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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여행의 기록-부산에서의 가을 PART2

신의 영화들/정체에 대해 떠들기

by 폴사이먼 2010. 12. 3.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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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EXTREME CLOSE-UP

 

내 다음 영화는 이탈리아의 젊은 신예감독 마시모 코폴라의 암흑의 공포 (Afraid of the dark)였다.이 영화는 부산영화제에서 운영하는 flash forwad award의 11편의 경쟁작 -비아시아권 젊은 감독들을 대상으로 하는 영화 경연이다- 중 한 편이었다.어쩌면 딱 내가 관심을 가질 만한 섹션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영화는 이제는 익숙해진 소재들- 통합된 유럽에서의 빈부 격차,유럽 자체의 문제,동구권 노동자들의 불법이민,노동과 실업문제-을 다루고 있었다.실직한 루마니아와 이탈리아의 여성노동자가 우연히 한 공간에 거처하게 되고,그들의 사연과 고통을 영화는 담담하게 뒤쫓는다.그래서 두 노동자 에바와 안나의 이야기를 적절하게 비교편집해서 영화를 끌어나가는 것은 어쩌면 영화의 당연한 수순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문제는 이 영화가 어떻게 해서,어떤 방법으로 비슷한 소재를 다루는 영화들과의 차이점을 획득하느냐 하는 것이다.결론이 어차피 정해져있는 작품들에서 그 진정성의 강도만을 개개의 영화를 평가하는 기준으로 삼는 것,정치사회적인 목소리의 울림만으로 영화들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에,-좀 거칠게 말하자면 주제비평에-우리는 너무나 익숙해져 있다.그러나 그것만으로 모든 평가가 완전해질 수는 없는 것이다.나아가서 그런 식의 평가만 있는 세상은 좀 삭막한 곳이다.게다가 어쩌면 너무 쉽고 안락한 방법일 수도 있다.영화는 메세지 한 가지만 가지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영화엔 사람이 있고 사물이 있다.그들을 둘러싼 공간이 있고 그들을 촬영하고 있는 기계들과 그 기계들을 다루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그들이 이뤄내는 총합적인 하모니가 바로 영화다.영화감독은 지휘봉을 들고 그들 앞에 서서 마에스트로 흉내를 내고 있는 사람이고,그가 보았던 혹은 읽고 들었던 다른 작품들과의 변별성을 획득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는 것이다.(그렇게 하지 않음 그냥 초등학교 학예회가 되어버린다) 말하려는 주제는 말해지는 순간 또다른 존재감을 획득하고 말하는 방법의 다름에 따라서 개개의 뉘앙스를 또다시 얻어내서 새로운 생물로 태어난다.모든 영화는 서로 다를 수 있을 가능성을 생래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방법과 변별력의 문제가 현대 영화의 정체성의 주된 이유인지도 모른다.영화는 너무 짧은 순간에 너무나 많은 천재들이 집중적으로 나타나 한 예술 쟝르에게 주어진 기회들을 순식간에 소진시켜버렸다.더구나 영화는 변덕스럽기 이를 데 없는 대중들을 향해 환히 열려 있고,현대의 총아인 자본과 지나치게 쉽게,그리고 헐값에 계약을 맺었다.영화는 힘들고 난감한 길잡이들을 따라 이 곳까지 오고 만 것이다.

 

그러나 이런 건 다 넋두리이다.어쨌든 뭔가를 만드는 사람은 불평만 늘어놓으며 머물러 있으려고는 하지 않는다.되든 안되든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오늘의 영화감독 마시모 코폴라 역시 그렇다.그도 우리도 유럽의 노동시장에 문제가 있다는 걸 잘 안다.동구권 노동자들이 서유럽으로 넘어와 하층 계급을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두 다  알고 있다.그리고 그것의 배경을 이루는 자본주의 문제 역시 귀가 아프게 사방에서 울려댄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다.또 그것은 인간 본연의 문제,인간의 소외와 고통과 직접 맞닿아 있다는 것도 주지의 사실이다.그러나 진보적인 목소리에,인간의 고통과 그 원인을 얘기하는 목소리에 사람들은 쉽게 지쳐버리고 피로해 한다.(21세기 우리나라의 상황이 바로 그렇다) 그래서 말하는 사람들은 그 피로감을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고 ,그 방법이란 것도 결국은 선택이다.

 

마시모 코폴라가 사용했던 방법은 익스트림 클로즈업과 불규칙한 편집이었다.이 영화의 편집은 관객의 예측을 거의 비껴간다.이 장면이 좀 더 오래 지속되겠거니 하는 순간 다른 장면으로 넘어가고,전혀 연결되지 않을 듯한 스토리가 그 다음 장면으로 등장한다.시간 개념 역시 불확실해서 루마니아 출신 노동자 에바와,그의 가출한 어머니를 다루는 스토리 라인은 전후를 분간하기 어렵다.이것은 거의 고의적인 책략이다.관객의 일상성을 깨뜨리려는,관객이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익숙한 영화감상의 순서들을 방해하려는,어쩌면 일종의 고육지책이다.심정적인 불편함을 겪는 순간 관객은 두 가지 선택의 기로에 선다.그 영화를 거부하든지 아니면 기를 쓰고 그 영화 내부로 들어가 영화의 계략과 전투를 벌이던지.

 

그러나 이런 비일상적인 편집이 꼭 크나큰 효과를 볼 수 있다고 말하기는 좀 어렵다.관객의 그 영화에 대한 관심의 정도는 결국 그 영화를 보기 이전에 이미 반 이상이 결정되어 있기 때문이다.관객의 3분의 1은 자신이 선택한 영화를 보기도 전에 그 영화에 대한 관심도를 이미 결정해버리는 것이고,또다른 3분의 1은 영화 시작 20분 안에 영화에 대한 집중도를 형성시켜 버린다.말하자면 마시모 코폴라가 관객을 공략하기 위하여 사용한 이런 종류의 편집방법은 자신의 영화에 근본적인 변별력을 갖게 하지 못한다.오히려 나머지 3분의 1을 짜증과 수면으로 유도해버리는 효과를 낳기만 한다.(실제로 극장 안에 있던 많은 관객이 영화 도중 집중력을 잃었다)

 

그러나 그가 사용한 익스트림 클로즈업의 경우는 좀 다르다.이 영화 속 인물들의 얼굴과 신체는 카메라가 허용할 수 있는 한계까지 확대된다.슬픔의 모습도 고통의 모습도 모두 다 화면 내부를 가득 채운 채 관객에게 전달된다.빠져나갈 곳이 없을 지경으로 말이다.

 

 

그것은 대개 이런 식이다.위의 스틸 컷은 그나마 작게 나온 얼굴이다.얼굴만 그렇게 확대되는 것이 아니다.종아리와 허벅지와 팔뚝이 모두 다 이런 식의 집중력을 가지고 관객을 향하여 무차별하게 던져진다.관객은 꼼짝없이 자리에 앉아 인물들의 저 육체를 보고 있어야만 한다.그러나 영화는 관객들에게 배우들의 표정을 인물들의 정서를 대변하는 다양함으로 던지고 있지 않았다.슬픔을 표현하는 장면에서 배우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고통을 나타내는 장면에서 배우의 눈살은 찌푸려지지 않았다.그들은 매우 드문 몇 장면을 빼놓고는 거의 무표정으로만 일관했다.눈과 코와 입의 생기가 없어지고 땅 밑으로 꺼져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사지와 인체의 기관들은 축축 쳐져 있었다.

 

그런데 이 과도한 클로즈업의 효과는 바로 거기,그 형편없는 처짐으로부터 발생한다.그 절망적인 무표정들이 관객의 어딘가를 일깨우는 것이다.눈물과 고함이 해내지 못하는 어떤 정서적인 반향,눈물과 고함은 그래도 조금이나마 에너지가 남아 있는 사람들이 내지를 수 있는 저항이라는 또다른 생각,극도의 우울함은 무표정과 무감각과 타인과의 교감과 공감능력을 완전히 상실해버린 고체적 형상으로 더 쉽게 표현될 수 있으리라는 또다른 깨달음이 관객의 마음 한 켠을 잠식해 들어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극도의 무감각,극도의 무표정,극도의 우울함,깊이를 알 수 없는 늪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인간의 영혼.이런 마음의 상태가 나타나는 무표정.이것이 유럽의 표정이라고 마시모 코폴라는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 표정들은 또 하나의 공간을 제시하며 관객을 흔들어보려 시도하는 것이다.유럽은 무표정이다.그리고 무표정이야말로 공포다,라는 사실을 이 영화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어디까지나 영화였다.영화가 끝나고 진행된 감독과의 만남 시간에 나온 마시모 코폴라는 마치 자기 영화의 내용을 정면으로 배신하듯 너무나 발랄하고 너무나 유쾌했다.이상한 배반감과 함께 나는 그 상영관을 빠져나왔다.

 

7.밤의 부산,밤의 호텔

 

밤의 도시들은 이상하리만치 유사하다.특히 자정에 가까운 지하철 역의 풍경과 지하철 안의 모습은 서로 미리 짜기라도 한 듯 비슷하다.고요한 피로감이 달리는 열차 내부를 휘감고 있고 어딘지 초조해하는 사람과 분명히 피로해하는 사람,그리고 그런 초조와 피로감으로부터 비롯된 포기의 기운이 열차의 천편일률적이고 단속적인 소음에 흔들리며 동조한다.

 

바깥도 마찬가지다.완전히 가라앉지 않은 도심의 공기 속엔 나른하고 아직은 그 귀기를 완성시키지 못한 유령들이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고 있고,형편없이 줄어들어버린 사람들의 숫자 때문에 우뚝우뚝 더 키가 커 보이는 건물들은 풀이 죽은 상태로 그냥 서 있다.

 

나는 해운대 역에서 부산역까지 지하철을 타고 왔다.부산역 옆 어떤 비즈니스 호텔이 그날 밤 나의 잠자리였다.역 광장에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앉아있었는데,어쩐지 모두 다 제각기의 용무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었다.호텔의 프론트는 그 시간에도 분주했는데 갑자기 밀어닥친 일본인 단체 관광객 때문인 듯 보였다.세계 어느 곳에서나 보이는 호텔 프론트 앞의 그 어울리지 않는 긴장감.손님을 접대해야 함에도 어쩐지 성을 지키려는 수비병들처럼 보이는 유니폼 입은 호텔 직원들과 기대감과 피곤함을 동시에 나타내며 줄지어 서 있는 투숙객들.'예약하셨습니까'라는 예의 바른 질문과 말없이 자신의 여권을 건네는 손길들.그 미묘한 불균형적 소통.

 

어쩌면 밤은 본질적으로 똑같다.그러나 각자의 방으로 흩어져 또 하나의 새로운 공간과 시간을 부여받으면 또다른 무대가 펼쳐진다.특히 고급 호텔이 아닌 이런 비즈니스 호텔의 좁은 방에 홀로 묵게 된 나 같은 여행자의 경우에선 더욱 그렇다.약 3초쯤의 외로운 공기가 싸아~하게 온 몸을 훑고 지나가면 또 하나의 밤과 잠을 위해 여행자는 방 안의 무기들을 점검한다.방어본능이 외로움을 눌러 이긴다.

 

그러나 어쩌다가 동작을 중단하고 침대 위에 걸터앉게 되면,저절로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호퍼의 묘사는 완벽하게 정확하다.그가 그려낸 고독은 거의 정밀기계의 정확도에 근접한다.턱과 시선은 저절로 내려지고 머릿속으론 복잡한 생각들이 밀려들지만 기억은 그 생각들을 저장하지 않는다.두뇌가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호퍼의 어떤 그림-이 그림의 제목 역시 호텔룸이다-은 이 상황을 서늘하게 표현한다.저 여인이 읽는 책의 내용은 눈의 뒷편에서 멈춘다.책을 통해 외로움에 저항하려는 여인의 의도는 완벽하게 제압당한다.여인의 뇌 역시 자기 기계장치의 안전성을 위해 책 내용을 저장하려 하지 않는다.

 

가방과 옷가지,그리고 모자는 여인의 무장이 이미 해제된 것을 가리키고 있고,밤과 방은 서서히 사람을 정복해가고 있다.봄에 보았던 <업 인 디 에어>라는 영화의 어떤 장면 하나 역시 바로 이 정서를 표현하고 있었다.매일을 호텔과 비행기에서 살아가던 죠지 클루니가 잠깐 보였던 지치고 창백한 표정,호텔의 창 너머로 원거리 촬영된 그의 고독함은 호퍼의 호텔 방과 일맥상통하고 있었다.결국 호텔이 여행자에게 승리를 거두었던 것이다.(물론 클루니는 재역전승한다)

 

그러나 나는 아직 클루니가 아니다.나는 호텔과 싸우려 하지 않는다.나는 애써 눈을 감으려 했고 오히려 이 방이 주는 차갑고 깔끔한 정갈함에서 내게 어울리는 미학을 찾으면 된다고까지 생각했다.그러나 우리가,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어쩔 수 없는 노마드라는 사실 만큼은 지울 수가 없었다.하지만 노마드가 그렇게 나쁜 건가? 천만에,.낙천성을 동원해서 이겨내면  된다.또 질 때가 되면 지면 되고 말이다.승패는 결정적인 순간에만 중요하다.10전 2승 8패의 2승이 마지막 두 경기에서의 2승이면 되는 것이다.

 

아직도 버티는 방법을 터득하지 못했다면 내게도 문제가 있는 것이다.나는 내일 볼 영화와 내일 만날 사람들을 생각하며 잠을 청하려다가,화들짝 놀라서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자다 깬 아내는 빨리 자라는 비몽사몽간의 말을 남기고 잠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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