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이 시작되었고 눈과 추위가 교대로 사람들을 찾아온다.새해가 시작되었다고는 해도,뭐 크게 달라진 건 없다.똑같은 시간에 출근하고 본질적으로는 같은 일을 반복하고 일이 끝나면 퇴근해서 은별이와 논다.아내는 갑상선에 문제가 생겨서 정밀검사를 요하는 상태이고,자신의 상태를 재빨리 잡아내지 못했다고 나를 타박한다.40대가 되더니,아내 역시 자신의 건강에 불안감을 느끼는 모양이다.
시작은 거실에 굴러다니던 당나귀 인형이었다.이 당나귀는 아기곰 푸우에 나오는 그 당나귀로 몇 년 전 은별이가 갖고 놀던 인형이었다.그 당나귀를 보는 순간,나는 은별이의 인형들을 모조리 가지고 나와서 은별이와 함께 인형극을 시작했는데,뭐하려고 그랬는지 셰익스피어의 '한여름밤의 꿈'을 임기응변식으로 변환한 내용을 공연하기 시작했다.가령 바비 인형은 히폴리터 여왕이고 곰 인형은 티시어스 공작이며,로봇은 라이샌더,아내가 만든 퀼트소녀는 허미어고..이런 식으로 배역이 결정되었다.
(모든 것은 바로 이 녀석 때문에 시작되었다)
그러나 셰익스피어를 전적인 구라 실력과 임기응변에만 의존해서 이제 일곱 살이 된 꼬마에게 전달한다는 건 무리였다.특히 사랑의 미약-잠잘 때 눈에 뿌리면 눈 뜨자마자 본 첫번째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는-을 은별이에게 설명한다는 것이 가장 문제였다.은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정말 그런 약이 있느냐고 나를 추궁했으며,나는 차마 딸에게 자신있게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그냥 '얘기니까 그렇지'라는 식으로 얼버무릴 수 밖에 없었다.그러나 이 사랑의 미약은 '한여름밤의 꿈'의 핵심이다.은별이 또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당나귀를 사랑하는 요정의 여왕을 잘 받아들이질 못했다.그래서 우리의 인형극은 어영부영 타협적인 결론을 향해 나아갈 수 밖에 없었다.
그날 밤 은별이가 잠들었을 때,나는 책장에서 셰익스피어를 꺼내들었다.그리고 우리나라에 한창 임진왜란이 벌어지고 이순신 장군이 나라를 구원하던 그 당시에,런던에서 활약했던 구라 대마왕 셰익스피어를 읽기 시작했다.물론 어렸을 때 읽었던 셰익스피어와는 달랐다.원문으로 읽을 실력은 안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번역판으로 읽는 데도 은근히 가슴 뒷 쪽을 때리는 대사들이 즐비했다.
그래서 몇몇 대사들을 이 포스팅에 전시함으로써 2011년의 첫 글을 쓰려 한다.(그래선 안되는 건 아니겠지?)
1.악령은 설령 대지에 덮여 있더라도 사람의 눈에 드러나고 마는 법이다.(햄릿 1막2장)
아버지의 유령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햄릿이 얘기하는 대사다.어쩐지 미카엘 하네케의 <하얀 리본>을 다시 생각내게 하는 대사이지만,또 지금의 우리 현실을 풍자하는 대사로 읽히기도 한다.더구나 현대의 시간은 더 빨리 흐른다.지금 이 시대의 권력이 행사하는 무소불위의 힘 역시,그것이 악령이나 악함과 상관있는 내용이라면,언젠가 드러나고야 만다.한명숙 전 총리의 뇌물수수사건이 생각나기도 했다.이 사건은 적어도 우리나라의 사법시계를 30년 정도는 뒤로 돌렸다.정권의 하부 기계들의 무능함까지 맞닥뜨리게 되는 사건이다.옛시절엔 그나마 밝혀지지도 않았었다.억울하게 죽거나 다쳤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가.시대는 갈수록 무서운 공포의 시기를 향해 간다.
2.지금이 제일 비참하다고 할 수 있는 동안은 아직 제일 비참한 게 아니야.(리어왕 4막 1장의 에드거의 대사)
최상의 낙관성과 최악의 비극성이 공존하는 대사다.하긴 그렇다.극도의 비참함은 사람을 침묵 속에 빠뜨린다.입을 열어 항의하고 종주먹을 들이대어 분노를 외칠 수 있다면,우리는 우리를 비참함에 처하게 하는 대상과 전투할 수 있다.그러나 전쟁에 패배했을 때 기다리는 것은 침묵 외엔 없다.20세기 인류 역사가 그랬다.
3.최선을 다하고도 최악을 초래한 것은 우리가 처음이 아닙니다.하지만 국왕이신 아버님의 고생을 생각하면 저는 맥이 풀립니다.저 혼자라면 믿지 못할 운명의 여신의 찡그린 얼굴쯤은 노려봐 줄 수도 있습니다.(리어왕 5막 3장 코델리아)
코델리아가 적들에게 목이 잘려 죽기 직전에 했던 대사일 거다.셰익스피어가 썼던 가장 솔직하고 담백한 문장 중 하나인데,코델리아 그녀의 말처럼 최선을 다하고도 최악을 초래한 것은 우리가 처음이 아니다.그러나 그런 가증스런 실패를 통해 우리는 자꾸 배우고 앞으로 전진하는 것이다.운명의 여신의 찡그린 얼굴을 노려보면서 말이다.
4.아무리 험악한 날이라도 시간은 지나간다(맥베드 1막 3장에서 맥베드가.)
악한들이 이런 생각을 하면 그것처럼 답답한 노릇은 없다.험악함이라는 것도 다 상대적이어서,아무리 험악한 시간이라도 시계의 초침은 흐른다고 생각하면서 청문회를 견디는 옛 시대의 정치인도 존재했다.반면 험악한 시간을 굳게 견디며 버티어야 할 자세는 그 누구에게라도 필요하다.시절이 더럽고 망망한 공기 속을 떠돌고만 있을 때,그 시간에 작은 희망이라도 부여할 가능성들을 암시하는 대사로 맥베드의 저 말을 상기할 필요도 있다.
5.아직도 피비린내가 나는구나.아라비아의 온갖 향수를 가지고도 이 작은 손 하나를 말끔히 씻어내지는 못할 것이다.(맥베드 5막 1장의 맥베드 부인의 독백)
어쩔 수 없이 용산의 남일당을 생각했다.청와대 조찬기도회엘 가는 김진홍 목사는 자신을 아라비아의 온갖 향수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러나 사람들의 죽음으로 인한 피비린내는 좀처럼 없어지지 않는다.그 사건은 이 정부의 영원한 멍에와 냄새로 남을 것이다.(맥베드 부인은 자살한다.)
6.사람을 죽인 피 위에 구축한 토대는 평안하지 못하고,타인을 죽임으로써 차지한 생명은 확실하지 못하다.(존왕 4막 2장의 존왕의 대사)
이 당연한 진리를 권력자들은 모른다.응징을 피할 수 있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들은 자신을 위로한다.그러나 피 위에 세워진 권좌처럼 처절한 것은 없다.끈적한 핏물들은 권좌의 의자 다리들을 잠식한다.물론 특수한 양심을 가진 인간들도 있다.그런 양심을 마사지해주는 지식인들도 존재한다.그들이 모르는 것은 눈물이다.
7.내 자격도 내 인격도 알지 못하면서,내 행위를 비판하는 무지한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관직의 운명이요,미덕이 헤쳐 나가야 할 가시밭입니다.악의에 찬 비판에 부닥치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여,필요한 행위를 사양해서는 안 됩니다.비판이란 것은 탐욕스러운 물고기처럼 배를 따라다니게 마련입니다.(헨리 8세 1막 2장의 울지 추기경의 대사)
사실 이 대사는 천정배 의원에게 들려주고 싶다.그는 한나라당을 소탕해야 한다고 말했다가 온갖 비판을 들었다.그러나 그를 따라다니는 것은 어디까지나 탐욕스러운 물고기떼들이다.그러나 반면,천정배가 욕했던 사람들이 이 대사를 활용할 수도 있다.그들 역시 양심적인 비판을 악의에 찬 비판이라 폄하하기도 한다.문제는 간단하다.자격과 인격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예를 들어 보온병이나 자연산에게 무슨 인격이 있겠는가?)
8.악마도 제 잇속을 위해서라면 성서를 인용한다네.(베니스의 상인 1막 3장에서 안토니오)
난투극을 벌이다 광대뼈가 함몰되었다는 아저씨들 역시 잇속을 위해서라면 성서를 인용한다.수치스런 기독교인들의 대명사로 거론되어야 할 그분들도 평소엔 성서의 얘기들을 입에다 달고 다닐 것이다.
이 교회에서 폭력사건이 일어난 것이 이번 한 번만은 아니고,이들이 성서를 인용해서 서로를 사탄의 자식들이라고 몰아붙일 것이 이번 한 번만은 아닐 테고,성서 역시 온갖 폭력과 전쟁과 살인이 넘쳐나긴 하지만...
재밌는 것은 이 대사가,베니스의 상인 샤일록이 성서를 인용했을 때-샤일록은 구약성서의 야곱이 재산(야곱은 양치기이므로 양이 재산이다.목사들의 재산은 그들의 양인 신도들이다)을 불렸던 방법에 대해서 얘기한다- 안토니오가 맞받아친 대사라는 것이다.
9.올리비아; 주정뱅이는 무엇을 닮았지?
어릿광대;물에 빠져 죽은 사람을 닮았고,바보를 닮았으며,정신병자를 닮았습죠.적당한 분량 이상
으로 한 잔을 마시면 바보가 되고,두 잔 마시면 정신병자가 되고,석 잔 마시면 익사하죠
(십이야 1막 5장의 대화)
아내가 이 대사를 읽었더라면 냉장고에 대문짝만하게 붙여 놓고 나를 압박했을 것이 틀림없다.어쨌든 나는 올해엔 술의 양을 좀 줄여야 한다.쓸개를 떼어낸 이후로 주량의 감소를 피부로 느끼고 있다.익사자나 바보나 정신병자가 되어선 안 된다.^^
10.거인의 힘을 가진다는 것은 멋지지만,그것을 거인과 같이 사용하는 것은 포학함이 됩니다.
우리 사회의 큰 권력과 작은 권력들..도대체 이런 말들의 의미를 알고나 있는지 모르겠다.<되는대로>에 나오는 이 말은 그리 유명한 대사는 아니지만,그 누구에게도 의미를 가지는 말이다.그 누구도 완전히 권력없이 사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11.권위를 가진 사람은 완강한 곰이겠지만,돈으로 자유롭게 끌려다니는 일이 종종 있다.(셰익스피어 만년의 희곡 겨울이야기 속 단역인 시골사람의 대사)
삼성이 생각나지 않는가? 삼성의 돈과 그들에게 곰처럼 사육당하는 엘리트들.그들은 자신이 완강한 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나 있는 걸까? 입으로는 삼성을 욕하다가도 아들이나 딸이 삼성그룹에 입사했다는 것을 자랑하는 사람들은 또 뭘까.
12.왕후의 대리석이거나 황금의 기념비도
이 힘이 넘치는 시보다 오래 가지는 못한다.
그리고 그대는 이 시로 노래되어 계속 빛나매
먼지를 쓰고 청소되는 일 없는 돌비보다 더 빛나라.(셰익스피어 소네트 55번)
글쎄,돈과 지위가 최우선되는 사회에서,이웃이나 공동체 속 타인보다는 자기 자신과 가족의 안위만이 최우선되는 사회에서,시의 힘을 상찬한다는 것은 어쩌면 가엾게 여김을 당하거나 비웃음을 사게 되는 일일런지도 모른다.그러나 나는 어쩔 수 없이 ,인생의 세속성에 가장 반대편에 서 있는 삶의 본원성으로서의 시를 귀중하게 여길 수 밖에 없다.
시-글을 쓰는 것은 힘들고 시간이 들고 화살같은 시간 속에 사는 사람들의 입장에선 손해 보는 일일 것이다.그러나 그럼 어떠랴,황금 기념비가 필요없다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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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여러분 행복한 새해 되세요.은별이도 인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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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리고 그 요망한 입 좀 다물어야 될 분들 몇 분 계시다.그들을 위한 한 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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