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타인의 가을
가을이 간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가을은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새벽과 밤엔 차가운 바람이 겨울에 자신들이 내뿜게 될 날카로움을 예시하기라도 하듯 차갑고 싸늘하게 대기를 지배하지만,한낮의 공기 속엔 아직 가을 특유의 신선한 냄새가 사람들의 육체 전체를 간질이듯 감싸고 있다.
나는 이 가을의 내음들을 병원 옥외 주차장의 작은 하늘 밑에서 맛보고 있다.눈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면,병원 건물과 옆 건물들의 선들로 구획지어진 높다란 가을 하늘이 불규칙한 형태의 도형을 이루며 내 눈을 위안한다.그러면 나는 내게 유일하게 선사된 가을의 공간을 위하여,또 나 자신을 위하여 안간힘을 다해서 그 하늘들을 쳐다본다.
내게 가을은 언제나 생각의 계절이고 사랑의 계절이었다.내 모든 사랑들은 언제나 가을에 시작되었고,내 모든 정신의 유익한 것들은 가을을 맞이하면 꿈틀거리듯 피어올라 더 넓은 시공간을 향하여 치달아갔었다.가을 밤이 풍기는 방향 같은 냄새들은 내겐 거의 행복이었고,그 냄새들은 도심과 도시의 변두리,들판과 산을 가리지 않고 풍겨나오는 가을의 트레이드 마크였다.정신은 잠긴 듯 닫혀있는 견고한 자신의 성곽을 서서히 허물어뜨리고,즐거운 해이함 쪽을 향하여 방향을 틀곤 했었다.따라서 내게 11월은 언제나 가장 좋은 계절이었고,컨디션 역시 최상을 향하여 줄달음치는 상쾌한 시즌이었다.(실제로 학창 시절에도 11월에 치르는 시험이 성적이 가장 좋았었다.그건 아마 내가 벼락치기의 달인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올해의 11월,올해의 가을엔 그런 종류의 행복감을 누려보질 못했다.계속 이어졌던 감기와 몸살,육체적인 컨디션을 아랑곳하지 않는 분주한 업무들,처리해야 할 복잡한 일들이 엉키고 설켜서 어떻게 지나갔는 지도 모를 시간들이 계속되고 있었다.
최근 내게 시간이란 일종의 덩어리 같은,묵직한 질감을 가지고 다가온다.하루는 이제 시간 단위로 흐르지 않는다.달은 일별로 가지 않는다.지금의 내게 시간은 블록화되어있다.어떤 중차대한 과정을 치르듯 또는 이 거리에서 저 거리를 향하여 자동차를 운전해가듯,블록화된 차원들을 지나가면 그제서야 나는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실감하곤 한다.이 정신적인 현상이 너무 바빠서 생기고 있는 것인지,아니면 어떤 노화의 과정인지,아니면 자연스러운 인생진행의 일부인지 나는 아직 가늠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40대 중반을 향하여 공공연하게 흘러가는 이 가을을 약간 정리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어차피 내가 글을 쓰는 이 공간은 기록을 위해 존재하기도 한다.나중에 다시 보게 될지,기억이나마 하게 될 지 알 수 없지만,이 기록은 아주 조그만 중요성 하나만으로도 적어도 내게는 의미를 갖는다.
2.나의 가을-부산으로의 짧은 여행
내게 가을은 대개 여행이었다.경주나 전라도의 산사들이나 서남해안의 고즈넉한 바닷가로 나는 정확한 목적지를 정하지 않은 채 떠나곤 했었다.그렇게 해서 우연히 만나게 되는 사람들과 사물들,그리고 시간의 향기를 오래도록 간직하고 있다가,그 진동과 파장을 불시에 드러내는 오래된 흔적들을 만나곤 했었다.그렇게 해서 만나게 되었던 고찰들의 대웅전과 밀려오던 파도의 부드러운 곡선들을 나는 지금도 시각과 후각의 감각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부산의 국제영화제가 있다.20세기의 세기말부터 나를 북돋아주고 위로해주던 영화의 난장판.짜인 듯 평범하게 돌아가던 일상으로부터 나를 잠깐이나마 탈출시켰던 정신의 환기구로서,부산에서의 며칠 간은 지난 십 수년을 기능해오고 있었다.지금도 잊을 수 없는 몇몇 영화들은 언제나 적시적소에서 나타나 찌든 내 정신을 구원하곤 했다.영화광들로 가득찬 거리가 풍기는 심상챦은 열기는 내밀하게 들끊는 축제처럼 사람의 마음을 요동치게 만들고 두뇌의 호르몬 분비 메카니즘을 작동시켰었다.
물론 시간이 좀 흐르긴 흘렀다.과거와 같은 강도의 심장박동은 이제 없다.이제 그 영화제는 일종의 정례행사처럼,고향을 향하여 도로들을 메우는 귀성객들의 심정처럼 평범하게 그 크기가 다운사이징되어버린 느낌도 있다.해묵은 비상구이며 남들도 다 알아버린 비밀의 숲처럼 변한 것이다. 최근 몇년간의 PIFF 분위기는 나를 실망시키기도 했다.영화들 역시 예전처럼 빛나지 않았다.고전영화의 빛나는 향취,화면의 끝도 없는 깊이,배우들의 기품 있는 움직임을 현대의 영화들은 재현하지 못했다.대양과 호수,사막과 동네 뒷산 만큼의 거리가 고전과 현대 영화 사이를 갈라놓곤 했었다.가끔 나는 이렇게 영화라는 예술이 사라져버리게 되는 것은 아닐까,또다른 형태의 예술에게 자신의 위상을 내어놓게 되어버리지는 않을까,하고 노심초사했으며,그러면 그럴수록 최전성기의 옛 영화들에 빠져들곤 했다.
그러나 나는 올해 가을에도 부산에 갔다.언제나처럼 허덕이며 일을 마무리 짓고,언제나처럼 숨가쁘게 고속버스에 올라타서,그리고 언제나처럼 기대감으로 들뜨고 충만하여 부산으로 갔다.삶의 모든 출발엔 근본적인 즐거움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3.공간
나의 첫 영화는 스페인의 거장 감독 카를로스 사우라의 <사냥>이었다.프랑코 독재정권 치하에서 만들어낸,바로 그 정권의 가장 중요한 혈관마다 흐르는 폭력성을 강력하게 은유한 1966년 영화다.물론 그는 직접적으로 대놓고 저항의 메세지를 말할 수 없었다.그 엄혹한 시대에 그는 은유하는 데에 그쳤다.그럼에도 그의 영화는 가위질 당했으며 검열에 시달렸다.그러나 그는 끝까지 검열의 그물을 뚫고 자신의 작업을 해 나갔다.위대한 영화인이다.
반면 내가 사우라의 영화를 -말하자면 클래식을- 선택한 것은 어쩌면 일종의 안전을 담보하기 위한 책략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시작부터 실망하지 않으려는 다분히 의도적인 선택이라는 얘기다.(이렇게 나는 이 가을, 의심증에 시달렸으며 조금은 노쇠의 징후라고도 할 수 있을 신경증적인 증상의 발현으로 영화제를 시작했다)
영화는 토끼 사냥을 떠나는 네 명의 친구들을 다룬다.그들은 프랑코 독재 정권의 좌파 탄압과 내전에 어느 정도 연루되어 있으며,그들 사이 역시 돈과 권력,그리고 치정으로 얽힌 힘의 관계가 도사리고 있다.영화는 그 힘의 긴장감을 적절한 클로즈업과 의미심장한 대사들 그리고 배우들의 눈빛 만으로도 훌륭하게 묘사하고 있었다.상대를 향한 간략한 시선들 속에도 증오와 질시,그리고 경멸과 유혹의 감정들이 뚜렷이 살아있었으며,카를로스 사우라는 관객이 그 시선의 의미를 채 알아채기도 전에,다른 화면들을 들이미는 빠른 압박을 구사하고 있었다.이들만으로도 영화는 거대한 독재와 폭력에 대한 나름의 알레고리들을 쌓아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영화는 -좋은 영화가 항상 그렇듯이- 최후의 폭발 지점을 향해 힘차게 다가가고 있었다.그곳은 그들의 토끼 사냥이 이루어지는 황량한 들판이었다.프랑코 때,또 스페인 내전 때 숱한 양민의 학살과 살육이 자행되어졌던 실제 장소인 그 들판에서,그들은 총을 들어 도망가는 토끼들을 쏴죽이고 또 쏘아죽인다.총탄을 피해 달아나는 토끼들은 여지없이 총알에 맞아 나뒹굴어졌고,굳은 입술의 사냥꾼들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다른 토끼들을 향해 총탄의 세례를 또 퍼붓는다.거의 불필요할 정도로 긴 시간이 배정된 이 장면은 관객의 심정을 한없이 불편하게 하는데,그것은 단순히 그 장면이 너무 잔인해서만은 아니다.
그것은 이 학살이 벌어지는 장소가,공간이 바로 프랑코 정권이 사람들을 마치 토끼사냥하듯 죽였던 바로 그 장소이기 때문에 그렇다.관객들은 어쩔 수 없이 바로 그 사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고 영화는 이로써 폭력과 독재에 대한 강한 은유와 상징성을 획득한다.그리고 점점 토끼사냥이 벌어지는 공간은 강력한 힘을 획득하게 된다.관객은 그 벌판을 일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공포와 압박감을 느끼고 이어 폭력과 전쟁에 대한 거부감과 가책으로 자연스럽게 나아가게 된다.
들판은 스크린과 관객의 시야를 가득 메우고 거의 가두어 버린다.이것이야말로 예술가의 천재성으로서,아무나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공간을 특별함으로 채우는 테크닉,그리고 거기서 솟아나는 진정한 의미들..이런 것이 한 사람의 영화감독을 예술가로 바꾸는 힘이다.결국 학살당한 유골들이 발견되고 그 동굴의 으스스함이 극장 전체를 감싸게 되면,등장인물들이 서로 살해하게 되는 내러티브 마저 그 필연성을 획득하게 된다.이것 역시 바로 그 공간의 힘이다.!!
우리 영화에도 특별한 공간들이 존재한다.김기영 감독의 <하녀>의 2층집-그 세계 최고 수준의 미쟝센과 공간감각-,이만희의 <돌아오지 않는 해병>의 전투가 벌어지는 겨울 들판 -개인적으론 샘 페킨파의 멕시코 보다 우위라고 생각한다- ,최근 영화에선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의 낮과 밤 들판들.이 공간들은 생명력을 가지고 시간을 견뎌 나갈 공간들이다.노근리 양민학살을 다룬 <작은 연못>이 스토리의 폭발적인 비극성과 화려한 캐스팅으로도 큰 감흥을 얻어내지 못했던 것은,그 영화가 다룬 공간의 미약한 에너지 때문일 수도 있다.의외로 텔레비젼 드라마스러운 공간이었던 것이다.
물론 내게 가장 특별한 영화적 공간은 아무래도 아핏챠퐁 위라세타쿤의 '숲'이다.언젠가 썼던 <열대병>과 <친애하는 당신>에 관한 글에서 나는 그의 숲을 다루었었는데,그런 숲은 다시는 존재하지 않을 듯 싶은 영원성을 획득한 영화적 공간이다.카를로스 사우라나 아핏챠퐁 위라세타쿤이나 거의 본능적이다 싶은 집중력과 자연과 사물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 이 일들을 수행해냈다.솔직히 부러웠다.그리고 이 영화 <사냥>이 부산에서 보는 카를로스 사우라의 마지막 영화라는 사실이 너무나 아쉬웠다.
4.사람들 1
지난 시절 나는 부산에서,영화제 기간 동안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우연한 만남도 있었고 꼭 이루어져야 하는 만남도 있었다.나는 그 만남의 리스트를 마음 속에 가지고 있다.이런 리스트는 쉽게 잊혀지지 않는 종류의 것이다.처음엔 주로 원래부터 아는 사람들을 만났던 것 같다.부산으로 진출한 옛시절의 직장 동료들,부산으로 내려온 동창들..우리는 반가움 때문에라도 쉽게 어울렸으며 밤새도록 술을 마셨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온라인 상에서 알게 된 사람들의 비중이 늘어나기 시작했다.가상 공간의 사이버 피플들을 실제로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이 현대적인 인연들.왜 내 부산에서의 만남들이 이런 식으로 변해가기 시작했을까?
내 관계의 외연의 확장을 위해서? 아님 기존의 관계망에서 벗어나는 일탈의 자유로움 때문에? 아님 관계 고유의 무게가 주는 부담감이 덜 하기 때문에? 글쎄 정확한 대답을 제시할 수는 없다.또 이 모든 대답들이 정확한 답들 속에 혼재할 수도 있다.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래도 사람들 사이의 관계다.모든 이들이 벌들의 구획된 방처럼 흩어져 세포처럼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이 우연한 연대들이 주는 위로감과 즐거움은 그냥 무시할 수 없는 '현상'이다.
그 날 난 서울에서 내려온 엔지니어 커플을 만났다.영화를 만들고 싶은 사람,그걸 위해 꾸준히 글을 쓰고 머릿속을 정리하는 사람.마음 속의 세계를 탐사하는 그 커플을 나는 해운대의 어느 쇼핑 센터 앞에서 여러 번의 문자 주고받기 이후에 만날 수 있었다.늘 그러듯이 나는 그들과 곧장 친해졌다.사람들로 넘실거리는 부산의 거리에서 뭔가를 먹기 위해 식당을 찾아 헤매는 그 시간 동안 우리는 거의 눈치를 보지 않고 핵심으로 돌진할 수 있었다.(사실 이런 성향이야말로 온라인에서의 만남이 오프라인에서의 만남으로 이동할 때 생길 수 있는 가장 유리한 점이다.즉 우리는 그동안 글과 이메일을 통해 서로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존재와 존재 사이의 생래적인 거부감은 삽시간에 사라지고,온라인상에서 오고 갔던 이야기들이 당장 식탁 위로 올라가는 것이다.)
우리는 이 거리의 분명한 이방인으로서,낯선 자로서의 서로의 정체성을 공유했고,폭탄주의 퍼레이드가 시작되면서부터는 우리들 사이의 공통 과제인 부산과 영화와 영화제와 그간의 경험들을, 어쩔 수 없이 그간의 범행들을 자백하는 용의자처럼 술술 털어놓기 시작했다.이야기는 이야기를 낳았고 알콜과 영화제의 축제적인 성격은 우리들을 아라비안 나이트의 세헤라자데 뺨치는 이야기꾼으로 만들었다.이야기..이야기는 아마 인류의 멸망 직전까지 살아남을 것이다.혹은 인류 멸망 이후에도 이야기만은 살아남아 파멸을 기념하는 비석처럼 그 어디엔가 서 있을 것이다.
5.공간2
그들이 야외상영장으로 떠나가자 나는 혼자 남게 되었다.체내의 알콜과 함께 말이다. 다음 영화를 보려면 알콜의 기운을 진정시켜야 했으므로 나는 해운대의 백사장을 향하여 발길을 옮겼다.나는 모래 위에 주저앉아 꼼짝 않고 고인 듯한 바닷물과 그 위의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부산 바다의 풍경은 조금 변했다.몇 년 전 광안대교가 생긴 이후로 해운대의 바다는 조금쯤 좁아졌다.아파트를 포함한 콘크리트 건물들이 점점 늘어나 마치 무언가를 위협하는 거친 생물들의 무리처럼 바닷가를 압박해 이 곳 특유의 광활함이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나는 이내, 변하지 않은 어떤 것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나와 이 공간과의 얽힘,사연,그리고 비통한 어떤 감각들이 여전히 살아남아 자신의 존재감을 나한테 건네주고 있었다.도저히 성공할 수 없었던 어떤 슬픈 연애담,삶의 무의미함이 던져주던 허무함과 고통,한 때 내가 겪을 수 밖에 없었던 갖가지 감정들이 이 백사장을 무대로 일어났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그와 동시에 희극과 비극이 섞여 있는 여러 에피소드들,달맞이 고개에 살던 시절 내가 기르던 강아지 대니,친구들과의 갑작스런 겨울 여행,계속되는 음주 후에 찾아왔던 명징한 순간들,우연한 만남 이후의 해안 산책,전혀 모르는 사람들의 불꽃놀이,그들의 환성,새벽..이런 것들이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 위에 말풍선처럼 떠 있었다.
이런 기억들은 나와 특수한 관계를 맺은 이 공간과의 어쩔 수 없는 고리였다.공간은 살아있다.살아서 내게 말을 건넨다.카를로스 사우라의 <사냥>의 그 학살 공간이,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그 살해의 흔적을 여전히 담아서 온 세계의 관객들에게 전달하듯,해운대의 이 공간은 내 작은 역사를 언제나 떠올려서 내게 자신의 공간성을 웅변하는 것이다.특별한 일이 벌어지지 않는 한,나는 이 공간과의 인연을 끊을 수 없을 것이다.단 한 번 만나게 될지도 모를 오후의 엔지니어들과도 그렇다.그들과 난 이 공간을 매개로 좀처럼 끊어지지 않을 어떤 상황을 만들어버린 것이다.
어쩌면 세상의 악함도 그럴 것이다.악은 그리 단순한 것이 아니다.뫼비우스의 띠처럼 악은 표면에서 없어졌다고 생각되는 순간에도 그 씨앗들을 여전히 연속선상에 배치시키고 있는 것이다.그래서 우리는 악함을 완전히 제거할 수 없다.그럼에도 우리는 그 악들을 최소화시키기 위해 전력투구하는 것이다.악은 공간과도 같고 뫼비우스의 띠와도 같은 것이다.
센티멘탈해지는 것 같아 아내에게 전화를 걸려는데 (아내는 내 이런 감정들을 깨부수는데에는 그야말로 1인자이다) 문자 메세지가 뜬다.오,또다른 온라인상의 천사,경기도의 교감선생님.몇 년 전 부산영화제의 한밤중에 포장마차에서 만났던 그 분.생각할 때마다 simon & garfunkel의 flowers never bend with the rainfall을 떠올리게 하시는 미루님..나는 사전에 약속하지 않아 그 분과의 보석 같은 만남을 또다시 놓쳐버렸다.이렇게 어긋나버리는 또 하나의 끈 역시 존재하는 것이다.나는 일어서서 다시 극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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