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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사람들이 왜 고통을 받습니까? <바벨>,<시리아나><크래쉬>

신의 영화들/이백 편의 영화

by 폴사이먼 2007. 4. 25.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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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대학교에 들어가서 처음으로 본 것은 대자보였고,그 다음에 본 것은 광주에서 학살당한 시민들의 사진이었다.지금의 어떤 대학 새내기들은 학교에 들어가자마자 팬티 바람으로 기합부터 당해서,어처구니 없이 우울한 (적어도 피상적으로는) 문화부터 체험한다지만,그 당시의 내가 그 사진들로부터 느꼈던 것은 일종의 비현실감,그리고 믿을 수 없음이었다.인간성 자체에
대한 불신 비슷한 감정 같은 것이었다.

지금은 시위하는 사람들에 대해,'귀챦다'거나 '도대체 왜 시끄럽게 구느냐'같은 반응이 주류를 이루는 모양이지만,당시에 그런 사진을 본 사람의 입장으로서는 돌을 집어들지 않을 수 없었고
떵떵거리며 살아가는 당시의 권력자들을 인간이라는  종에 속하는 일원으로 보아준다는 것이 매우 어렵게만 느껴졌었다.

지금은,전두환도 자기 손자들한테는 좋은 할아버지일 거라는 생각에 더욱 끔찍해지고 아연해지는 심정이 들지만,당시엔 죽어나갔고 얻어터지던 사람들을 떠올리고 있노라면 어떻게 저런 사람들이 신의 응징을 받지 않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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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 일어나던 수업거부 때문에 강의실이 텅 비어 있던 어느 날 아침,나는 아주 얇은 책 한 권을 우연히 발견했었다.책의 제목은 '착한 사람들이 왜 고통을 받습니까? (Why do the Righteous suffer?) '였고,저자의 이름은 해롤드 쿠쉬너였다.

아마 난 책의 제목에서,열 아홉 살의 나를 둘러쌌던 현실,왜 멀쩡한 사람들이 다치고 불구가 되고 죽어나가며,직설적으로 눈에 보이는 거대한 악들이 멀쩡히 버티고 섰는지,왜 현실은 그렇게 돌아가고야 마는지,그런 의문들을 떠올렸던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책은 그런 내용을 다루고 있지 않았다.유대교의 랍비인 저자는,사랑하는 아들이 선천적으로 늙는 조로증에 걸려서 죽어가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했던 불운한 아버지였다.평소에는 일반 신자들의 신앙상담과 고민 카운셀링을 해야 하는 종교인이지만,그는 자신의 아들에게 일어난 불행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왜 아무 잘못도 없는 어린 아이가,유전자 기능 일부의 치명적인 고장에 의해서 어떻게 손 써 볼 겨를도 없이 죽어가야만 하는지,그는 그 어디에서도 해답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는 끝없이 고뇌하면서 문장을 이어가고 있었고,그 문장들의 일부 이미지가 지금도 내겐 생생하다.그리고 사실상,그것은 삶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였고,지금껏 해답이 구해지지 않는 문제이기도 했다.

신의 섭리니,운명이니 하는 소리는 심하게 말해 개소리가 아닌가? 그것은 오히려 살아남은 자들에 대한 위로로나 기능할 뿐이지,죽어가는 아이에겐 아무 소용없는 소리가 아니겠는가?

고민을 토로하면 친절하게 대응해주는 주변의 '선한 종교인'들의 대답에 나는 연신 삐딱하게 고개를 주억거렸었다.내게 그들이 말하는 죽은 후의 파라다이스는 한 술 더 뜨는 가증스런 소리로 들렸다.좋다.무언가 거대한 보상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자.나중에 다 잘 된다고 치자.최대한도의 열락이 아이를 기다리고 있다고 하자.그러나 '지금 현재의 고통'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건 아무렇지도 않은 것인가? 이 고통의 무의미함을 무슨 수로 설명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 계절 내내 나는 아마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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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흐르고 ,비단 병원에서 뿐만 아니라,병원 밖의 세계에서도 숱한 고통과 불행 억울한 죽음,그리고 무의미해 보이기만 하는 비참함을 목도할 수 있었다.많은 병자들과 해결할 수 없는 질환들,원인도 알 수 없는,그리고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나는 불행들을 지켜보아야 했다.

그리고 전두환은 여전히 잘 살고 있었다.( 내 마음대로 생각하는 거지만 강풀이 26년을 그린 것은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어느 순간 나는,어떤 고통들은 도저히 이유를 알 수 없는,마치 광대한 암흑 같은 무의미함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했다.고통의 의미들을 찾아보려 애를 쓴다는 것 자체가,고통받는 자들에 대한 모욕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했다.그 유태인 랍비의 아들 애런의 유전자 기능 이상은,어쩌면 단순한 삐걱꺼림이었다.이런 비합리성을 받아들인다는 것 자체가,이런 기계적인 우연을 인정한다는 것 자체가,-일종의 공포스런 상황이겠지만- 그것과 어쩔 수 없이 투쟁해야 하는 인간의 상황이라는 것에 결론이 모아지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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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공대의 희생자들을 바라보자 화부터 났다.한국인이 범인이어서 쪽팔린다느니 중국인이 범인이었으면 더 나앗을 거라느니,이런 것 도에 지나치게 한심한 소리다.미국 사회의 '총기'
가 원인이라느니,미국이라는 문명 자체가 이런 사건들의 토양을 배태하고 있다느니,이런 분석은 물론 맞는 것이겠지만,서른 두 사람의 죽은 생명과는 어쩌면 별로 관계가 없을 '드라이한 논리'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어쨌든 그 목숨들은 사라졌으니까 말이다.한 정의 총에 의해서 말이다.

문득 한 개의 라이플에 의해 연쇄적인 비극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던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2006년 영화 <바벨>이 생각났다.



이 영화는 마치 살얼음판 위를 걷는 듯한 긴장감을 주던 영화였다.편집과 음악,심지어 프로덕션 디자인까지 그 긴장감을 완화시켜주기는 커녕,점점 신경을 팽팽하게 만들어주기만 하던 영화였다.

일본의 중년 남자 야쿠쇼 코지가,아내가 자살하는 데에 사용했던 총을 들고 모로코에 사냥여행을 와서 자신을 가이드했던 모로코인에게 그 총을 선물하고,

그 모로코인은 이웃집 사람에게 그 총을 팔고,총을 산 사람들은 아들들인 어린 소년들에게 양떼를 지키는데 쓰라고 그 총을 주고,

아이들이 그 총을 시험사격하는 와중에,아들을 잃고 모로코로 여행 온 브래트 피트부부의 아내인 케이트 블란쳇이 그 총탄에 맞고,

적당한 운송수단이나 의료기관 조차 없어서 총에 맞은 아내가 모로코 벽촌에 방치되다시피 하다가 사건은 911의 경우처럼 이슬람의 테러로 변질되어가고,(점점 일이 정치적으로 변질되어가기만 하고)

결국 출동한 경찰에 의해서 총을 쏜 아들들과 아버지가 추격당하게 되고,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벌어진 끝에 큰 아들인 소년이 경찰의 총격에 사망하게 된다는 이야기..

이것이 바로 <바벨>이 말하는 ,일본과 모로코에서 벌어지는 어이없이 비극적인 사건이다.한 자루의 총이 일으킨 '우연적이고,'의미없는' 사건인 것이다.마치 모든 사건들이 연결되어 있는 듯 보이면서도 서로 제각기 떨어져있는 듯 보이기도 하는,하나의 계기가 폭풍처럼 연쇄적으로 다른 불행을 야기시키는 가슴 아픈 일들의 연속이다.

나는 이 사건들을 영화로 바라보면서 무척이나 머리가 아팠었다.게다가 얘기는 여기에서 그치지도 않는다.

미국에 있는 브래드 피트의 집에서는 또다른 불행이 벌어지는데,피트의 두 아이들을 돌보던 멕시코인 가정부가 아들의 결혼식의 참가하기 위해 고향마을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에서 대신 아이들을 맡아줄 베이비 시터를 찾아낼 수가 없는 것이 그 시작이고,

어쩔 수 없이 아이들을 데리고 국경을 넘어가서 아무 문제 없이 흥겹게 지낸 후 약간 술에 취한 조카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돌아오다가 ,경찰의 검문에 짜증을 내던 조카가 갑자기 검문소에서 도주하는 통에 경찰의 추격을 받게 되는 것이 비극의 전환점이 되고,

두 아이와 가정부가 황량한 사막에 고립되어서 탈진으로 죽기 직전 결국은 구조되지만,그 사람좋게만 보이던 멕시코 아줌마가 본국으로 추방당하고 마는 것이 그 스토리의 결과가 된다.

피트 부부가 무사해서 미국에 일찍 돌아올 수 있었더라면,
아이를 돌봐 줄 사람을 쉽게 구할 수 있었더라면,
멕시코의 조카가 술을 좀 덜 마셨더라면,
국경 검문소의 미국 경찰관이 조금만 더 친절했더라면,..

수많은 가정들이 안타깝게 빗나가서 벌어지는 사건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우연성'들이 우리 삶 곳곳에서 입들을 벌리고 있는 것이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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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멕시코에서의 일들이 ,모로코에서의 사건이나 야쿠쇼 코지의 총과 직접적인 관련성이 있다고 할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그러나 사건들과 사건들,특히 불행과 불행들이 서로 느슨한 연결고리로 이어져 있고,결국엔 마지막 대폭발로 향해서 달려가고야 만다는 것은,요새 나오는심각한 영화들의 거의 트렌드라고 까지 할 수 있다.

스티븐 개건 감독의 <시리아나>가 그랬다.


<시리아나>는 석유이권을 둘러싼 각종 추악한 음모와 배신으로부터 비롯된 사건들이,이란과 스위스와 미국을 포함한 전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는 광경을 보여준다.하나의 원인이 여러가지 상황을 낳지만,그 핵심원인을 분명히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하나의 우연을 원인도 아닌 느슨한 계기(일본인의 총)로 그리는 <바벨>과는 좀다르긴 하지만 ,한편으론 많은 사건들을 한꺼번에 묶어낸다는 것에서 무언가 일맥상통하는 구석이 있다.

작년의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이었던가? 폴 해기스의 <크래쉬>는 앞의 두 영화와 어떤 면에선 비슷하고 어떤 면에선 또 다르다.



이 영화는 LA라는 한 도시에서 벌어지는 여덟 개의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사건과 사건간엔 ,직접적인 연결고리는 없지만 LA 전체를 관통하는,아니 미국 사회 전체를 흐르는 인종주의와 폭력성향 ,속물주의,계급간의 갈등,빈곤층의 소외,근본적인 소통의 어려움 등 모든 원인들을 압축적으로 제시하여 각 사건의 비극성을 영화의 종막에 폭발시켜 버린다.

이 세 영화는 모두 다 하나의 세계를,여러 개의 분절된 세계의 모습을 통해 그려내어 ,결국 세계에 대한 '설명'을 시도하려 한다.

<바벨>은 선물로 주어진 라이플이라는 비극적인 '우연'에 의해서,<시리아나>는 끝없는 탐욕을 지닌 석유이권에 의해서,<크래쉬>는 미국사회 전체에 흐르는 치명적인 약점들이라는 기조를 통해서,무언가를 '통합적으로 설명하려' 한다.

관객은 영화가 제시하는 설명을 듣고 고개를 끄덕거리게 된다.관객은 각성하고 세계에 대한 새로운 시각에 동참하게 된다.그리고 한편으론 위안받기까지 한다.현재의 양상이,세계의 결정적인 비참함이,무언가 합리적인 논리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는 사실에,우리의 눈길은 진실의 암흑을 살짝 비켜간다.

그러나 영화 속 개개인이 당하는 비극과 고통은 그 어떤 훌륭한 설명에 의해서도 '설명되어지지 않는다'.또는 '정당화되어지지 않는다'.케이트 블란쳇의 어깨에 박힌 총알은 그저 총알일 뿐이다.그 의미없는 금속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이 우연이 두 아이가 황량한 사막에서 실종당하고 성실하고 착한 멕시코인 가정부가 추방당하는 근거를 제공하지 않으며,그녀의 절망과 두 아이의 정신에 남게될 충격의 자국을 완화시켜 주지도 않는다.

<시리아나>의 파키스탄인 자폭테러범은 석유이권 따위는 잘 알지도 못한다.그들은 그들을 테러범으로 조종하려는 정치권력의 간교한 의도에 이용당하는 걸로 그려지지만 그들에게 죽음은
그냥 종교적인 순교다.'석유의 음모'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약간의 파열음과 몇 명의 희생양만 남긴 채,조금의 찰과상도 입지 않는다.

<크래쉬>의 사람들은 제각기 나뉘어진다.상처가 치유되는 사람도 있고 회생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사람도 있고 영원한 외로움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사람도 있고 우연히 사람을 살해하게 되는 선한 경찰관과 그의 '총'에 의해서 어이없이 죽게 되는 흑인 청소년까지 있지만,영화가 제시하는 비극의 이유와 사건을 경험하게 이들이 느끼는 이유 사이의 거리는 깊고도 멀다.그들은
'그냥' 인생을 살아왔을 뿐이고,살아남은 자들도 '우연'과 '운'에 의해 살아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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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렇게 지리하게 이야기를 계속하는 이유는,이 영화들이 자꾸만 무언가를 설명하고 제시하려 하기 때문이다.우연한 불행들에게,자꾸만 필연의 외피를 씌우려 하고 있는 것이다.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어떻게든 '설명 가능하다'는 것을,무언가 '논리적인 이유들에'의해서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힘주어 얘기하려 한다.

이 영화들이 영화제를 휩쓸었던 이유는,아마 그것에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정말,
세계는,
그렇게 설명가능한 것인가?

조로증으로 죽어가는 아이의 불행을 이런 방식을 통해 설명할 수 있는가?
어두운 공허를 응시하는 것에 대한 공포가 이런 식의 얘기들을 자꾸만 생산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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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사회의 총기문제와 버지니아 공대의 살인사건은 확실한 관계가 있지만,그것으로 그 32명의 죽음을 애도하긴 어렵다.'완전히' 이해하기도 어렵다.또 사람들이 곧잘 얘기하는 미국인의 '총'은 이런 비극에도 여전히 그 위세를 유지할 것이다.

미국인들이 자신의 '총의 문제'를 몰라서도 아니고,총기협회의 로비가 강력해서도 아니다.미국이 자신의 총을 앞으로도 계속 휴대하고 있을 수 밖에 없는 이유는,총이 그들의 진정한 역사이기 때문이다.총은 그들의 평화기반임과 동시에,그 국가의 존립근거인 것이다.꼭 미국만 그런 국가냐고 되묻는 것은 또다른 형태의 질문일 뿐이다.



<크래쉬>가 그것을 보여준다.<크래쉬>의 인물들은 숱한 비극 끝에 서로를 끌어안고 화해하려는 듯 보인다.그 화해의 모습은 충분히 감동적이고 어떤 면에서는 영적(spiritual)이기까지 하지만,그것이 폭력의 악순환을 멈출 만큼의 에너지를 생산하지는 못한다.

<시리아나>는 미국의 폭력성의 근원에,독점자본이,바로 '돈'이 놓여있다는 것을 웅변한다.심지어 국가의 정보기관까지 나서서 폭력과 살인을 방조한다.자국민이 희생되어도 그들의 태도는 변하지 않는다.

미국인이 미국에 대한 영화를 이렇게 찍었다고 감탄할 필요는 없다.바로 이런 나라가 우리의 어쩔 수 없는 혈맹이며,동맹이라는 것이 최대의 난센스이며,금식기도까지 하자는 외교관이 있다는 것이 또다른 난센스일 뿐이다.

뭐 어쩌는 수가 있다는 것이 아니다.미국의 본질이 이런 것이므로 그들만을 몰아내자는 얘기도 다분히 어리석다.다만 오버는 하지 말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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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설명되어지지 않는 '착한 사람들이 왜 불행한 일을 당하느냐'는 문제에 있어서 <바벨>과 <크래쉬>의 몇몇 에피소드들을 더 살펴보아야 하겠다.그런다고 답이 나올런지는 모르겠지만..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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