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며칠간,하늘나라로 떠난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글을 몇번이나 써보려다가 ,접고 또 접었었다.그는 내게 ,애증이 교차하는,신뢰감과 배신감을 다같이 갖게 만드는,이상과 현실이 병존하는 양가감정을 가지게 하는 사람이었다.그의 재임 중 일어났던 수많은 사건들과,그가 대통령이라는 자리에 오르기 전 보여주었던 아름다운 모습들을,함께 연결시켜서 글을 쓰기가 도무지 쉽지 않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러나 이젠 써야 할 때가 온 것 같다.시간을 좀 더 지체하면 도저히 쓸 수 없을 것 같다.그래서 지금 노무현에 대한 마지막 글쓰기를 시작하지만,사실 이 글이 어떻게 진행될런지,어떻게 글을 끝맺게 될지,종잡을 수가 없다.그의 갑작스런 죽음 때문에 생긴 우울한 감정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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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를 유심히 바라보게 된 때는,1988년의 청문회 때가 아닌 1990년대 중반의 부산시장 선거 때였다.그는 DJ당의 깃발을 들고 YS의 아성이었던 부산의 선거에 도전하여 패배했었다.그 때 그는 30%가 넘는 놀라운 득표율을 기록했었는데,이 득표율 자체의 충격 뿐만 아니라,'아,저런 사람도 있구나'라는 심정은 경이로움을 넘어선 어떤 숭고함을 느끼게까지 했었다.이어졌던 그의 '영남공략 패배사'를 고스란히 보면서 당시의 내가 떠올렸던 영화는 그 즈음 내가 즐겨 보았던 영화 <스미스씨,워싱턴 가다 Mr.Smith goes to Washington)> 이었다.
1939년,프랭크 카프라가 감독하고,제임스 스튜어트 진 아서 클로드 레인즈 같은 명배우들이 출연한 이 영화는 ,미국 정치에 대한 환멸을 동화와 우화로 처리해서 이야기화한,한 이상주의자에 대한 영화였다.
스미스씨,워싱턴 가다- 노무현씨,청와대 가다.
이 영화는 갑작스럽게 상원의원의 자리에 오르게 된 한 젊은이의 이야기로 시작한다.원래 상원의원이었던 사람의 돌연한 죽음으로 공석이 된 자리에,주지사가 그를 추천한 것인데,주지사가 그 젊은이 스미스를 추천한 이유는,그가 정치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시골 소년단장 출신이기 때문에,부패한 정치인들과 그들에게 막대한 이권이 걸려 있는 건설업자들의 '의회거수기' 역할을 충실히 해낼 수 있을 거라는 나름의 계산 때문이었다.
(이들이 바로 그들이다.정치인들과 업자들.)
스미스는 이렇게 워싱턴으로 향하게 되는데,영화는 그로부터 순수한 원칙주의자인 그가 워싱턴의 보수적인 정가에서 벌이는 좌충우돌한 실패담을 유머러스하게 그려내기 시작한다.그는 워싱턴의 노련한 정치기자들에게 놀림감이 되고,동료의원들의 업신여김을 받고,언론의 가십성 기사들 때문에 우스꽝스러운 광대로 묘사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반전이 일어난다.보이스카웃 단장이었던 그가 그의 고향 잭슨 시의 월워크 계곡에 소년들이 수련할 수 있는 야영장을 건립할 계획을 담은 법안을 제출하면서부터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하는 것이다.그 계곡의 땅들은 ,스미스가 그저 꼭둑각시 거수기 노릇에 만족할 줄 알고서 그를 의원직에 추천했던,상원의원 죠셉 페인과 건설업자 그리고 주지사가 댐을 건설해서 막대한 이익을 취하려 했던 바로 그 땅인 것이다.
그들은 갖가지 계략을 동원해서 스미스를 압박한다.그들은 스미스가,정치의 '정'자도 모르고,무능하며,순진한 척 하지만 실제로는 속내를 알 수 없는,어디로 튈 지 모르는 무자격 정치인이라며 그를 비난한다.(노무현이 생각나지 않는가?) 워싱턴의 부패한 정치가들을 오랫동안 보아온 유능하고 노련한 비서 손더스는,이런 모욕을 감당하느니 차라리 고향으로 내려가서 깨끗이 살아나가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며 낙향을 권유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스미스는 완전히 포기하지 않는다.그는 2003년 이전의 노무현이 그랬던 것처럼,확고한 비타협성과 정의에 대한 원칙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그러자 부패한 기득권 세력은,그를 거짓음해하여 국회에서 몰아내려는 계획을 세운다.
스미스 아버지의 친구이자,한때 스미스의 멘토였던 죠셉 페인 상원의원은 월워크 계곡의 실소유자가 스미스라고 거짓 증언하여,스미스를 의회에서 제명하고자 하는 계획을 밀어부친다.페인의 배신에 실의에 빠져 괴로워하는 스미스에게,손더스는 그의 진심을 알고 오히려 그를 설득하고 격려하기 시작한다.
업신여김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싸우는 사람이 있다며 그에게 힘을 준다.스미스는 댐 건설 법안의 통과를 막기 위해,23시간 16분에 걸친 필리버스터를 감행한다.그는 먹지도 쉬지도 자지도 않은 채,의사진행발언을 계속 하는 것이다.
진실이 가득한 그의 연설이 걸림돌이 되자.건설업자 테일러는 또 하나의 계획을 세운다.그들은 스미스의 필리버스터가 대중들에게 알려지지 않도록,거대신문들과 방송을 통해 진실을 조작하기 시작한다.(지금이라면 알바들을 동원했을 테지만) 의회에 항의전보와 편지들을 보내게 하고,모든 사실을 언론을 통해 가린다.(이 시점에서 생각나는 신문들이 있으실 것이다)
(영화 속 재벌 테일러다.그는 '돈이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 스미스의 말이 시민들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하라'고 말한다)
여론조작으로 스미스의 연설 내용이 시민들에게 전달되지 않자,어린 소년들이 나서기 시작한다.아이들은 자체적으로 신문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호외를 돌린다.거의 동화적으로 보일 정도로 비현실적인 이 장면들은,노무현이 대통령의 자리에 오르기 전 그를 도왔던 수많은 인터넷 상의 사람들과,독립언론들을 연상시킨다.
거의 탈진한 스미스는 다음과 같이 외치고는 기절해버린다.
- 제가 패배했다고 보십니까? 제가 완전히 졌다고 보십니까? 테일러가 의회로 쳐들어온다고 해도 누군가는 듣고 있을 것입니다!
영화를 만든지 70년이 지난 지금의 시각으로는 약간 어이없게도,영화의 결말은 죠셉 페인의 양심선언으로 극적 반전을 만들며 해피 엔딩으로 끝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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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보았던 15년 전,나는 물러서지 않는 비타협적인 태도와 원칙에 대한 순수함을 지닌 스미스의 모습에서,언제나 깨지고 패배해왔던 노무현의 모습을 떠올렸었다.그는 사람들이 지닌 교과서적 정치관에 부합하는 거의 유일한 인물이었으며,언론과 재벌들을 포함한 기득권 세력들에 대항하여,'상처가 나고 집단 폭행을 당할 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싸움과 싸움을 거듭하는 의로운 총잡이였다.
그는 우리 세대의 정치적 아이콘이 되었으며,그런 기대를 완전히 저버리지 않은 보수 정치인들의 대표였다.물론 그것은 우리들,그를 성원하고 지지를 보냈던 우리들의 시각이었다.실제의 그가 어떠했는지는,그의 심정이 어땠는지는 우리는 알 수가 없다.그러나 그는 위험한 도덕성의 성역에 자신을 위치시켰고,눈에 보이지도 않는,그리고 즉각적으로 동원할 수 조차 없는 무형의 힘을 등에 업고 1939년 영화 속의 미스터 스미스가 그랬던 것처럼 기나긴 필리버스터를 계속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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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의 대통령 재임기간을,스미스씨의 승리 이후와 동일시하고 싶었었다.순수한 원칙주의자인 스미스가 권력을 얻게 되었을 때에도 여전히 자신의 스타일을 고수하고 자신의 이상주의를 성공시키기를 바랬었다.당연하게도,노무현 역시 그래주길 바랬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치 않았으며,그는 지지자들의 거대한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그는 많은 기회들을 잃어버렸으며,그의 적들에게 완전히 둘러싸였다.스미스의 훗날 역시 그랬을 수도 있다.그 역시 완전히 고립되어 외로운 전투를 지속하다가 종내에는 고향의 소년들에게 귀향했을 수도 있다.노무현이 봉하마을로 내려갔던 것 처럼 말이다.
노무현의 스캔들이 참으로 길고 지루하게 진행되면서,나는 스미스의 뒷날 역시 그랬을 수도 있다는 씁
쓸함에 배신감을 가졌고,한 세대와 한 무리의 사람들이 가졌던,그리고 투영시켰던 고귀함이,가장 더러운 자들의 손에 의해서 짓밟히고 훼손되는 것 같아 절망스러웠다.
그러면서도 우리 자신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노무현의 백만 달러,노무현의 1억 짜리 명품 시계는,당연히 우리 자신들의 욕망을 연상시켰던 것이다.또한 우리 역시 몰락해가고 있었던 것이다.우리 역시 시계와 달러에서 자유롭지 않았던 것이다.어쩌면 사람들의 노무현에 대한 원망은,스스로의 몰락,스스로의 좌절에 대한 대리분노였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셰인,하늘로 떠난 총잡이
노무현은 결국 '명예자살'을 선택했다.그의 허망한 죽음이 가질 수 있는 여러 의미를 다 얘기해보자고 시도하는 것은,이 시간의 우리에겐 어쩌면 아무 의미도 없다.그의 죽음은 그리 장렬해보이지도 않으며,감동적이지도 않다.슬픔과 우울함 만이 내 책상과 내 진료실 주위를 떠돌고 있을 뿐이다.
그의 죽음이 내 일부의 죽음이라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또 나는 그가 '스미스씨'가 아니라는 사실도 깨달았다.그는 스미스였지만,더 이상 스미스가 아니었고,그의 죽음이 다시 그를 스미스로 되돌릴 수도 있지만,훗날 우리들이 에너지가 폭발하지 않는다면,그의 죽음이 영원한 자살로 그 의미가 축소되고 격하될 수도 있다는 사실도 직감했다.
그리고 내가 꺼내 든 영화는 죠지 스티븐스 감독의 1953년 영화 <셰인>이었다.
'노무현이 불쌍하다'라는 말을 지난 5년 동안 입에 달고 다녔던 아내와 은별이는 쌔근쌔근 곱게 잠들어 있고,커다란 3인용 침대 위에서 멍한 기분으로 잠 안 오는 밤을 보내다가,인터넷 텔레비젼으로 찾아낸 고전영화가 바로 <셰인>이다.
나는 이 영화를 한밤중에 홀로 보면서,노무현이 스미스씨가 아니라 바로 셰인이었다는 사실을,이상적 정치가가 아니라 총잡이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기존 서부극에 나오는 총잡이들처럼 체구가 크거나 난폭하거나 거칠거나 멋진 말을 툭툭 내뱉는 총잡이는 아니다.셰인은 그저 방랑자다.과거엔 아마 전설적 총잡이였을 수도 있었겠지만,지금의 그는 방랑을 거듭하는 방랑자일 뿐이다.그의 푸른 눈은 온화하며 행동거지는 예의 바르다.말투는 부드럽고 사람들과도 잘 어울린다.한마디로 전형적인 총잡이는 아닌 것이다.
그는,서부의 어떤 개척민 가정에 우연히 정착하게 된다.그는 그 가정의 가장인 스타렛과 그의 아내,그리고 아들 조이가 일군 가정의 일원으로 대접받게 된다.그러나 그 마을엔 힘들게 일해서 자기 땅을 개간하는 개척민들을 못마땅해 하는 무리들이 있다.
개척민 패거리가 그 땅으로 들어오기 전에,인디언들을 몰아내고 땅을 차지했던 사람들인 라이커 패거리가 바로 그들이다.그들은 위협과 협박,그리고 폭력을 동원해서 사람들을 쫓아내려 하고 있다.그들은 개척민들의 우두머리 격인 스타렛을 직접 찾아와 이렇게 말한다.
- 우리는 우리의 피와 땀으로 이 땅들을 개척했다.인디언들을 몰아내고 소도둑들을 쫓아내는 과정에서,인디언의 화살에 맞아 다치고 도둑의 총에 맞아 숨을 거두었다.
- 이 땅은 영원히 우리가 일굴 것이고,너희 뒷세대들은 우리의 노력을 강탈할 것이다.당연히 새로 이주해 온 너희들은 땅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없고,우리 밑에 들어와 고개를 조아려야 할 것이다.그것이 현재를 안정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총으로 무장한 이 패거리들의 대사가,어찌나 우리나라 수구 보수세력들이 주구장창 읊어대는 설교들과 비슷하던지,웃음이 나올 뻔 했다.이 말들 자체를 부정한다는 것이 아니라,이 말들의 목표가 문제인 것이다.이들의 목표는 '평화'나 '함께 살기'가 아니라,언제나 배제와 권력,그리고 물욕과 연관되어 있다.영화 속 마을에서도 ,결국 폭력과 살인이 발생하게 되고,스타렛을 죽이려고 그들은 함정을 판다.
이 때 과거의 총잡이 셰인이 나선다.그는 직접 싸움에 나서겠다는 스타렛을 때려서 그를 실신시킨 후,홀로 라이커 패거리가 있는 술집으로 간다.아련한 연정을 품고 있던 스타렛의 아내를 위해서이기도 하고 ,자신을 따르는 그녀의 아들 죠이를 위해서이기도 하다.
아무도 그를 돕지 않는다.지킬 것,가진 것이 있는 사람들은 결정적인 싸움에는 잘 나서지 않는다.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꼭 그런 싸움에 나간다.
나는 노무현이 바로 그런 종류의 총잡이였다고 생각한다.
그는 보안관은 아니다.보안관 스타일도 아니었고,뱃지를 달고 으스대는 죤 웨인 스타일의 보안관 노릇을 해내기에는 그리 낯이 두껍지 못했다.그러나 노무현은 한번도 그런 싸움에서 물러서질 않았다.나는,보안관으로서의 그를 욕할 수는 있지만,총잡이로서의 노무현은 욕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논란의 소지가 많은 문장이라는 건 나도 인정한다)
셰인은 영화 역사상 가장 빠른 총솜씨라는,배우 앨런 래드의 총놀림으로 적들을 제압한다.전설적 악역 배우 잭 팰런스 역시 그를 감당하지 못했다.그 와중에 셰인 역시 총상을 입는다.
그리고는 떠난다.집으로 돌아가자는 죠이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한 번 피를 묻혔던 사람은 결코 돌아갈 수 없다고,자신은 그런 운명을 타고 났다고 그는 담담하게 얘기한다.
그는 조용히,그가 마을에 도착했던 바로 그 모습으로 멀리 보이는 산을 향하여 말을 돌린다.
셰인의 그 하염없는 뒷모습에서 나는 이상하게 노무현을 떠올렸다.비록 셰인처럼 상대방들을 모조리 제압하지도 못했고,제대로 승리한 후에 떠나지도 못했지만,떠나는 셰인의 뒷모습에서 나는 노무현의 뒷모습을 보았다.
싸움에서 이겼든 그렇지 못했든,마을 사람들의 환호와 열광을 끝까지 유지했든 그렇지 못했든,셰인과 노무현의 뒷모습은 총잡이들의 운명적인 모습이었다.노무현은 그런 운명을 타고 난 사람이었으며,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의 운명에 순응한 채,하늘로 떠난 것이다.
이 영화의 마지막 엔딩 장면은 영화 사상 가장 유명한 엔딩 장면 중 하나이다.소년이 떠나는 셰인에게 외친다.
COME BACK,SHANE!!
I'M SORRY ,SHANE!!
- 그 어두운 밤,내가 그에게 하고 싶었던 말도 아마 그 말이었을 것이다.
외로운 총잡이여,하늘의 전투에선 꼭 이기시라.그리고 편안하게 잠드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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