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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나와 제인 PART2 - <로나의 침묵> 그리고 <깊고 푸른 밤>

신의 영화들/이백 편의 영화

by 폴사이먼 2009. 10. 5.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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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나앉은 자.제인

 

한국 영화계의 전설이 될 수도 있었을 여배우 장미희가 연기하는 제인은 <로나의 침묵>의 로나와는 좀 다른 층위에서 조명되어야 할 존재다.1985년과 2008년, 벨기에와 미국, 한국과 알바니아라는 시공간적 차이를 우선 언급해야겠지만,그랬다가는 그렇지 않아도 길어지고 있는 이 글의 분량이 한없이 늘어나고야 말 것이므로 그렇게까지 하기는 좀 어렵겠다.

 

물론 장미희의 제인에게서,우리는 20세기 후반의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또한 다른 모든 가난한 나라의 백성들이 품고 있던 아메리칸 드림에 대한 환상과,그 쓰라린 실패의 과정을 읽어야 한다.특히 미국이라는 거대제국이 가지고 있던 한국에 대한 흡인력과,그것의 기본이 되었던 욕망과 돈,그리고 빈곤함에 대한 얘기들을 언급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제인에게서 본 것은 시대적 의미와는 좀 다른 종류의 감각이었다.

그녀는 현실에서,현실의 세계에서 약간 비껴나 체념과 절망을 동시에 체현하며 강가나 얕은 풀숲에 '나앉아' 깊은 부조리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존재다.

 

아주 어렸을 때 미국인과의 결혼을 통해 미국으로 이주한 그녀는,남편과의 이혼,미국인들과의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괴리감,사소한 마찰로 인한 양육권의 박탈 등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이 가질 수 있을 삶의 건전성을 상실해 버렸다.그녀는 자신이 경영하는 바의 카운터 뒷편에서,손님들이 술을 마시는 것을 지켜보며 위장결혼을 통해 수입을 얻는 것으로 자신의 삶을 지속시켜 나간다.

 

제인은,그 어떤 삶의 희망이나 의욕도 가지지 않은 것처럼 보이며,생존과 자존에 대한 엷은 감각만이 자신의 인생을 지탱해 주는 위태로운 기둥인 것처럼 보인다.배우 장미희는 그 위태로움을 온몸으로 표현한다.

 

 

검은 선글라스와 언밸런스하게 커트된 헤어스타일에,문어체의 대사들을 특유의 꿈꾸는 듯한 말투로 처리하는 장미희는 ( '아름다운 밤이에요'라는 장미희의 유명한 멘트는 바로 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대사다) ,그녀를 둘러쌌던 스캔들의 안개와 더불어 이상한 불안감을 자아냈다.

 

그녀의 눈빛은 광기에서 차가움으로,독기에서 강렬한 온기로 시종일관 진자운동하는데,배창호 감독 자신이 그의 여배우의 강력한 팬으로서,장미희에게 최대한의 배우적 자유를 선사하고,장미희 본인은 자신의 매우 혼돈스런 아우라를 비극적인 배역과 동시에 흡입함으로써 불안한 여인의 초상,실제 세계에서 비껴 난 '나앉은 자'의 이미지를 구현해낸다.

 

제인의 모든 말투와 그녀가 걸친 의상,걸음걸이,심지어 동선 하나하나까지도 공연하는 다른 배우들과 엇나가게 설계함으로써 (이것 역시 틀림없이 배창호와 장미희의 합작품일 것이다) 그녀는 20세기 우리 영화의 잊을 수 없는 캐릭터 하나를 만들어 냈던 것이다.

 

제인 역시,이 정도 선에서 그쳤더라면,예를 들어 냉혹한 팸므 파탈이나 비련의 여주인공 정도로 드라마가 마무리 되었더라면,내가 이렇게 힘을 들여 글을 쓸 필요 조차 없었을 것이다.

 

 나앉은 자,지상에서 허공으로 반 쯤 떠있는 자로서,바다의 수면에 떠 있는 부표처럼 넘실거리던 제인은,인생의 어느 순간,자신의 삶에 닻(anchor)이 될 수 있을 것 같은 남자 하나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그것이 바로 미스터 백,백호빈 ,안성기이다.

 

이 영화에서,무르익지 않은 그의 연기력의 한계점을 드러내는 안성기는,몇 번의 배려와 몇 번의 따뜻한 눈길로 제인의 인생에 하나의 전환점으로 자리잡는다.그는 제인 딸의 아빠처럼 아이와 바닷가를 산책하고,제인의 전남편 앞에서 그녀의 새로운 연인인 것 처럼 연기하여 그녀를 안정시킨다.그는 그녀를 진심으로 위로하려는 듯 보이며,미국 대륙 그 누구도 보여 주지 않았던 배려를 그녀에게 선사한다.

(그러나 이 장면들에서 현재의 국민배우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안성기가 보여주는 안타까운 퍼포먼스들은 사실 애처롭기 그지없는 수준이다.이때의 실망 때문인지,지금도 나는 안성기가 빛을 발할 수 있는 대목은 <고래사냥>이나 <라디오 스타>같은 사람 냄새 내는 코믹연기에서일 뿐이라고 생각하며,최근 <묵공>이나 <무사>류의 진지한 배역 몇 개가 이 리스트들에 추가되었다고 생각한다)

 

 

 

그의 육체를 그렇게도 거부했던 제인은 이제 백호빈과의 정사를 고요하고도 열정적으로 받아들이며,그와의 새로운 앞날을 꿈꾸기 시작한다.(제인은 백호빈에게 그의 아이를 임신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백호빈에겐 한국에 아내와 아이가 있고,그가 꿈꾸는 미국에서의 계획에 제인은 당연히 포함되지 않는다.몇 차례에 걸친 잔인하고 비열한 백호빈의 장면들 끝에,제인은 결국 백호빈을 살해하고 자신의 머리에 총탄을 쏜다.

 

그렇게 해서 '나앉은 자' 제인은 결국 자신의 실존에서 탈주하지 못한 채 삶의 드라마를 끝내버린다.물론 감독 배창호와,원작소설 -원작소설의 제목은 사실 '깊고 푸른 밤'이 아니라 '물 위의 사막'이다.'깊고 푸른 밤'은 문학사상사에서 주는 이상문학상의 본상을 수상했던 최인호의 또다른 중편소설의 제목이다- 과 시나리오의 작가 최인호는,제인의 비극에 한국과 미국이라는 당시의 영화로서는 어쩌면 떠오르는 신개념,아메리칸 드림,또 인간의 본질적인 욕망이 안고 있는 천박한 염원 따위들을 ,제인의 비극의 원인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들은 이런 많은 갈등 상황들을 다분히 멜로드라마적으로,다분히 감성적인 방법으로 그려낸다.종종 감독 배창호의 당시의 한계라고 지적되었던 이런 성향은,배창호 만의 책임은 아니며,그 당시의 문학계에서 가장 소녀적이고 여린 글들을 썼던 소설가 최인호의 몫 역시 함께 이야기되어야 한다. 

 

 

5.로나와 제인

 

두 인물을 쫓아가는 두 영화의 시선,즉 두 카메라의 움직임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로나의 침묵>의 카메라는,거의 로나의 뒷모습,또 로나의 발자국만을 고요하고 충실하게 ,거의 아무런 개입도 없이 ,그저 따라다니기만 한다.영화적 테크닉들은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마치 있는 그대로의 모습들을 시간대별로 차분하게 기술하기라도 하겠다는 듯,카메라는 있는 듯 없는 듯 로나의 모습들을 뒤쫓아간다.로나가 일하는 세탁소,그녀가 사는 집,거리, 카페  등을 차분하게 묘사해서,카메라는 관객의 시선을 그렇게,로나의 삶에 대한 조용한 증언자들로 만들어 버린다.

 

이 영화의 서사가,거의 생략의 수준이라고 말해도 될 정도로,또 관객들이 서사의 흐름이 갑자기 사라져버렸다고 느끼기까지 할 정도로 과감하게 단순해진 것 역시,카메라의 이런 태도와 관련이 있다.다르덴 형제는 시선의 범위들을 의도적으로 좁게 제한시킴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좀 더 로나의 삶에 좀 더 집중하도록 하고,그녀를 둘러싼 사회경제적 상황들에 대해서는 소리를 낮추거나 강한 임팩트를 주는 방식을 피함으로써 오히려 관객의 시선을 더 날카롭고 더 예민해지도록 유도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그들은 마지막 클라이맥스 장면 - 로나가 어두운 숲속을 헤매는 장면- 을 제외한 거의 모든 장면들을 밝고 건조하게 찍는다.마치 자연광 아래서 촬영되는 듯,씬들은 인위적이지 않다.심지어 로나와 끌로디의 섹스 장면 역시 그렇다.어쩌면 굉장히 감정적이고 격렬해야 했을 이 장면 역시 다르덴 형제는,아주 짧게 그리고 단순하게 하지만 사실적으로 또 강하게 처리한다.

 

반면 장미희와 안성기의 정사정면은 매우 환상적인 느낌을 준다.화면의 상단 반 정도를 차지하는 그들의 전라 씬은,안성기의 엉덩이와 장미희의 갸냘픈 다리를 블루 톤으로 처리하면서,마치 일종의 꿈 처럼 묘사된다.물론 그들의 다른 정사 장면은,안성기가 거의 폭력적으로 장미희를 강간하는 상황에 다름 아니지만,가장 중요한 섹스 장면은 이렇게 관객들로 하여금 조금은 비현실적인 에로틱한 감정에 사로잡히도록 만든다.

 

또한 촬영감독 정광석이 미국의 데스 밸리와 그랜드 캐년,그리고 로스엔젤레스의 거리들을 담아내는 기본적인 방법은,거의 다 매우 먼 거리에서 피사체의 전경을 한꺼변에 묘사하는 것이어서,화면에 존재하는 캐릭터들의 모습 보다는 그들이 존재하고 있는 전체 공간과 상황을 깊고 넓게 잡아내는 방법이다.그렇게 함으로써,그들은 그들의 주인공들이 처해 있는 상황의 원인이,다름 아닌 세계 전체에 있다는 것을,세속적인 욕망들의 현상적 발열 때문이라는 것을 나타내려 한다.

 

두 영화가 취하는 방법적인 태도는 어쩌면 정반대이다.<로나의 침묵>이 아주 미시적인 상황의 분석을 통해서 세계 자체의 고통을 드러내려고 하고 있다면,<깊고 푸른 밤>은 관객들의 눈을 아주 넓은 지역에 분산시키고 ,그 분산을 통해서 전체적인 조망을 획득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 두 태도 중,어느 것이 맞다 틀리다 하는 것을 논박하는 것은 사실상 의미가 없다.그것은 태도의 차이이니까.(다만 완성도 자체를 논하는 것은 분명히 가능할 것이다.)

 

6.그녀들의 태아.

 

로나와 제인의 이야기에 있어서,또 하나의 공통적인 소재로 등장하는 것은 그들의 태아이다.로나는 상상의 수준에서 끌로디의 아이를 임신했다고 믿음으로써 끌로디에 대한 연민 혹은 사랑을 ,또한 그녀 삶의 밝은 쪽의 염원을 드러낸다.그리고 다르덴 형제는 그것이 현실적으로는 허위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해서 ,로나의 삶이 가지는 비극성을 한층 심화시킨다.심지어 그녀의 상상된 태아는 그녀를 광끼의 세계로 몰고 가는 것이다.

 

아이라는 영화적 소재가 언제나 희망의 상징으로 등장하는 것은 아니지만,제인이 임신했다고 말하는 백호빈의 아이는 제인에게 희망 그 자체다.제인에게 있어 아이는- 그녀는 이미 한 아이의 양육권을 상실했었고 거기에서 심한 상처를 입었던 경력이 있다- 세상의 의미를 향한 또 하나의 닻이자 받침대이다.그녀는 뱃속의 태아가 백호빈과 자신과의 관계 나아가 자신의 미래를 담보해 줄 든든한 자신이라 여기며,백호빈에게 집착한다.

 

백호빈이 그 아이를 사산시키려고 갖은 비정상적인 짓을 다 할 때,그는 사실 뱃속의 아이가 아닌 제인의 존재를 파괴하려 시도하는 것이다.여기에 제인이 싸늘한 총구와 불 뿜는 총탄으로 반응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다.

 

이렇게 로나와 제인의 아이들 역시 같으면서도 다르다.두 아이는 희망의 상징이자 현실성의 도구이다.그러면서도 두 아이가 낳은 결과들은 좀 다르다.로나의 아이가 로나를 비정상성과 탈주의 복판으로 인도한다면,제인의 아이는 제인을 비현실적인 집착과 파국으로 이끄는 것이다.

 

로나의 희망이 아직은 남아 있는 미완성의 가능성을 상징하는 것이라면,또 그렇게 때문에 그녀가 그녀의 새로운 땅 벨기에의 이름 모를 숲속으로 잠입해 들어가는 것이라면,제인의 소망은 철저히 파괴되고 망가져 버렸으며,제인의 거대한 나라 미합중국에는 로나의 경우 처럼 임시적인 안식처라도 제공할 만한 조그만 숲속의 오두막 조차 없이,거대한 공터 황량한 모래 땅만 존재하는 것이다.제인은 '나앉은 자'로서 '물 위의 사막'에서 살아가다 죽었던 것이다.

 

 

7.그리고.

 

결국 <로나의 침묵>과 <깊고 푸른 밤>,제인과 로나 사이를 연결시켜 글로 쓴다는 것은 어찌 보면 조금 이상한 일이었다.두 여인을 결합시킬 만한 요소들의 친화력이 부족한 탓이다.그러나 뜨겁고 복잡했던 올 해 여름을 보내고 난 뒤,내 생각엔 약간의 변화가 일어났다.

 

세상이 꼭 논리적인 꼭지점들로만 연결된 것이 아니라는 자각이다.글을 쓰거나 생각을 진행시킬 때,논리와 그 매끄러운 연결들로 화학적 접합을 하는 태도가 꼭 옳은 태도는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무엇보다 세상의 사물들 그리고 영화들은 뭔가 느슨하고 유연한 것들로 연결되어 있을 가능성도 있으며,그들이 서로 매우 다른 차원들에 존재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따라서,어떤 제재들이 꼭 논리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하여도,어쩌면 그들을 느슨하게 결합시켜 글을 쓴다는 일 역시 가능할 거라는 결론에 다다랐다.매우 난삽한 연결,그리고 사전적인 글 쓰기 역시 가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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