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사랑에 관한 글을 쓰고 싶었어.사랑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도 아니고 다양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지만,그래도 사랑에 관한 조그만 글이라도 남겼음 하는 바램이 내겐 있지.물론 영화를 통해서야.사랑을 다룬 영화들 -뭐,한 두개라야 말이지- 에 대해 썼음 했는데,생각보다 방대한 작업이더라구..그래서 언제나 손 놓고 멀거니 앉아있게 만드는 게 바로 '사랑'이란 주제야.
하지만 사실 '사랑'이라면 누구나 할 말이 한 두 마디 쯤은 다 있는 거 아니야?.누구나 자신의 첫사랑에 대해 아스라한 기억 같은 것을 마음속에 품고 있고,또 어떤 사람은 새로 다가올 사랑에 대해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순수한 희망을 가지고 있지. '사랑'에 대해 읊은 시인들은 또 얼마나 많아.사랑을 노래하는 가수들은 또 얼마나 많고.그래서 어쩌면 나까지 등장해서 수다를 떤다는 게 좀 웃기기도 웃기지만,..,그 창피함 때문에또 이렇게 너한테 쓰고 있는 지도 몰라.그러나 아무래도 끝까지 '사랑' 운운하지는 않을 것 같아.그건 내가 너를 어느 정도 알고 있기 때문이고,또 어쩌면 굉장히 많이 널 이해하고 있는 지도 모르니까.
사실 네가 행하는 사랑의 형태라는 게 너무 기묘하거든.내 생각으로는 넌 사랑하고 있는 게 아니야.네게 사랑은 그냥 관념이거든. 네 사랑은 뭉클거리는 반 액체 반 고체 상태의 구름 같은 점액질 처럼 너의 두뇌 속을 떠 다녀.사랑이란 단어를 들으면 아마 넌 그 정체 모를 두뇌 속의 관념 같은 것을 떠올리게 될 거야.그리고는 생각하지.난 사랑하고 있다고.난 열심히 사랑하고 있다고.하지만 두뇌의 정체 모를 이미지 같은 너의 사랑은 현실적으로는 일종의 개그지.넌 사랑의 디테일엔 관심 조차 없어.넌 '사랑'을 생각하지만 사랑을 행하지는 않아.무관심한 냉소로 너의 사랑 상대를 대하고 ,상대가 상처를 받으면 다시 두뇌 속의 구름으로 도피하지.그러면서 여전히 말해.'난 사랑하고 있다'고.
좀 웃기지 않냐? 난 그렇게 생각해.사랑이란 상대의 가장 더러운 꼴을 참는 거라구.우리가 우리의 아이들을 가장 사랑하는 시간은 그 애들이 싼 똥이나 오줌을 치울 때이고,그 애들이 가장 말도 안 되는 요구를 가장 말도 안되는 형태로 칭얼거리기 시작하는 것을 모든 힘을 다해서 달래고 있을 때이지..바로 그게 아이들에 대한 사랑의 증거야.물론 그 다음부터 취할 행동들은 선택사항이지. 사랑의 매로 곧장 연결된다 하여도 미성년자 폭행이 아닌 이상 간섭할 수 없는 거야.사랑니를 뽑듯이 사랑하면 안되는 거니까.
결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일거야.관념으로만 유지하는 결혼은 되게 웃겨.우리가 다이애나 왕세자비는 아니니까.생활 내내 이어지는 디테일에 지속적인 무관심으로 대응하다 보면,그 결혼은 폭파되게 마련 아닐까? 실제로 갈라서는 것보다 무서운 건 내부로부터의 붕괴야.그런 붕괴는 디테일이 손상되는 것이거든.작은 부품들이 망가져 있는 기계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그렇다고 새 기계를 장만할 생각을 하는 것도 아니고,또 그런 기계를 만지는 사람들은 영원히 기계의 오작동 상태에 적응하게 되고 이내 그런 상태가 정상이라고 생각하게 되지.
삶은 조그만 디테일에 그 중요성이 있고,디테일에 강한 사람일수록 좀 더 행복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많이 갖게 되는 것이라고 나는 늘 생각해.나야말로 디테일에 약한 사람 중의 하나지만 말야.그래도 예전에 비해서는 정말 나아졌어.그리고 죽을 때까지 점점 나아질 거야.그렇게 되고 말 거야.
1.2008년 사람들의 결혼과 사랑에 대한 풍경 - <사과>
2006년에 만들었지만 개봉관을 잡지 못하고 있다가 해외 영화제에서 상을 탄 후 2008년에야 개봉한 영화가 바로 <사과>야.나는 얼마 전부터 2008년 영화 키워드에 대한 글을 주저리주저리 쓰고 있었는데,그 중 '풍경'이라는 카테고리에 분류해서 리뷰를 쓰고 싶었던 영화가 바로 이 영화야.그런데 어쩌다 보니 너한테 쓰는 편지 도중에 나오고 말았네.뭐 이해해라.다 니 팔자니까.
저기 문소리 보이지? 문소리가 나오는 영화야.이선균하고 김태우 같은 배우들이 공연하고.
이 영화는 우리 시대 사람들의 사랑과 결혼에 얽힌 디테일에 관한 중요한 기록이야.착하고 평범하고 성실한 사람들의 연애와 그 훗날 이야기들의 평이한 연대기지.배우들의 연기 앙상블도 뛰어나고 영화 역시 시종일관 꾸밈 없이 솔직해.게다가 심현정이라는 작곡가가 담당하는 영화 음악은 굉장히 뛰어나.바하를 기조로 해서 맑게 흐르는 그녀의 영화음악은 오다기리 죠가 나오는 <비몽>의 음악과 더불어 2008년 우리나라 영화의 가장 뛰어난 영화음악들 중 하나지.
<사과>는 참 잔잔하고 조용해.물론 이제 사람들에게 잔잔함이란 지루함이며,조용한 흐름이란 재미없음이며,그 두 가지는 아트 필름의 한 특성들로 눈흘김 당하고 있는 지도 몰라.특히 '예술 영화'라는 것은 지식인들이나 씨네필들의 허영 정도로 치부되기도 하지.하지만 '예술 영화'라는 건 없어.'아트 필름'이라니 당치도 않지.'아트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은 있어도 '아트 영화'라는 건 없어.더구나 <사과>는 예술 영화가 아니야.그냥 조용한 풍경에 관한 영화일 뿐,거창한 개념이나 세계에 대해 읊조리는 영화가 아니야.
사람들은 그 잔잔함과 조용함 때문에,<사과>를 무시하고 넘어가 버렸어.그냥 포스터를 쳐다 보고 아아 문소리와 김태우와 이선균이 나오는 영화구나,라고 생각하고 지나쳐 버렸어.뭐 어쩔 수 없는 일이지.
하지만 내게 <사과>는 2008년의 가장 중요한 영화들 중 하나야.이 영화는 우화도 동화도 판타지도 아니야.꼭 내 주위에서 일어날 만한 일들을 그대로 필름에 옮긴 가장 현실적인 영화야.영화를 보고 있으면 문소리는 내 철없는 여동생으로 느껴지고 김태우는 내 어느 답답한 이공계 후배로 느껴져.이선균은 그 혀짧은 발음에도 불구하고 어디서 많이 본 직장 후배로 보이고 문소리의 가족들은 언젠가 교회에서 만난 적 있는 평범한 가족들로 보이지.
아,영화를 보지 않았을 테니 잠깐 줄거리를 설명해도 되겠지? 어차피 넌 앞으로도 이 영화를 보지 않을 거니까 스포일러라고 얘기하지도 않을 테니까.문소리와 이선균은 7년째 사귀고 있는 연인이야.
양가 부모 인사도 다 드렸고 모두 다 당연히 결혼할 커플로 알아.그런데 이선균이 갑자기 문소리를 차 버려.특별한 이유도 없어.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도 아니야.문소리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로 결별을 선언해.여기까지 영화는 여타 영화들과 비슷해.그런 스토리 많으니까.그런데 문소리의 반응이 특이해.이선균은 제주도의 바닷가에서 문소리에게 결별을 선언하게 되는데,문소리는 전혀 못들은 척 해.그냥 계단을 올라가 버려.어떤 표정의 변화도 없어.
그런데,원래 사람들이 결별을 선언당할 때 취하는 반응이 이런 거 아니야? 도저히 믿기지 않으니 모른 척 한다.거대한 곰이 다가오니 죽은 척 한다.뭐 이런 거.난 그 장면을 보면서부터 이 영화에 집중하기 시작했어.문소리는 울고 불고 하지 않지.심은하처럼 '다 부셔버릴 거야'라며 증오에 떨지도 않고 이선균의 새 파트너의 오빠를 유혹하는 것도 아냐.그냥 시간이 흘러가지.문소리는 일상에 복귀하고 또 그렇게 세월이 지나가.
다음 장면은 아마 문소리의 집안이었을 거야.파리한 낯빛의 문소리가 방 안에서 나오는데,문소리의 아버지가 그녀를 살짝 위로하려는 장면이지.과다한 제스추어를 쓰는 것도 아니야.그냥 그래.문소리는 또 아버지의 그런 염려를 알아.심상하게 넘어가지.그런데,사람들이 또 그래.그렇게 그렇게 갈려고 해.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고통을 과장하지 않아.오히려 숨기려고 하지.더구나 부모 앞에서는 더 그래.
그런 문소리 앞에 다가오는 사람은 김태우야. 특유의 어리벙벙함으로 김태우는 문소리와 결혼하는 데에 성공해(이 친구는 정말 어리버리 연기의 대가야) 그는 문소리를 무작정 쫓아다니지.꽃다발을 손에 들고 동네 놀이터에서 기다리기도 하고,뭐 이러면서 전혀 로맨틱하지 않은 친구가 로맨틱한 척 하려고 노력해.결국 바닥을 보이지만 말야.문소리는 김태우에게 질문해.왜 자기를 이렇게 쫓아다니는 거냐구.
그러자 이 무심한 친구 ,이렇게 대답해.
- 이 건물에서 제일 예쁘니까요.
이 친구의 세계는 문소리와 자신이 근무하는 그 오피스 건물에만 한정되어 있지.거기서 나가면 아무 것도 할 줄 몰라.그런 사람들 많쟎아,병원 문을 나서면 아무 것도 모르는 의사들처럼 말이야.그가 지방으로 자원근무를 내려가서 실패하는 이유도 근본적으로는 바로 그런 까닭이지.그에게 있어 사랑은 바로 너처럼 머릿속의 관념이야.결혼이라는 자신의 건물 바깥의 새로운 세계를 만나자 그는 어쩔 줄 모르고 좌초해.그는 솔직해지지도 못하고 삶의 디테일이라는 것을 몰라.그는 그 어떤 얘기도 문소리에게 할 줄 모르고 또한 문소리 역시 김태우를 잘 몰라.
물론 그건 우리 모두의 한계지.어떻게 상대방을 모조리 이해할 수 있겠어? 너한테 한 말 아니니까 그렇게 신경쓸 건 없다고.^^
여기서 영화는 또다시 풍부한 디테일을 제공해.김태우와 문소리의 근본적 차이.그들의 문화적 차이.배경의 차이를 충실히 그러나 효과적이면서도 간략하게 묘사해.
쇼핑을 좋아하는 문소리와 쇼핑에 질려 하는 김태우.휴일엔 등산을 가야 하는 김태우와 강남의 레스토랑엘 가야 하는 문소리.일요일엔 꼭 교회엘 가야 하는 중산층 기독교 가정인 문소리네 집안과,경상도 시골에 위치한 보수적인 김태우네.영화는 은근히 두 배경들의 차이를 부각시키지.물론 그 차이가 두 사람 관계의 어려움이라고 영화가 웅변하고 있는 것은 아니야.그런 촌스런 소리는 '사랑과 전쟁'에서나 나오는 이야기지.이 영화의 감독 강이관이 굳이 두 집안을 밑그림으로 하는 에피소드를 포함시키는 이유는,그것이 이 두 사람을 둘러싼 일상적인 풍경이기 때문이야.그래 일상성,강이관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바로 그거야.두 사람의 문제는 바로 그 일상에서 발생하고 그렇기 때문에 두 사람의 문제는 해결이 아주 쉽기도 하고,또 아주 어렵기도 해.이 영화의 감독은 바로 그 일상을 그리기 위해서 노력하고 또 노력하는 거야.그의 노력은 문소리와 김태우 커플을 떠나 주변의 사람들에게까지 신경을 쓰는 상황에 도달하지.당연해.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김빠진 맥주 같은 영화가 될 테니까.
가령 문소리의 엄마 최영인은 결혼 생활의 불만을 토로하는 문소리에게,'아직 애도 없으니까 빨리 이혼하라'고 말해.옛날 엄마들하고는 좀 다르지.하지만 요새 엄마들 이렇지 않나? 맞아.바로 그래.정확히 현실적이지.이 기독교 가정의 엄마는.또 요새처럼 기독교인들이 약간 우스운 행적들을 고수하고 있지 않았더라면 훨씬 귀엽게 보였을 거야.이 가족은.
여기서 문소리는 다시 이선균을 만나게 되지.이선균은 그리 변한 게 없어.여전히 밋밋하고 여전히 다정해.그들은 어영부영 예전의 관계를 회복하려는 듯 보이지만,이선균의 그 여전함 때문에 또다시 한계에 봉착해.이번엔 문소리가 그걸 먼저 알지.먼저 차 버리는 것도 문소리야.
그런데 이 관계가 텔레비젼 방송국의 수목드라마였음 어땠을까? 아마 아주 머리가 아픈 상황으로 발전했을 거야.전형적인 불륜 관계를 상정하고 그 관계의 불평등함이나 부조리함에서 나오는 고단함으로 보는 사람들까지 괴롭게 만들었겠지.그래서 또 누군가는 누군가를 욕하고 누군가는 또 누군가에게 도덕적인 잣대를 들이밀고 방송국의 홈페이지나 네이버의 댓글란엔 놀이를 즐기는 사람들로 넘쳐났겠지.
하지만 <사과>는 그렇게까지 오버하지 않아.옛 연인을 만난 문소리는 여전히 유부녀인 문소리이고,불륜에 빠진 이선균도 여전히 그대로야.그들 역시 우리가 현실 속에서 만나는 불륜들의 어떤 전형이야.오해하지마.네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니까.그냥 이 영화는 이 에피소드 조차 어떤 가벼운 풍경처럼 묘사해.과도한 감정의 파도를 상정해서 사람들을 괴롭히지 않아.있을 수 있고 또 어떻게 전개되었을지 알 수 없는 어떤 '사건',또 하나의 사랑,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우연한 접촉사고인 것처럼 상황을 꾸며 놓아.그리고 그것이 2008년을 살아가는 젊은 사람들의 사랑과 결혼에 관한 한 풍경이라고 나지막히 얘기해.그리고 난 풍경화로서의 이 영화의 가치를 높게 평가해.
영화는 끝까지 이런 기조를 놓치지 않아.문소리는 김태우에게 고백하지.'예전의 남자를 만나고 있었다고." 그리고 '사과'해.이 '사과'는 예전에 그녀를 찾아온 이선균에게 버스터미널에서 배웅하며 건네 준 사과 (애플)과는 다른 종류이지.난 문소리가 김태우에게 고백과 사과를 병행할 때,이 영화의 결론이 무척이나 궁금했어.이런 종류의 영화에 있어서 마지막 장면이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적어도 <사과>가 어떻게 마무리되는가 하는 것은 이 영화의 뚝심의 강도를 짐작할 수 있는 시금석이거든.
김태우는 술을 잔뜩 먹고 집엘 들어 와.그럴 수 있는 일이지.직장과 가정에서 약간의 좌초를 경험한 30대 남자.술,,먹게 되지.문소리는 자고 있어.피곤했던 모양이야.자신을 멍하게 쳐다보고 있는 김태우에게 그녀는 자신이 덮고 있던 이불을 살짝 들어올리며 이렇게 얘기해.
- 늦게 들어 왔네? 자자...
그녀의 목소리는 졸음이 잔뜩 묻어 있는 여자 특유의 다정함으로 넘쳐나고 있었어.더 이상 사과하려는 것도 아니야.그리고 그들의 관계가 완전히 끝났다는 것도 아니야.세상은 이렇게 심상하게 흘러간다는 것을,삶은 이토록 평범하고 조용하게 흘러간다는 것을,문소리는 하나의 동작과 한 마디의 대사로 보여주는 거야.
나는 그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라고 생각했어.내 아내가 바람을 피우게 되더라도 아마 그런 식으로 일이 진행되었을 거라고도 생각했어.그리고 결국 강이관은 자신의 첫 장편영화에서 끝까지 자신의 첫 기조를 바꾸지 않은 셈이 된 거지.나는 설득당한 기분이 들었어.그리고는 '비포 선라이즈'가 생각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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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반 밖에 안 끝냈는데,일단 여기서 그쳐야겠어.편지가 너무 길어서 말야.^^ㅡ 만나면 주로 얘기하는 건 넌데,오늘 따라 왜 내가 이리 말이 많은지 모르겠다.아마 너한테 쌓인 것이 많아서 그럴 거야.오늘 밤에 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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