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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풍과 황사 속에 친구가 되다.<전주국제영화제 기행>2.

신의 영화들/culture club

by 폴사이먼 2011. 5. 18.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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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공간과 시간 그리고 역사 아, 대애애애박.

 

점심을 먹고 난 다음 시간의 영화는,점심을 먹고 난 다음 시간의 수업처럼 졸음과의 전투가 될 수 밖에 없다.아무리 강력한 까페인으로 대비한다고 하더라도 수마처럼 강력한 적을 만나면 일정 부분 패배할 수 있다는 진리를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더구나 그 시간에 보는 영화가  각성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충분한 흥미를 유발하지 않는다면 수마와의 전투는 거의 가망이 없어진다.졸립게 하는 강의를 들으면 어쩔 수 없이 고개가 책상을 향해 숙여지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오후의 첫 영화, <폐허의 로빈슨> 역시 저절로 수마를 불러오는 영화이다.뭐,어쩔 수 없다.특별한 줄거리도 없고 등장하는 캐릭터도 없으니까.아예 배우는 나오지도 않는다.스크린은 숲과 들과 도시와 집들의 풍경으로 가득 차 있고,들려오는 소리라곤 우아하고 격조 높지만 건조하기 이를 데 없는 명배우 바네사 레드그레이브의 내레이션 소리 뿐이다.당연히 음악은 없다.(음악이 있었다면 그 시간에 나는 잠이 들어 있어서 듣지 못했던 것이다)

 

영화가 끝나고 좁은 통로를 거쳐서 무리지어 빠져 나오던 관객 중 하나가 무리의 심정을 대변했다.그는 이렇게 말했다.

 

- 대애박!!

 

그의 심정을 이해한다.하지만 속으로만 말했어야 괜챦을 말이었다.게다가 대애박~~까지는 아니었다.영국의 아방가르드 감독 패트릭 켈리는 이렇게까지 경멸을 살 만한 감독은 아니다.게다가 진정한 경멸은 언제나 예의를 수반한다.물론 그의 영화가 수면을 유도한  것만은 사실이다.그러나 영화의 세계엔 그런 영화들이 넘쳐난다.저녁 시간에 예매한 영화인 <토리노의 말>의 벨라 타르 감독은 대애애애애박~정도가 된다.그의 <사탄 탱고>의 러닝 타임은 438분이다.자막 없이,그것도 외국에서 영화를 보던 나는 거의 시체가 되는 체험을 했었다.

 

더구나 영화에 있어서,말과 배우와 스펙터클과 줄거리는 반드시 필요한 요소가 아니다.그들이 없어도 영화는 성립된다.그러나 무엇을 위하여 대사와 배우와 줄거리를 없애버렸느냐가 문제가 될 것이다.또 꼭 그렇게 해야만 했느냐에 대한 질문에도 영화 작가는 대답을 준비해야만 한다.그것은 의무다.물론 여러가지 대답이 가능하다.그냥 돈이 없어서라는 볼멘 소리도 충분한 대답으로 기능할 수 있다.다만 좀 더 넓게 생각해야 한다.그렇게 하지 않으면 모든 영화와 친구가 되기란 불가능하다.우리는 친구가 되기 위해서 영화를 만나는 것이다.

 

 

 

<폐허의 로빈슨>은 시공간을 다루는 방법을 비틀어버린 영화다.페트릭 켈리는 먼저 공간들을 상정한다.그리고 그 공간에 얽혀 있는 수백년의 역사를 탐구한다.그리고 그 역사를 관객에게 내레이션을 통해 설명한다.그래서 우리는 그의 화면을 통해 역사를 만난다.사실  이런 식의 접근방식은 매우 정상적이고 타당한 일이다.하나의 장소엔 수많은 사람들이 숨쉬었었고 죽었고 살아갔다.우리는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공간을 자신만의 것으로 생각하며 살아가지만,천만의 말씀,지금 당신이 존재하는 공간에서 숨쉬었던 생물은 당신만이 아니다.내가 지금 앉아있는 진료실은 어쩌면 수백년전  여우굴이었을런지도 모른다.여우와 여우새끼들이 나와 같은 공간을 공유했을 수도 있는 것이다.(여기서 좀 더 상상력을 발휘하면 요괴가 되어버린 여우들과,뱀파이어들까지 등장할 수 있지만 이렇게까지 오버해버리면 재미가 없어진다)

 

물론 이것은 선택의 문제이다.그 공간에 어떤 역사를,그리고 어떤 시간을 첨부해야 할 것이냐 하는 문제.그것은 작가의 작가적 선택이다.그래서 여기에 객관성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말을 내뱉는다는 것은 무언가를 선택한다는 것이다.퇴장하던 관객이 대애애박~이라는 말을 내뱉어서,패트릭 켈리에 대한 태도를 선택해버린 것처럼 말이다.우리는 말을 할 때 우리의 입장을 선택하는 것이다.영화 <폐허의 로빈슨>이 직접적으로 다루는 역사는,그 영화가 선택한 역사는 영국의 자본주의다.

 

그는 과학자 보일과 그의 이론이 기반이 되었을 수도 있는 증기기관차,영국 자본주의의 혈관이었던 철로와,파이프 라인을 공간들에 붙여 놓는다.시인 셸리를 등장시키기도 한다.영국의 관객들은 눈 앞에 그려지는 풍경에 대입되는 역사가 자신의 역사라는 것을 안다.그리고 자신의 공간이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를 깨닫게 된다.마가렛 대처 이후의 시대를 빼놓지 않기 때문이다.그래서 관객은 이 공간이 어떤 시간으로 향하게 될지를 예측하게 된다.그리고 그 예측에 수반될 결과와 그 결과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선택하게 된다.물론 패트릭 켈리는 자신의 의견을 강변할 정도로 촌스러운 사람은 아니다.그래서 영화는 결국 신자유주의 시대의 영국으로 다가가게 된다.

 

이런 얘기들,얼마든지 재미있게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딱딱한 얘기를 재밌게 변화시키는 방법도 많기 때문이다.그러나 이 영화는 어쨌든 졸음을 유발한다.그리고 이것은 다분히 의도적이다.영화는 감성적인 충격 대신 이성적인 각성을 요구한다.심지어 카메라는 가끔씩 하나의 풍경에 멈춰 서 있다.바네사 레드그레이브의 나레이션도 그 시간엔 끊어진다.관객은 감독이 제시한 풍경을 아무 말도 못하고 지켜보기만 해야 한다.

 

그  풍경들은 의외로 꽃이 가득한 들판,바위 위에 끼인 이끼,고사리,오래 된 건물 같은 것이다.

 

 

 

 

게다가 이 멈춤은 통상적인 멈춤의 시간,또 관객들이 용이하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의 한계를 살짝 넘어가 버린다.사실상 이 영화의 졸림은 이런 요소 때문에 비롯된다고도 말할 수 있다.이 영화는 이런 시간들을 시도 때도 없이 집어넣고 있다.그리고 그것은 모종의 요구이다.어떤 집중.이젠 복원되지 않을 것들에 대한 환기.또 이 공간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라는 것에 대한 주장.대처리즘 이후의 영국자본주의가 소멸시키고 있는 것의 정체..이 영화는 육체적인 졸림과 이성적인 각성을 함께 유도하고 있다.기묘한 각성제,그리고 기묘한 수면유도제.

 

4대강이 생각났다.파헤쳐지는 강바닥에 왜 아무도 카메라를 들이대지 않는가? 왜 아무도 그 강의 역사를 운위하지 않는가.

 

6.도시.인상.친구.

 

바깥은 여전히 차가운 바람이 지배하고 있었다.황사 속에 섞인 따끔한 알갱이들 역시 각막 긁어대기를 멈추지 않고 있었고.몸은 또 한 번 까페인을 요구했으며 나는 아예 에스프레소를 마셨다.가슴께가 어릿해졌다.

 

영화의 거리는 영화제 기간 동안,단순히 영화만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노래와 춤과 사람들이 한데 어울린다.어떤 거리에서는 무용 공연이 진행되고 있었고 양쪽 포도에 길게 늘어선 사람들이 말없이 무용수의 격렬한 춤사위를 지켜보고 있었다.작년이었나, '시와'라는 이름의 여성 싱어송 라이터의 공연을 보았었다.그녀는 유연하고 맑고 부드러웠다.봄날의 오후와 너무도 어울려서,가끔 던져대는 그녀의 농담에도 아랑곳없이 꼼짝도 않고 지켜볼 수 있는 거리 공연을 선보였었다.그러나 그녀의 맑음과 부드러움 속엔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곧고 직접적인 에너지 같은 것이 있었다.추호도 흔들리지 않겠다는 의지,그러나 벨벳 같은 부드러움 속에 쌓여있는 의지.그녀의 존재감은 내부로부터 흘러나오는 영혼의 힘으로부터 비롯된다.그것이 그때의 느낌이었다.

 

얼마 전 보았던 광주민중항쟁 다큐멘터리 <오월애>의 음악도 시와가 담당했다.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며 흘러나오던 그녀의 노래 소리는 일 년 전 느꼈던 그녀에 대한 직관을 확인시켜 주었었다...

 

전주의 세번째 영화는 스페인 감독인 호세 루이스 게린이 프랑스에서 찍은(아마도) <실비아의 도시에서>였다.어쩌면 나는 이 영화를 보는 것에 실패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그 영화는 그냥 인상으로만 남았던 것이다.아름다운 배우들의 얼굴들과 그들의 섬세한 눈빛,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건물들의 인상과 도시의 소음들.그것은 그냥 인상이다.거기서 멈췄다.관객이 바라보는 영화의 세계 속에서 그렇게 되어버리는 영화들도 있다.그러나 이미지와 사운드로부터 비롯된 인상은 관객의 영혼 속에 스며들듯 박혀 친구가 된다.그들을 친구로 받아들여서 그들의 자리를 마음 속 어딘가에 마련하게 되면,언젠가 어떤 시간에 그들은 슬며시 부활한다.그래서 새로운 의미로 재탄생한다.이 영화는 내게 그런 영화였다.

 

 

도시의 낯선 여행자인 이 남자는 그 도시를 마치 유령처럼 어슬렁거린다.영화제의 영화를 보러 온 다른 도시의 관객들이 영화제의 도시들을 어슬렁거리듯.그는 까페에 앉아 사람들을 쳐다보고 그들을 데생한다.그에게 말을 거는 것은 기념품을 파는 행상 남자 외엔 없는 것 같고,그의 관찰은 영화 내내 멈추지 않는다.그는 자신의 관찰을 기록으로라도 남기려는 듯,자신이 지니고 다니는 수첩에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다.

 

 

 

그의 시점을 통해,우리 역시 그 도시를 어슬렁거린다.영화는 내내 도시의 소음들-전차 소리,자동차 소리,사람들의 두리번거리는 소리,자전거의 종소리,따르릉 따르릉 비켜나세요..-을 관객에게 전달한다.풍경과 소음은 낯선 도시의 세계 하나를 직접적으로 구성하고,영화의 내러티브와는 별개로 관객으로 하여금 이 도시에 대한 판단을 요구한다.그러나 관객이 무응답으로 일관한다 해도 크게 상관은 없다.

 

그것은 우리와 영화의 주인공 남성이,본질적으로 그 도시에 있어서 유령이기 때문이다.우리는 분명히 그 도시에 존재하지 않는다.우리는 관찰자일 뿐이다.그러나 그와 우리는 다르다.우리는 관객이라는 신분 때문에 조금은 불편하지만 근본적으로는 편안한 의자에 앉아있지만,영화 속 그는 자신의 존재가 지워져가고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을 견디기가 힘들다.그는 자신의 존재증명을 원한다.

 

그래서 그는 존재의 닻 하나를 선택한다.그것은 기억이다.그는 몇 년 전 이 도시에서,실비아라는 여자를 만났었다고 주장하며,어떤 여성 하나를 실비아로 지목한다.그리고 그녀의 뒤를 미행하듯 따라다니기 시작한다.

 

 

 

 

 

그때부터 영화는 그의 그녀에 대한 미행에 받쳐진다.그러나 그녀 실비아는 그를 공식적으로 부인한다.그가 실비아를 만났다고 주장하는 시기에는  도시에 살고 있지도 않았다고 주장한다.그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지 못한다.그의 계속되는 주장에 드디어 실비아는 그에게 침묵을 요구한다.

 

 

 

그녀는  이런 종류의 시도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존재란 기억에 의해서 성립하지 않는다는 말일까? 아니면 자기 존재를 다른 사람의 존재로 투사해서 성립하려는 인간 특유의 비루한 성향에 대한 가혹한 거부로써의 침묵을 그녀는 요구하는 것일까? 어떤 식으로든 생각이 가능하다.

 

결국 그는 밤의 우울에 잠긴다.밤의 까페에서 술을 마시고 원나잇 스탠드로 나아간다.결국 그는 자기 존재 증명에 실패한다.그러나 실비아는 여전히 자기 삶을 살아가고 있고,도시 역시 건재하다.남자 역시 언젠가는 자신의 도시를 찾을 것이다.그는 지금 '실비아의 도시'에 있을 뿐이다.언젠가 자신이 자기 영혼의 주소로 삼으려 했던 바로 그 도시 말이다.

                                 -                            -

영화가 끝나자 이 영화를 만든 감독 호세 루이스 게린이 등장한다.그는 내가 영화를 보다가 생각했던 '유령'이라는 단어를 언급한다.그는 '유령' 역시 해석의 가능성 하나로 남겨 놓는다.나는 착각의 가능성을 줄여놓을 수 있었다는 안도감으로 상영관을 빠져나온다.

 

7.토리노의 말,친구

 

전주의 마지막 영화는 벨라 타르 감독의 <토리노의 말>이었다.영혼의 심연을 겨냥하는 걸작이었다.이 영화에 대한 코멘트는 지금 할 수 없다.언젠가 개봉하면 -이 영화는 우리나라에 개봉한다고 했다- 그때나 얘기할까 한다.지금은 <토리노의 말>이라는 친구의 주소를,그의 존재를 내 마음속 어딘가에 그냥 지정만 해놓고 싶다.

 

이 영화의 러닝타임이 세 시간을 넘겼기 때문에 아내는 2건의 부재중 전화로 현실을 환기했다.나는 주차장을 향해 걸어가며 아내와 통화했다.영상통화였으므로 가끔씩 은별이가 불쑥불쑥 화면으로 나타났다.나는 <은별이와 아내의 도시>에 살고 있다.

 

통화가 약간 길어지다가,아내가 물었다.

-그게 그렇게 재밌어?

'그건'물론 영화제다.

 

-응.그런 것 같아.뭔가가 씻겨져 내려가는 느낌이야.

-그런 건 나도 알겠는데,좀 다른 설명은 없어?

 

아내 역시 약간의 의문에 쌓여있는 느낌인 모양이다.나는 간단하게 대답했다.말이 안될런지도 모르지만,나는 영화제에 초대된 수많은 영화들의 친구가 된 느낌이라고,그리고 그들에게 힘을 북돋아주고 격려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서 이렇게 까페인에 의존하고 있는 거라고.

 

아내가 조심조심 운전해서 내려오라고 얘기하며 말했다.

-친구가 있는 건 참 좋은 거야.

 

또한 아내와 나는 좋은 친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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