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오바마 시대의 미국?
어떤 사람들은 <그랜 토리노>를 보면서,'오바마 시대의 미국'을 보기도 했다.특히 미국의 영화평론가들이 그랬다. 아시아계 소수민족을 감싸안으며 죽어가는 보수적인 백인노인의 이야기를 그들은 인종간 세대간의 통합으로 읽었다,미국의 주인을 자처하는 그들의 입장에선 그럴 수도 있었을 것이다.게다가 영화에 등장하는 이탈리아계 이발사나 흑인 양아치 패거리,아일랜드 혈통으로 보이는 신부,게다가코왈스키가 찾아가는 병원의 의사는 중국계이며 간호사는 인도식 의상을 입고 있다.그들은 이 상황을 미국의 인종전시장으로 보았을 것이며,그 중심에 백인 노인인 월트 코왈스키를 놓고 싶었을 것이다.정작 미국패권주의를 조장하는 것은 그런 종류의 지식인들인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더욱 더 월트 코왈스키의, 제의에 가까운 희생을 영웅시하고 싶었을 것이며,사회학적인 상상을 불어넣어 그렇게 글을 쓰고 싶었을 것이다.오바마 시대의 새 가치라는 ,인종간의 통합이나 글로벌한 평화,미국적 가치의 일방강요 자제 등을 생각해볼때,그들은 그런 글들을 쓰면서 시대의 또 하나의 경향을 만들어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가끔 그런 종류의 희망섞인 언사들을 대하면 구역질이 나지만)
또 사실 2009년에 만들어진 일부 미국 영화들에서 그런 경향들이 실제로 나타나기도 했다.
조너선 드미 감독이 만든 <레이첼 결혼하다>가 아마 대표적인 케이스일 것이다.내부로부터 위기를 맞고 있는 평범한 미국인 중산층 가족의 하룻동안의 결혼식 이야기를 훌륭하게 그려내는 이 영화는,우선 영화에 나오는 캐릭터들의 구성부터 다인종적이었다.
신랑은 흑인이고 신부는 백인이다.신랑신부의 친구들은 아시아인(일본인),인도인,중동 사람,중남미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영화 속에 그려지는 결혼식 자체가 인도식이며,결혼식에서 사용되는 모든 음악들 마저,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쟝르의 음악들로 구성되어 있다.레게에 블루스에 정통 아프리카 토속 음악에 브라질리안 리듬에 재즈에 리듬 앤 블루스까지,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음 도저히 그렇게 구성이 되기 어려울 정도의 월드 뮤직을 들려 준다.
거기에,마약 중독자인 동생과 이혼한 엄마 아빠,신경증을 앓는 여피인 언니,마약중독자 재활 모임에서 만나게 되는 신랑의 남자친구까지,코네티컷의 풍경 속에다 이렇게 다층적인 사람들을 섞어놓는 시도를 한다는 것 자체가 '현재의 미국'을 보여주려 했다는 짐작을 가능케 한다.그리고는 로빈 히치콕의 'america'라는 노래를 들려 주며 영화를 끝맺는 것이다.
맞다.죠너선 드미는 미국의 전체적 상황을 보여주려 한 것이다.외부적 통합은 일종의 세레모니인 '결혼식'을 통해서 가능할런지도 모르지만,미국의 대표적 인종인 백인 가족들 사이의 불화와 신경증,그리고 해체되어가는 가족간의 결합은 실제로는 거의 불가능할 것이라는 비관이 다분한 시선으로 그는 영화를 끝맺는다.
앤 헤서웨이는 그간의 영화이력중,가장 빛나는 연기를 보여주었다.이기적이고 폭력적이며 자신의 상처를 아낌없이 남들에게 드러내고 또 전가하고 그러면서도 죄의식에 가득 찬 퍼포먼스적 연기를 보여주는 앤 헤서웨이를 보며,나는 어떤 배우가 되었든 적어도 10년은 흘러야 자신만의 연기가 가능하다는 평범한 진리를 생각했었다.
그러나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그랜 토리노>는 오바마 시대의 미국과는 거의 관련이 없는 영화다.우선 이스트우드 자신이 그것을 부인한다.그는 언제나 자신의 영화에 정치색을 덧씌우는 것을 거부한다.그는 영화 바깥의 세상에서는 분명히 자신의 성향을 드러내면서도,자신의 영화를 얘기할 때는 언제나 정치적 성향을 거부해왔다.자신의 영화가 충분히 정치적인 색깔로 해석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그가 그런 태도를 고집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아마 구구한 설명들이 필요할 것이다.그러나 내 생각은 간단하다.그는 그런 쪽에 많은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그게 이스트우드의 삶이었고,죽기 직전까지도 그는 그런 태도를 고집할 것이다.
사실 그는 거의 언제나 미국인들을 위한 영화만을 만든다.자신의 카메라가 미국 대륙을 벗어날 때에도-예를 들어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나 <아버지의 깃발>의 경우에서도- 그의 눈이 미국인들을 향하고 있다는 것엔 의심의 여지가 없다.그것을 미국 일방주의나 미국 최고주의 같은 단어들로 명명된다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이다.80먹은 노인 아닌가.
그의 다음 영화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넬슨 만델라를 다룬 <휴먼 팩터>이다.이스트우드는 이 영화를 통해 이 문제에 대해 그 자신만의 답안을 내놓을런지도 모르지만 아마 아닐 것이다.그는 만델라의 인간으로서의 파워나 휴머니즘을 다루기만 할 것이다.
어쨌든 <그랜 토리노>는 오바마 시대의 미국과는 관계가 없는 영화다.그가 자신의 영화에 드러나는 정치적 색깔에 애써 눈을 감거나 ,오바마 시대에도 여전히 위선적인 미국식 이데올로기를 미국인 관객들을 향해 주입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그를 직접적으로 겨냥하는 것은,물론 평자의 자유이겠으나,나는 이스트우드가 이 영화를 통해서 진짜로 하고 싶었던 얘기는 또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7.클린트 이스트우드,스스로를 구원하려 하다.
이 영화는 장례식으로 시작해서 장례식으로 끝난다.(아내의 장례식에서 남편의 장례식으로)
영화 내내 코왈스키 노인의 죄의식이 드러나며 그로 인한 고통이 강조된다.
삶과 죽음에 대한 대화가 언제나 반복되며,잊을만 하면 나타나는 카톨릭 신부가 있다.
이 신부는 이 영화에 있어서 일종의 맥거핀처럼 기능한다.그가 나타나는 분량은 그의 영화적 비중에 비추어 보면 상당히 많다.그는 거의 스토커처럼 코왈스키를 따라다니며 여러가지 요구를 한다.코왈스키에게 가혹한 빈정거림을 당해도 노인을 향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영화의 첫 장면,장례식에서의 설교에서 신부는 죽음은 새로운 시작이며 구원은 달콤한 것이라 말한다.거기에 대한 코왈스키의 반응은 싸늘하다.코왈스키는 신부를 이제 운전면허증을 막 취득한 초보운전자로 취급한다.삶과 죽음의 격렬함을 전장에서 경험한 코왈스키에게 신부는,신학교에서 배운 매뉴얼을 그대로 외워서 읊어대는 앵무새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신부는 끊임없이 코왈스키를 찾아온다.죽은 코왈스키의 아내에게 부탁을 받았다는 것이다.신부는 그에게 고해성사를 권유하고 교회에 가자고도 한다.다른 신도에게 하는 것처럼 노인에게 '월트'라고 이름만 불렀다가,'미스터 코왈스키'라고 부르라는 대답으로 모욕당하기도 한다.코왈스키에게 '속죄'란 자그만 고해소 안에서의 짧은 대화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그래서 그는 신부의 기독교적 요구에 응할 수가 없다.그것은 그의 양심의 문제이다.
코왈스키가 자신의 죽음과 삶에 대해 생각하는 지평은,기독교 교리가 아닌 스스로의 과거와 더 관련이 있다.평생 동안 그를 괴롭힌 것은 한국전쟁에서 자신이 저지른 학살이다.그 학살에 대해 속죄하지 않으면 그에겐 구원이 없다.
술집에 찾아온 신부가 그에게 삶과 죽음에 대해 얘기하려 하자,노인은 '네가 도대체 알고 있는 것이 뭐냐?'라고 반문하며,자신의 살인 이야기를 들려 준다.그리고 그렇게 해서 살아남았다고 덧붙인다.이 때 신부를 노려 보는 코왈스키의 얼굴은 경멸과 혐오로 가득 하다.
반면,몽족의 가족 파티에 참석했을 때 우연히 만난 몽족의 가족 무당이 그의 과거를 읽어보고 하는 말인,과거에 저지른 어떤 잘못 때문에 현재 삶에 아무런 만족이 없고,그래서 당신의 인생엔 아무런 기쁨이 없다는 일갈엔,그저 허를 찔린 표정만 짓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은,그가 괴롭게 기침하며 피를 토하는 장면이다.누구나 그가 죽음을 향해 다가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장면이다.이렇게 죽음의 분위기가 한 두 번 스크린에 휘감긴다.병원의 검사결과를 알게 되고,그는 아들에게 전화를 건다.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그냥 안부만 전하는 데에 그칠 뿐이다.아들은 이상한 예감에 사로잡힌다.
이렇게 이스트우드는 천천히 하나의 세레모니들을 이어나가기 시작한다.대단원의 희생에 걸맞는 의식들을 진행하기 시작한다.그는 마지막의 숭고함을 연출하기 위해 갖가지 디테일들을 곳곳에 걸쳐 놓는다.
마지막 전투를 결심하고 있는 그 밤,문제의 신부가 또다시 그를 찾아 온다.폭력적인 복수를 말리기 위해 찾아오는 것이다.이 때,처음으로 코왈스키는 신부에게 마음을 연다.자신을 '월트'라 그냥 이름을 부르라 말한다.신부 역시 술집에서 만났을 때와는 달리 코왈스키와 함께 술을 마신다.
코왈스키는 저녁의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마지막 가는 길을 정리하기 시작한다.그는 정원을 마지막으로 손질하고 욕조에 들어가 몸을 씻는다.(마치 자신을 희생제물처럼 생각하는 듯 말이다).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집 안에서 담배를 피우고 이발소로 가서 머리를 손질하고 수염을 깎아달라 부탁한다.장례식에서 자신이 입게 될 양복을 맞추고,드디어 신부의 성당을 향해 고해성사를 하러 떠난다.
그러나 이 고해성사에서,그는 자신의 살인을 언급하지 않는다.그가 자신의 죄악이라고 신부에게 고해성사한 죄는 고작해야 세 가지,1968년에 몰래 한 키스,900달러의 세금을 떼어먹은 것,그리고 두 아들에게 살갑게 대하지 못했다는 것이다.그 이외에는 없고,코왈스키는 '이제 나는 평안하다'라고 말한다.
끝까지 그는 전쟁에서의 살인을,그의 가장 치명적인 죄악을,기독교라는 종교기구를 통해서 죄사함을 얻으려 하지 않는다.간단하게 말해서 그는 기독교의 가장 기본적인 교리를 거부한다.(그가 기독교로 대변되는 미국을 거부하는 거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오버이다)
그는 오히려 스스로의 죽음을 통해,자기 자신에게 구원을 부여하려 한다.죽음은 죽음으로 피는 피로 갚으려는 것이다.그렇게 해서 얻어지게 되는 것은 고작 한 소년과 한 소녀의 평화일 뿐이지만,코왈스키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그것이 바로 자신의 구원 방법이라고 그는 확신하는 것이다.끝내 그는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며,그의 입장에선 그것이 정당하다는 것이다.
마지막 의례,자신의 애견 데이지를 몽족 할머니에게 맡긴 다음 그는 스스로 몽족 패거리들을 찾아가 그들을 도발하고는 그들의 총알에 맞아 쓰러진다.쓰러진 그는 마치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형상을 하고 있다.
이 장면들의 폭발력은 상당하다.그러나 그것의 메세지가 주는 압박감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이 장면의 숭고함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장인적 영화연출력이 만들어낸 예술작품으로서의 능력이다.
반면,이로써 이스트우드 혹은 코왈스키는,사회적 파급력이나 상징성이 없는 개인으로서의 구원을 성취해낸다.분명히 말하지만 이런 종류의 구원은 한 개인의 인생에 있어서나 가능한 일이며,전체 유기체나 사회의 측면에선 아무런 의미도 없다.
이스트우드는 영화적 인물의 구원을 성취해내면서 한 '영화'를 만들어낸 것이다.그것은 젠틀한 마초이자 무신론을 끝까지 유지하는 보수주의자의 일대기이다.그것이 자기 자신의 모습을 상징하는지,그렇지 않은지에 대해서는 말하기 어렵다.말 할 자신이 없다.그리고 거기에 대한 대답은 이스트우드 역시 모르고 있을 것이다.영화작업이라는 본능에 의해서 만들어진 영화이기 때문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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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의문,이 영화가 왜 '워낭소리'와 닮아있다는 것일까? 주인공이 노인이기 때문에? 그러면 이스트우드의 총은 <워낭소리>의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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