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애는 자신의 아들 준을 죽인 범인을 스스로 용서하길 원했다.
이것이 그렇게 이례적인 일일까? 아니다.우리는 신문에서든 텔레비젼에서든 이런 종류의 기사들을 많이 대한다.그러나 이창동이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끌고 갈 리가 없다.그는 자신의 영화를 '인간극장'으로 만드는 스타일의 영화감독이 아니다.(심형래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더구나 우울증의 경험이 있는 신애가 계획하고 시도하려는 이런 종류의 일들은 어쩔 수 없는 무리수일 것이다.인생의 극단 속에서 진리를 추구하는 이창동이,불행한 신애에게 행복하고 합리적인 결론을 준비할 리가 없다.그는 좀 더 잔인한 전개를 원할 것이다...
역시나,교도소에서 만난 범인의 얼굴도신애의 얼굴처럼 평화와 열락으로 넘쳐흐르고 있었다.그 역시 그의 신에게 용서를 받았기 때문이었다.신을 '교회'로 착각하고 있는 신애가,그 범인이 그녀의 신과 동일한 유일신에 의해 용서를 받았다는 사실에,직접적인 피해자인 그녀를 배제한 이 용서의 과정에, 극렬한 발작을 일으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이것은,전두환이 기독교로 개종한 후 '화려한 휴가'의 유족들에게 환한 얼굴을 보이는 것과 유사하고,이번에 샘물교회 신도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한 탈레반 전사가 기독교로 개종한 후 이라크로 선교활동을 떠나는 것과 똑같은 상황이다...
'용서'란 도대체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이 '용서'라는 주제를 또 하나의 글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겠지만,그를 떠나서 이 파국 후에 벌어지는 신애의 각종 파행들을 보며,사실상 신애에게 필요했던 것은 목사와 성경공부,그리고 구역예배가 아니라 정신과 의사와의 상담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을 가졌었다.신애에게 있어서 용서란,아직은 이뤄낼 수 없는 사치처럼 여겨졌다.신을 사랑한다는 뜻에서의 신애인지,믿음을 사랑한다는 뜻에서의 신애인지는 알 수 없으나,용서란 사랑을 넘어서는 어떤 지평에 자리잡고 있는 또다른 개념으로 보였다.결국 적어도 신애에게 있어서,그녀 영혼의 구원실패는 우울증 치유의 실패와 동의어가 아니었을까 하는 매우 평범한 사유로 연결되는 상황에 다다르며,나는 점점 영화에 대한 집중력을 잃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애꿎은 교회 신도들에게 억하심정을 가지기 시작했다.인간 개인의 내면을 격렬하게 건드림으로써만이,반복되는 학습과 집회를 통해서 만이,신도 개인의 신앙 항상성을 유지할 수 있는 ,개인적 자율성이나 생각의 자유,종교적 명상이나 사회적 정의 따위에는 눈을 감아버리는 교회,일정부분 개인의 영혼에는 심하게 무능한 교회,사회의 청정한 소금이 되기는 커녕 오히려 사회의 가장 병적인 측면을 꼭 닮아가면서 온갖 부정적인 기사들로 매스컴이나 타고,시청 앞 성조기 집회에까지 신자들의 눈물을 동원하는 교회,그리고 이미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기형아가 되어버린 몇몇 대형교회들이 생각났다.
그리고 갖가지 인터넷에 떠도는 이미지들과,백 년 씩이나 기독교를 믿어온 우리 집안의 수많은 신자들의 가식과 위선들이 수도 없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신과 개인간의 내밀함 보다는,거대한 외형과 타인에 대한 신앙강요와 물량적 성장에만 신경을 쓰는,그래서 조직과 집단적 학습이 아니면 점점 그 위상이 위태로워질 우리 교회들,그래서 쓸 데 없이 세속적인 일에만 신경을 쓰며 ,약자들에 대한 배려나 봉사와는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며 인터넷 위에서만 찌질대는 일부 성직자들의 모습들이 정말 주마등처럼 스쳐갔다.물론 나도 안다.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안 다니는 사람들보다는 그래도 훨씬 좋은 사람들이라는 것을,그래도 나은 사람들이라는 것을.그리고 그들이 '교인'이라는 이유로 부당하게 폄하당한다는 사실을..
그러나 천사들도 실수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모른다.그 천사들이 속해 있는 조직의 방향이 어딘가 뒤틀려 있다면,그들의 모든 선행 역시 어그러진 각도에서 진행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들은 모른다.더구나 그들은 그들의 하나님을 '너무' 믿는다.도대체 왜 신이 전지전능해야 하는 것인가? 왜 하나님이 '수퍼맨'이나 '마이티 마우스'같은 존재로 상정되어야 하는가? 아주 간단하게 생각해보아도 세상의 불합리함과 비참함은 신의 전지전능함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강력한 하나님에게 몸과 정신을 의탁해버린다고 하면 아주 심플하게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 같지만 그것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이지,전시나 비상상황에서의 논리는 아닌 것이다.
차라리 신 역시 완전무결하지 않은 존재로,완전히 전지전능하지는 않은 상태의 존재로 그려진다면 적어도 신애처럼 도저히 감당해낼 수 없는 고통을 받는 사람들에겐 오히려 위안이 되지 않았을까? 일상적이고 중산층적인 사람들에겐 '완전무결한' 하나님이 일종의 보험이나 존재의 백그라운드로 작용하여 자신의 위상을 지켜주는 험한 바다 속 닻 처럼 작용하겠지만 말이다..
신애는 아이의 납치살해범을 용서함으로써 그녀가 생각하는 신의 속성을 닮아보려 했다.그것은 신애가 가졌던 유일한 종교적 태도였다.자신이 흠뻑 세례받았던 위로와 용서의 의식을 자신의 원수에게 거행함으로써 슬며시 자신을 자신의 신과 일치시키고 싶어하기도 했다.적어도 위로와 용서의 메카니즘에서 말이다.그러나 인간과 인간 사이의 용서는 신과 인간 사이의 관계처럼 수직적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어떤 의미에서 신애가 추구했던 이런 용서는 비인간적인 것이다.인간적인 정리와는 반대방향으로 나아가려는 것이니 말이다.(그러나 신애는 영화 내내 이런 태도를 쭉 견지해왔다.)_
아프가니스탄에 억류되어 있는 불행한 사람들을 비웃거나 비난한다는 것이야말로 가장 악마같은 짓이지만,그들을 사지에 몰아넣은 한국기독교의 구원과 용서의 메커니즘을 비난하는 것은 정말로 정당한 일이다.어떤 기독교인들에게 용서와 구원은,<밀양>의 기독교인들이 신애에게 그랬던 것처럼 일회성의 세례에 불과한 것이다.도대체 아프가니스탄의 이교도 아이들이 한국어로 찬송가를 부르는 일과 '기독교적 구원'이 무슨 관련이 있는가? 그 아이들에게 있어서 '찬송가'는 '학교종이 땡땡땡'과 아무런 차이가 없을텐데 말이다.
담임목사직을 정식으로 사퇴 조차 하지 않는 샘물교회의 목사님과 여전히 공격적인 선교를 계획하고 있을 기독교계의 전사들은,;신애'가 아프간의 이교도들이 아닌 스물 한 명의 한국인 인질들과 두 명의 사라진 영혼들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그 불행한 사람들에게 조차 한국 기독교는 신애식의 억지 용서와 구원을 강요할 것인가? 그렇게 해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교회'가 아닌 '정신과 의사'라는 사실을 씁쓸하게 증명하고야 말 것인가?
오히려 신애에게 진정한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준 사람은 속물스런 카센터 사장인 종찬,송강호라고 여겨졌다.그는 신애에게 아무 것도 강요하지 않았다.위로를 세례하는 것도,금전적인 도움을 주는 것도 아니었다.그는 그저 비밀스런 햇볕처럼 신애 주위에서 조용한 빛을 비추고 있었다.
참 잘 제작된 영화 포스터다.영화의 주제가 잔잔하지만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다.이 포스터에서 영화의 주인공은 전도연이 아니라 송강호다.
신애가 슬픔의 눈물을 흘릴 때에,그는 행여 비라도 쏟아지지 않을까,우산을 손에 쥐고 그녀의 뒷모습만을 바라보고 있다.그들의 뒷쪽으로 강렬하지도 추레하지도 않은 태양광선이 비추어지고 있는 그 와중에 말이다.그런데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신의 모습인지도 모른다.(그러고보니 성경 어딘가에 그런 종류의 비유들- 신은 가장 평범한 모습을 하고 나타난다는- 이 존재하는 것 같기도 하다 )
키스씬이다.
남자로서의 욕망이 최대한도로 절제된 입맞춤이다.상처받아 날개치는 작은 새가 손바닥 안에라도 들어온 양,종찬의 몸짓은 세심하기 그지없다.한국의 기독교는 종찬의 이런 백치스런 사랑을 도대체 흉내라도 낼 수 있을까? 바로 그들의 성자 예수가 인류를 위해 보여주었던 거의 백치스런 종교적 열광처럼 말이다.오히려 그들은 타인의 영혼을 만지고 재단하고 개조하려 하고 있지 않은가.또 그것이 그의 개인적 고통의 위로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종찬은 신애를 이렇게 위로한다.그는 절대로 군림하지 않으며,그저 허리를 굽힌다.그리고 조심스럽게 절망을 마주한 신애에게 말을 건넨다.저 모습이,원래 종교가 가져야 할 진정한 책무이며 빛인 것이다.
종찬의 사랑은 그곳에서 멈추지 않는다.종찬의 신애에 대한 종교적 사랑은,신애에게 자기 자신의 존재를 비추어보게 하는 경지에까지 나아간다.신애는 그 어떠한 설교와 찬송 그리고 집회보다도 더,종찬의 저런 작고도 끊임없는 배려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구원의 길을 향해 느리지만 지속적인 발걸음을 걸어나갈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처해 있는 모습을 스스로 거울에 비추어보는 것으로 시작한다.가면과 우울증으로 뒤덮였던 자신의 과거외양을 걷어내고 ,이제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해 나가는 것,그것이 바로 구원이다.
따라서 종교적 구원은 거대한 현대식 설계의 교회건물과 으리으리한 강대상 위에 서 있는 목사님들의 불뿜는 듯한 설교,그리고 화려하게 채색된 교회 외벽 스테인드 글라스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구원은 저 허름한 마당의 싸구려 거울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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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는 상관없는 몇 마디 말을 덧붙이고자 한다.기독교인들께 드리는 말이다.시청 앞 성조기 집회의 기독교인들은 다시 시청 앞으로 모여야 한다.그리고 다시 그들의 성조기를 흔들며,스물 한 명의 목숨줄을 쥐고 있는 미국인들에게 애원하고 읍소해야 한다.아무래도 좀 잘 아는 사람들,미국하고 친한 사람들이 그러는 게 낫지 않겠나 말이다.구걸하는 것이 도저히 용납되기 어려운 넌센스라고 느껴진다면,하나님께라도 기도하기 바란다.제발 미스터 부시의 마음을 돌려 인간들을 구원해달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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