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아침에 출근하는 30분 동안의 시간에 듣는 음악은 퀸시 존스의 1995년 앨범 < Q'S JOOK JOINT>이다.음악계의 스티븐 스필버그답게,퀸시 존스는 자신이 프로듀싱한 그 앨범에서,ray charles stivie wonder
baby face,,hervie hancock, bono ,chaka khan,gloria esthefan,brandy등의 슈퍼스타들을 총동원해서 일종의 향연을 펼친다.
리듬들은 잠깐 동안 나를 가볍게 흥분시키고 기쁨에 젖게 한다.또 블루스들은 아침 기분을 오히려 나른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 긴장의 이완은 안전한 아침 운전을 확보하게 해 준다.
때론 향수가 습격할 때도 있다. there I go,there I go를 반복하는 여섯번째 트랙 'moody's mood'가 시작되면,20년 전 그 음악을 들으며 거리를 걷던 기억이,그 거리를 감싸안았던 가을의 방향을 분명하게 재생시키며 어떤 시절의 분위기를 내게 환기시킨다.
문득 나는 생각한다.지금 재현되는 이 분위기,갑자기 내 후각을 예민하게 해는 이 냄새들은 과연 20년 전의 냄새를 정말 그대로 복원시키고 있는 것일까? 비록 사라져버린 어떤 실종된 시간대일 망정,두뇌 속의 어떤 신비하고 능력있는 메카니즘이 존재한다면 그 무너진 건물들을 도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미지의 공법들이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이런 종류의 생각들을 아침 나절의 백일몽으로 곧바로 간주해버리다 보면,이번엔 또다른 생각이,즉 저 퀸시 죤스의 앨범 속에 나오는 그들의 음악 조차,지금 10년 이상의 시간이 흘러서 내 귓속으로 들어오게 되면,바로 그 때 그 당시의 음악은 결코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떠오르게 한다.
저 샤카 칸의 음성이 어찌 저 때의 그 음색일 수가 있겠는가? 이미 사라져버린 그 때의 감성,베이비 페이스가 느끼고 또 홀리고 있는 저 시간의 감각이,지금 내 귓속에 메아리치고 있는 음률들과 어찌 동일할 수 있겠느냐는 비관이,순식간에 마음속을 점령한다.
그리고 그때쯤이면 바삐 돌아가는 하루의 일과를 준비해야 할 시간에 이르르게 마련이고,나는 평소의 나로 복귀해서 (또는 복원되어) 정신없는 하루를 시작하게 된다.아무 것도 사라지지 않고 그 어떤 것도 실종되지 않을 듯한 빽빽하고 현실적인 세계가 여유있게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스틸 라이프>의 마술적인 공간인 삼협지방에서 지아쟝커가 마주쳤던 세계는 그리 현실적인 성향의 것이 아니었다.2000년을 흐르던 물줄기들은 강제로 그 흐름을 차단당하고 있고,그 물 한가운데에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가 세워지는 동시에,170개 이상의 마을들이 물속으로 가라앉아가고 있고,수천년 동안 중국 시인들의 시상을 자극하던 절벽과 바위들 역시 서서히 인간의 눈으로부터 자취를 감추는 중이다.
11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강제로 이주당해 그들의 터전으로부터 사라지고 있고,그 정신없는 혼란과 강력한 속도의 와중에 사람들은 오히려 이 상황이 일상이라는,이 커다란 수레바퀴가 정상이라는 생각 아래,모든 욕망과 슬픔들을 드러내보이며 압도당하고 있다.
지아쟝커는 그 모습들을 바라보며,없어지고 사라져가는 자기 눈 앞의 모든 것들에 아낌없는 안타까움을 드러낸다.그의 카메라는 종종 그의 인물들을 넘어서 곧 없어지게 될 절벽과 산과 나무들을 비추고 있고,주인공 한산밍과 셴홍은 가끔씩 넋이 나간 눈빛으로 모든 것을 삼키게 될 강물들을 바라본다.
그러나,저 절벽들은 정말 완전하게 사라져버리는 것일까? 내가 아침에 듣는 퀸시 죤스의 음악이 CD에 digitally remastered 되어서 여전히 존재하는 것처럼,혹시 유릭와이가 촬영한 지아쟝커의 HD필름 속에서,저 절벽들은 여전히 자신의 구조를 버티어가고 그 존재를 유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그 존재를 유지시키기 위해서,마치 인간들이 자신의 존재의 씨앗이라도 남기기 위해서 아이를 낳고, 죽은 후 무덤과 비석을 만들게 하는 것처럼 ,지아쟝커는 삼협지방의 마지막 모습을 담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 끈질긴 기억과 재생을 위해?
그러나 이런 시각이 전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다.만일 지아쟝커의 의도가 온전하게 이런 종류의 것이었다면 그 역시 틀렸다.삼협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우리 눈에서 보이지 않게 되는 것 뿐이다.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삼협은 160미터까지 차오른 장강의 수면 아래에서 여전히 숨쉬고 있을 것이다.비록 이끼가 끼고 온갖 수생생물의 놀이터가 되겠지만 말이다.
더더구나 신의 눈으로 그곳을 쳐다본다면 별로 변한 것 조차 없을 것이다.우리의 감각이 달라진 것 뿐이다.그렇다면 우리는 바로 우리의 그 감각을 위해서 헌화하고 조사를 읊고 있다는 것인가?
삼협을 떠나서,우리가 살고 있는 별의 운명 역시 마찬가지다.빅뱅으로 태어났든 신의 숨결로 생겨났든우리 별의 운명은 유한하다.별은 왜소해지고 찌그러지고 수축되어서 없어져버릴 것이다.사라질 것이다.운석들이 쏟아져 멸망하든,과거 공룡들의 운명처럼 얼어죽든,우리가 가지고 있는 유한성 그 자체만 빼고는 모든 것이 사라진다.
사라짐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기 때문에,유한과 무한이라는 두 가지의 성질이 내포한 운명적인 비극성 때문에,우리는 슬퍼하고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일들은 훨씬 단순하고 실은 우연이며 평범하기 이를 데 없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인간이다.신이 아니다.고통과 갈등을 직접적으로 대면하고 있는 인간이 (특히 어떤 특정한 상황 속에 처해 있는 사람이라면) 자기 별의 운명까지 생각할 수는 없다.그 누구도 세상 꼭대기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는 없다.그것은 오히려 비인간적인 일이다.지아쟝커의 카메라는 강과 산과 도시들만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그의 카메라는 인간의 눈높이로 내려와,사라진 사람들을 찾아헤매는 인물들의 모습을 담담하게 뒤쫓고 있다.
그의 주인공 셴홍과 한산밍은 그들의 인생에서 갑자기 사라져버린 그들의 가족을 찾고 있다.그들의 여정은 서로 닮아보이고 결국은 두 사람 다 싼샤를 떠나는 것으로 끝이 나지만,그들이 스스로 내리는 결론은 완전히 상반된 것이다.
물론 그들의 이야기 자체는 어쩌면 약간 상투적인 것이기도 하다.셴홍의 남편은 출세에 대한 욕구와 불륜 때문에 아내를 저버린다.아예 연락을 끊는다.대륙 곳곳에서 진행되는 개발 작업 때문에 떨어져 사는 부부가 무척이나 많아졌다는 중국에서,이런 일은 흔히 발생하는 일이라고 한다.한산밍은 돈을 주고 아내를 샀다.이 역시 중국 내륙에서 지금도 일어나는 일이다.
그들이 싼샤까지 오는 이유는 사라진 가족을 찾기 위해서이다.그리고 예전의 관계를 복원시키기 위해서이다.그러나 두 사람의 행동양식은 약간 다르다.끊임없이 물을 마시고 잠 조차 잘 자지 못하는 셴홍은,남편이 사라진 이유 조차 모르고 있다.그녀는 '이유'를 모르기 때문에 갈증이 나고,결국 알게 된 그 '이유'가 용서할 수 없는 것인데다가 너무 결정적인 성질의 것이기 때문에 관계의 복원을 포기한다.그리고 그녀는 그녀가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지 않으며 새로운 장소 샹하이로 떠난다.중국 개발의 최정점에 서 있는 싼샤에서 남편을 잃은 후,그녀는 자본주의의 한복판으로 진입하는 것이다.근본적인 소용돌이의 한복판으로 돌진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산밍은 정반대의 선택을 한다.산밍은 사라진 관계의 복원을 위해서,더 힘든 노동 더 위험한 상황 속으로 나아가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그와 아내가 서 있는 건물 밑바닥에 구멍이 뚫려 있고,그의 인생 자체가 위태로운 외줄타기인 것처럼 묘사되지만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즉 한산밍은 그의 무너진 관계를 복원시키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한산밍과 셴홍의 차이는 무엇일까? 셴홍의 남편은 분명히 그녀를 떠났지만 산밍의 아내는 그저 오빠 빚에 묶여 있을 뿐이라는 현실적 차이? 셴홍과 한산밍의 계급적 차이? 아니면 그들 두 사람의 개인성의 문제?
하긴 한산밍과 셴홍이 사람들을 찾아다니는 그 세부적인 과정 속에서도 두 사람의 차이는 발견된다.
셴홍은 끊임없이 묻는다.남편의 소재를 질문하며 의혹에 차 있다.당연한 일이다.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이 오히려 더 이상하다.그녀는 남편 구오빈을 어떻게든 찾아내려 하는 남편의 친구 왕동밍에게 조차 '당신네 남자들은 왜 그렇게 서로를 감싸주려 하느냐'며 볼멘 소리를 하고,그녀에게 도움을 청하는 그 지방 소녀의 요청을 말없이 묵살한다.그녀는 거의 언제나 혼자 걷고 혼자 물을 마신다.싼샤에서, 그녀는 거의 고립되어 있는 것이다.게다가 싼샤를 지배하는 '거대한 실종의 현장'이 그녀를 압도하고 있다.고립되고 압박당한 셴홍은 복원에의 의지를 잃는다.그리고 또다시 생수병의 물을 마시며 싼샤를 떠난다.
그러나 한산밍은 다르다.한산밍은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손길을 내민다.담배를 나눠 주고 술을 권한다.우연히 만난 소년 마이크에게 애정을 갖고 그의 어쩔 수 없는 죽음을 애도한다.돌더미 밑에 깔린 소년의 시신을 찾아내는 것도 한산밍이며,찾아내는 도구는 하필 휴대폰이다.한산밍이 마이크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죽은 소년의 옷 속에 있던 휴대전화기가 울렸던 것이다.도무지 불통이기만 한 셴홍의 전화기와는 아주 다른 것이다.
셴홍이 남편을 만났을 때 마지막으로 했던 것은 약 3초 간의 춤동작이지만,산밍이 그의 아내를 만났을 때 하는 것은 흰 토끼 모양의 사탕을 주는 것이며,그들은 그 사탕을 같이 깨물어 먹기 시작한다.셴홍은 홀로 배를 타고 그녀에겐 낯선 대도시 샹하이로 떠나가지만 한산밍은 혼자 떠나지 않는다.그는 동료 노동자들과 함께 그가 왔던 고향 광산으로 되돌아간다.
한산밍이 가지고 있는 것은 복원에의 의지다.그리고 그는 사람들과의 통로를 열어 놓고 있다.수모를 감당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그는 자신의 것을 먼저 타인에게 '주며',자신의 몸을 움직여 일한다.셴 홍 역시 몇몇 사람들과 대화한다.그녀가 유일하게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장면은,자신의 직업인 간호사의 특성에 걸맞게 머리를 다친 청년의 붕대를 감아줄 때이다.그러나 그 청년은 전혀 의도적이지 않은 상황에서,셴홍 남편의 불륜을 말해 버린다.우연 마저 그녀의 복원 의도를 방해하는 것이다.여기서 그녀는 그녀 의지의 반을 잃어버린다.그러나 한산밍은 복원에의 의지 이외에도 복원하려는 자의 태도를 지니고 있다.이것이 셴홍과의 차이를 유발하는 것이다.
물론 두 사람의 상황은 몹시 다르다.개인성도 다르며 지나온 인생 역정도 다르다.그의 계획이 성공할 수 있을 지는 여전히 미지수이며,수많은 난관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갚아야 할 돈의 액수도 만만치 않다.그러나 그는 어쨌든 시도한다.
물론 어떤 개인의 태도와 의도만 있다고 해서,완전히 사라져버린 시간과 깨어진 관계가 복원되는 것은 아니다.어떻게 보면 하나마나한 소리다.그래서 우리는 또 하나의 상황을 참조해야 한다.즉 또 하나의 스포일러가 필요하다..
<스틸 라이프> PART5 - <파리,텍사스> (0) | 2009.02.17 |
---|---|
<스틸 라이프> PART 4. <파리,텍사스> (0) | 2009.02.10 |
스틸 라이프<지아쟝커 2006> PART2 (0) | 2009.02.03 |
스틸 라이프 (지아쟝커 2006) PART 1 (0) | 2009.02.03 |
어떤 풍경에 관한 편지 <사과> PART1 (0) | 2009.01.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