을 비춘다.그리고 그 너머엔 어쩌면 무죄한 희생자일 수도 있는 소녀가 있다.카메라는 소녀와 꽃을 한 화면에 집어넣어서 관객에게 느낌을 요구하고,그 순간 어떤 관객들은 이 꽃과 가엾은 소녀의 이미지를 공감각적으로 느끼는 것이다.이런 모멘텀은 그냥 한 순간으로 끝나지 않는다.이런 순간은 영화의 내부에 완전한 닻을 내리면서도,그 영화를 둘러싼 외부세계의 현실을 끌어당기고 형상화한다.영화란 결코 자신의 현실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의 모든 이야기들은 영화가 만들어지기 바로 전 해에 몰락한 포르투갈의 살라자르 독재정권으로 연결된다.생래적으로 순결한 듯 보이는 소녀는 원치 않는 섹스를 통한 임신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다.그녀는 기독교의 마술적인 교리로 도피하여 자신의 상황을 해결하려 한다.물론 이 소녀의 이런 태도는 포르투갈의 민중들을 상징한다.이때 그녀를 도와주어야 할 사람들.의사로 대표되는 지식인,신부가 대변하는 종교,그리고 가족들,심지어 사랑하는 남자까지도 이런 부조리한 상황에 완벽히 무력하다.
그들은 어두운 거실에 앉은 채 무력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아무도 소녀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독재정권에 협력했다고 얘기할 수 있는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을 상징하는 것은 소녀를 사랑하는 남자의 어머니이다.그녀는 소녀를 구하려는 아들의 시도를 방해하고 분노를 터뜨리고 소녀에게 직접적인 압박을 가한다.그러나 그녀는 이 저택을 에워싼 바람을 느낀다.그녀는 이 저택이 -포르투갈의 사회가- 자신으로서는 정체를 잘 알 수 없는 바람에 둘러싸여 있다고 생각하고,그 바람으로부터 저택을 지키려 필사적으로 창문을 닫아보려고 노력하지만,창문은 잘 닫겨지지 않는다.
바람,저택 그리고 저 여인이 무엇을 의미하는 가에 대해서는,아마 관객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를 것이다.그러나 어떤 관객에겐 저 상황이 매우 명백해 보일 것이다.또 어떤 관객에겐 저 여인과 저 창문이 의혹과 불만투성이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현실은 이런 식으로 영화와 관계를 맺는 것이다.
4.어슬렁거림.황사.강풍
적어도 은별이가 16세가 되기 전까지는 혼자서 영화제를 어슬렁거려야 할 운명인 나는,이번에도 어김없이 영화제의 점심 시간에 전주의 도로들을 어슬렁거렸다.정말 전주는 어슬렁거리기엔 정말 최적의 도시다.게다가 전주영화제는 언제나 5월에 열린다.감미로운 잠으로 유도하는 따스한 봄의 전주,그리고 전주의 영화 거리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냥 걸어만 다녀도 평화로울 수 있다.나는 지난 몇년간 그 경험을 육체로 기억했고,그것은 언제나 전주에 대한 기대의 일부분을 이룬다.
그러나 올해의 전주는 양쪽 눈의 결막을 공격하는 황사와 차가운 강풍으로 나의 기대에 응답했다.추웠고 비가 내릴 듯도 보였다.그래도 굴하지 않으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추웠고 따가웠다.김치찌개를 먹으러 도피하는 수 밖에 없었다.가끔 영화의 신은 이렇게 고약한 장난을 친다.식당에 들어갔더니 혼자서 찌개를 먹으러 들어와 네 개의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는 네 명의 남자들이 나를 쳐다보았다.같이 먹으면 어떻겠느냐고 물어보려다가 참았다.아내는 그런 식으로 낯선 사람들에게 스스럼없이 구는 내 성향을 반가워하지 않는다.나는 언제나 내 직업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고,어렸을 땐 안 그랬다고 변명한다.먹고서,비장의 박카스를 한 병 꺼내 마시고서 오후의 영화들을 기다린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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