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어떤 영화들의 리뷰
언젠가 보았던,또는 어제 보았던 영화에 대한 리뷰들을 쓴다는 것도 그렇다.매우 다양하다.어떤 영화들은 시간 여유가 없어 정신없이 해치워야 하는 아침식사처럼 허겁지겁 인상만을 나열하게 되고,어떤 영화에 대한 글들은 어떤 감정적인 상황 - 감탄이나 분노 같은 -이 선행되어 그 감정을 토로하고 정리하느라 역시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게 된다.
한편 또 어떤 영화들은 내가 만난 어느 특정한 상황 속에서 다시 태어나거나,또는 아주 정밀하고 고요한 풍경 속에서 생각을 거듭하게 되어서,처음 그 영화를 보았을 때의 인상과는 전혀 다른 리뷰로 탄생하게 된다.그리고 또 어떤 영화들은 그 영화의 리뷰를 통해 내 인생의 어떤 한 스테이지를 규정하고 또 되돌아보게 만드는 기억의 매개물로 만들어지게 된다.
나는 아주 가끔 그런 영화들을 만나게 되는데,거기에 어떤 일정한 시간 법칙이나 주기라고 표현될 만한 기준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나도 모르게 그렇게 된다.그렇지만 최대한의 객관성을 가지고 내 내부를 투시해보자면,'나도 모르게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어쩌면 '그렇게' 써 보려고 최대한 마음을 가다듬고 대상이 된 영화들을 한참이나 바라본 후 리뷰를 썼던 것인지도 모른다.
가령 2006년에 썼던 <행잉록에서의 소풍>이라는 영화의 리뷰가 그랬었다.그 리뷰는 분명히 내 어떤 시기의 과거들을 재구성하고 있었고,영화 속 캐릭터들의 분석이라는 핑게로 내 내면을 탐구하고 있었다.읽는 사람들의 의도 또는 마음가짐,또 내 본연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내가 썼던 글이 그렇게 진행되었었다는 사실을 이제 난 알고 있다.
지금 쓰려고 하는 2006년 중국의 지아장커가 만든 영화 <스틸 라이프>의 리뷰의 최종적인 형태가 어떤 꼴로 나타나게 될지,지금은 나도 모른다.다만 예전에 <행잉록에서의 소풍>을 쓸 때 처럼 ,쉽고 편안하게 이 영화에 접근할 수 없을 거라는 예감이 약간의 어지러움을 유발한다.
2.나의 위치
그런데 지금 나의 시공간적 위치는 일요일 아침의 식탁 앞이다.아내와 은별이는 방에서 잠들어 있고,그야말로 조용한 정적 속에서 아파트 공간 특유의 소음들이 귀를 압박하고 있다.냉장고의 웅웅거리는 소리가 왼쪽 옆구리 뒷편에서 끊임없이 내게 말을 걸고 있는데 눈을 들어 앞쪽을 바라보면 하얀 소파의 뒷모습이 그린 듯 꿈쩍하지 않고 앉아 있다.
나는 내 자신이 이 사물과 더불어, 어떤 정물화 속 한 대상이 되어버린 듯 느낀다.
정물화,고요함,정지 ,그리고 스틸 라이프 (still life).
그리고 나는,지금 흘러가고 있는 현재의 시간이 영원히 사라져버리고 마는 것인지,그렇다면 그 안에 존재했던 나,그림 외부에서 잠자고 있는 아내와 은별이는 도대체 어떻게 되어버리게 되는 것인지,누군가 내게 알려줄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3.<스틸 라이프>의 이야기
21세기를 대표하는 영화 중 하나가 될 지아쟝커의 <스틸 라이프>는 ,언뜻 보면 바로 이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애달픈 연가처럼 느껴진다.15년이 넘는 대역사인 '싼샤 댐 건설 작업'으로 인해 영원히 수몰되게 될 싼샤 지역을 무대로,사라져버린 사람들을 찾아헤매는 이 영화의 줄거리만 보아도,'사라짐'이란 단어가 이 영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알 수 있다.
물론 좋은 영화 - 이 영화는 그러나 단순히 '좋은 영화'가 아니다.우리는 <스틸 라이프>를 향하여 과감하게 걸작이라는 호칭을 붙여주어야 할 것이다 - 의 당연한 조건처럼,<스틸 라이프>는 단순하게 사라짐만을 얘기하는 영화가 아니다.<스틸 라이프>는,중국의 현대사와 그 현대중국을 살아가고 있는 평범한 인민들의 삶,나아가서 인간의 행복이라는 명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질문을 던지는 방식도 다양해서 은유와 초현실과 인간의 육체와,비길 데 없이 아름다룬 자연들까지 모두 다 동원된다.나는 <스틸 라이프>를 거의 완벽한 영화라고 생각하는데,이 영화가 만들어진 계기만을 돌아본다면,걸작의 탄생 계기치곤 좀 어설프다.
지아쟝커는 어느날,자신과 영화작업을 함께 했던 - 미술을 담당했고 가끔은 연기까지 맡아주었던 - 어느 화가에게 연락을 받는다.그 화가는 이제 곧 수몰의 운명에 놓이게 된 싼샤 지역의 풍광과 그 곳에서 철거노동자로 일하고 있는 열 두 명의 남자들의 모습을 그릴 계획인데,그런 자신의 작업을 다큐멘터리로 만들어 볼 것을 지아쟝커에게 권유했고,지아쟝커는 그 제의를 순순히 응낙한다.
그 다큐멘터리의 제목이 바로 <동>이다.
'동'은 그 화가의 이름 리우샤오동의 바로 그 '동'으로서 다큐멘터리 작업 내내 사람들이 리우샤오동을 부르던 애칭 같은 호칭이었다.그러나 지아쟝커는 다큐멘터리를 찍는 도중 자신의 극영화를 구상하기 시작했고 불과 3일만에 시나리오를 완성한다.그리고 다큐 작업이 끝난 후,전국에 전화를 걸어 과거에 자신이 작업했던 배우들과 스탭들을 불러모은다.어떤 배우는 영화의 내용 조차 모른 채,가방 하나 달랑 둘러메고 촬영지를 찾았다고 한다.(그 배우는 지아쟝커의 이종사촌형으로서 전문배우가 아니라 실제로 광산에서 일하는 광부였다)
왜,무엇이 지아쟝커로 하여금 이제는 완전히 사라져버리게 될 동네를 배경으로 외롭고 쓸쓸한 인물들이 등장하는 영화를 찍게 한 것일까? 눈 앞에서 실종되어 가는 거대한 풍경에 대한 마지막 헌사를 바치기 위해서 였을까? 그는 그곳에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중국 인민들의 직접적인 초상이라도 보게 된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싼샤와 사람들의 모순적이고 역설적인 조화를 목격한 후 내면의 어떤 용솟음을 느꼈던 것일까?
4.<스틸 라이프>의 이야기 - 완벽한 스포일러
지아쟝커의 <스틸라이프>는 싼샤를 찾아드는 여객선 속의 한 풍경으로 시작한다.카메라는 배 안의 사람들을 아주 심상하게 비추어 나간다.웃는 사람,얘기하는 사람,담배를 피우는 사람,노인들 아이들..배는 장강을 흘러가고 ,그 흐르는 인생 속에서 사람들도 그렇게 실려가는 듯 하다.
그리고는 싼샤의 절경이 눈 앞에 펼쳐진다.그 협곡의 장엄함은 그 다음 장면에 나오는 무질서한 신시가지 건물과 극적인 대비를 이루며 영화의 첫 5분을 장악한다.
그 여객선의 뱃머리에 무감각한 표정의 약간 지친 듯 보이는 한 사내가 앉아 있다.그러나 그의 표정을 묘사한 내 형용사 '지치다'는 그저 내 느낌일 뿐이다.사실은 내 느낌이 완전히 틀릴 수도 있다.저 표정은 저 지방 사람들의 전형적인 얼굴일 수도 있으며,10초 후 남자의 표정이 미소로 바뀔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간과하고 있다.
이어 그는 얼떨결에 얼치기 사기꾼 패거리들이 진행하는 가짜 마술쇼장으로 끌려 들어간다.마술사가 관객의 눈 앞에 펼쳐 놓은 것은 중국의 위안화 지폐이다.마술사는 그 지폐를 유로화로 바꾸는 마술을 해 보인다.그것은 바깥 풍경의 복사판이다.중국은 10위안화에 그려진 싼샤 지방을 달러와 유로화로 바꾸려는 마술작업을 진행 중이니까.마술사는 팔랑거리는 지폐 (그 지폐엔 아마 그들의 마오 주석의 모습이 그려져 있을 것이다) 로 주인공 남자의 머리를 통통 두드린다.그리고는 이렇게 간단한 마술의 대가로 돈을 요구한다.
남자는 돈이 없다고 말한다.마술 쇼단의 건달들이 다가와 그의 가방을 뒤진다.돈이 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그들의 위협에도 그는 여전히 무표정이다.아마 예전에도 이런 종류의 일들을 여러 번 겪어 보기라도 한 듯,매우 익숙해 보인다.건달들은 골목길 공식 그대로 그의 주머니 속을 원한다.그러나 남자가 주머니 속에서 꺼내 놓는 것은 날카로운 잭 나이프다.
이 남자 한산밍은 어떤 주소를 찾아가고 있다.그곳엔 16년 전,즉 싼샤댐의 건설이 시작될 무렵 그를 떠나간 아내와 딸이 살고 있다고 그는 믿고 있다.섬서성에서 일하는 광부인 그는 3천 위안을 주고 아내를 샀었다.그러나 1년 후 딸을 낳은 아내는 그를 떠나가 버렸다.16년이 흐른 지금 그는 아내의 옛 주소를 찾아가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그곳에 도착한 그는,그 집 뿐만 아니라 온 마을이 물에 잠겨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그 지역 전체가 현재진행형으로 수몰되고 있었고,곳곳에 다음 번 수몰 위치를 알리는 붉은 색 페인트 작업이 진행 중이다.
한쪽에서는 건물의 철거가,한쪽에서는 수몰의 양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모두가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다.
그는 관공서를 찾아간다.그곳은 그러나 철거로 인해 이 곳을 떠나게 된 사람들의 항의가 가득하다.정부의 정착금이 엉터리로 지급되었다는 주민들의 항의는 어디선가 꼭 본 듯한 그것이다.사람들은 말단 공무원에게 이주 정책의 부조리와 철거및 개발업자와 공무원들의 부패를 탓한다.관리는 항변한다.2000년 된 도시가 2년 만에 헐리게 되는 것인데,어떻게 공평하게 일이 진행되겠느냐고..
문제는 풀리지 않는다.그러나 경찰과 용역과 물대포가 동원되지는 않는다.(그러나 이 영화에서 용역 비슷한 건달들이 등장하는 것도 사실이다) 사람들과 그는 결국 허탕을 친다.그곳에서도 아내의 소재를 알아낼 수 없다..
한산밍은 하숙집을 정한다.아예 눌러앉은 다음에 아내와 딸을 찾아나설 요량이다.다음 장면엔 마이크라는 젊은이가 등장한다.그는 텔레비젼에 나오는 주윤발의 홍콩영화 장면 -달러 지폐에 불을 붙혀 담뱃불로 사용하는 - 을 흉내내고 있다.
(류승완 감독 닮지 않았나? ^^)
그 때 오른쪽 구석에 글자가 뜬다.烟 cigarettes
이렇게 이 영화엔 가끔씩 자막이 등장하는데,금방 얘기한 담배와,술,차,사탕이라는 단어들이다.중국 사람들에게 있어 ,이 네가지는 꼭 필요한 것이자,이 네 물건만 갖추고 있으면 자신의 삶에 어느 정도 만족할 수 있는 물건들이라고 한다.
마이크와 담배를 나눠 핀 한산밍은 아내의 친척들에게로 향한다.담뱃갑 속의 담배를 건네 주며 한산밍은 아내의 행방을 알아보려 하지만,돌아오는 것은 싸늘한 냉대와 발길질 뿐이다.결국 한산밍은 16년 전 자신을 떠나간 아내가,이 거대한 댐 건설 현장 어딘가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만을 알아낸다.결국 그는 건물철거인부로 일하게 되고 쉬는 날엔 아내를 찾아보기로 결심한다.
그가 앞으로 동료가 될 인부들과 싼샤댐의 절경에 대해 이야기하며 나누는 것 역시 담배다.
그리고는 언뜻 보면 전혀 필요가 없을 것 같은 에피소드 두 장면이 이어진다.
첫번째는 웃통을 벗고 소박한 근육을 드러낸 노동자들이 열심히 일하고 있는 가운데,
갑자기 하얀 우주복 같은 옷을 입은 방역요원이 나타나서 건물 곳곳에 소독약을 뿌리는 장면이다.마치 봉준호의 <괴물>에 등장하는 방역요원들 같은데,벌거벗은 노동자들의 근육과 대비되는 그들의 제복과 행위는 무언가 핀트가 맞지 않는 것 같은 ,낯선 감각을 자아낸다.
두번째 장면은,그 무너져 가는 건물 안에서 철거노동자들이 밥을 먹고 있을 때,역시 웃통을 벗은 열 살 남짓 나이 먹었을 소년이 홍콩영화 주제가 '워 아이 니'를 목청높여 부르는 장면이다.이 소년의 노래는 영화 후반부에서 한산밍이 아닌 다른 주인공이 등장했을 때,또다시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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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하게 스포일러이고, 영화의 줄거리를 스틸사진까지 곁들여 너무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이 영화는 이미 개봉된지 오래이고 심지어 EBS에서 방영까지 되었다는 것을 고려하자면,이 정도의 무리는 용서해주시리라 믿는다.가끔 내가 그럴 때가 있다는 사실까지 생각해주셔서 약간의 양해를 해 주셨음 한다.
어차피 PART2 도 스포일러 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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