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힘들 때가 있다.아무에게도,심지어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조차 ,털어놓지 못하는 고민 때문에 마음 고생할 때가 있다.어떤 근본적인 문제로 인한 고민이라면 차라리 툭 터놓고 얘기하고 해결점을 찾는 것이 당연하겠지만,문제가 의외로 심각해서 차라리 혼자서 그 짐을 짊어지는 것이 낫거나,문제의 성질이 미묘하고 다분히 이질적이어서 털어놓을 만한 상대의 이해를 구하기가 어려워지는 경우라면,역시 혼자서 문제를 감당해내어야 한다.
그러나 하루 종일,자신의 문제들만을 직시하고 있기는 어렵다.너무 힘든 일이다.내면의 긴장을 이완시키고 두뇌의 숨가쁨에 산소를 공급해야만 한다.그럴 때 사람들은 각기 가지고 있는 성향과 취미에 따라 스스로 방법을 찾아낸다.어떤 사람들은 술을 마시고 어떤 사람은 나이트클럽엘 간다.어떤 사람은 오히려 자신의 울타리 안으로 파고 들고 어떤 사람은 낯선 지방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그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할 때,사람들은 병에 걸릴 수도 있다.무릇 병이란 의외로 단순하게 정의된다.외부의 부정적인 외력에 대항할 힘을 잃어버리고,신체와 정신에 이상을 일으키는 것이 바로 병이다.물론 그 이상의 정도가 어느 정도일 것이냐,하는 것이 더 논란의 중심에 설 수 있는 문제이겠지만,지금 이 글에서 그 문제들을 얘기할 상황은 아니다..
반면 신체와 정신의 모든 병적인 징조들이 모두 다 외부의 증상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어떤 것은 몸 깊숙히 잠복되어 있어서 쉽게 알아채기 어렵고 ,어떤 것은 현대의학의 첨단장비를 통해서도 그 정체가 밝혀지지 않거나 숨어버린다.
또한 사람의 신체는 자신이 앓고 있는 병의 원인과는 정반대의 증상으로 자신을 표현하기도 한다.속으로는 심각한 우울증을 앓고 있지만,겉으로는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보이며,오히려 비정상적으로 활력이 있고 떠들썩하게 살아가려는 것처럼 보이는 우울증 환자들도 있다.병의 정의와 정확히 연결되어지는 것은 아니지만,일종의 가면우울증 (masked depression), 의 증세들도 그 근본적인 메카니즘에 있어서는 이와 다를 바 없다.
정신의 호흡곤란,영혼의 숨막힘에 대한 결정적인 비상구가 확보되지 않으면,그 누구에게라도 덮칠 수 있는 병이 바로 우울증이다.
내게도 가끔 우울증이 내습한다.특히 글 서두에서 얘기했던 것처럼 ,누구에게도 말하기 힘든 문제를 혼자서 감당해야 할 때,우울함은 아주 오래된 친구처럼 내 마음의 중심을 향해 저벅저벅 조용한 발걸음을 옮겨온다.
그럴 때 나의 비상구는,술과 여행과 영화였다.아주 오랜동안 말이다.그러나 이제 술은 체력이 뒷받침되지 않아 그 효용이 떨어진지 오래이고,혼자만의 여행은 가족이 생긴 후 멀어지게 되어,영화 이외에는 이제 남은 것이 없게 되었다.그냥 조용한 극장으로 달려가서,조명이 다 꺼진 극장 객석에 앉아,눈 앞 가득 펼쳐지는 스크린 화면 속을 응시하고 있으면 적어도 팔십 분이 넘는 시간 만큼은 우울함을 잊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오히려 그 우울함이 또다른 형태의 지적 감흥을 위한 색다른 배양장치가 되는 수도 있었다.
어떤 경우엔,내 우울함 보다 더 우울한 영화가,내 슬픔 보다 더 슬픈 영화가 나를 달래주는 경우도 있었다.예를 들면,엄마를 잃어버렸으나 그 상실의 의미를 전혀 모르는 네 살 짜리 꼬마의 이야기 <뽀네뜨>는 그 절절한 절망 때문에 ,내 우울함 따위는 진정으로 하챦은 어떤 것으로 만들어버렸던 영화였다..슬픔이 우울함을 압도해버리는 경우였다.
물론 그렇다고 항상 슬픈 영화만을 골라보는 것은 아니다.아주 시끄러운 영화를 선택할 때도 많았다.깨고 부수고 달리고 퉁탕거리는 영화들은,사람을 한바탕 정신없게 만들었다가 갑자기 제자리로 돌려놓는 놀이공원의 롤러코스터였다.그 지나친 진동들이 내면의 우울을 정신없이 뒤흔들어 놓아 얼을 빼놓기 일쑤였다.우울함은 그래서 마취의 과정을 겪는다.그리고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었다.
그런 영화들을 보는 시기가 지나가자,나는 아주 맑은 영화들을 챙겨보기 시작했는데,최근 보았던 이누도 잇신의 <황색눈물>같은 영화가 바로 그런 케이스였다.
일본 영화 특유의 극단적인 순수함은 만만치않은 강도로 사람의 영혼을 씻겨낸다.그럴 때면 언제나 난 바보스럽게 일본 영화의 다양한 스펙트럼에 주눅이 들기까지 한다.매니아를 양산하는 구조인 것이다.
반면,'우울할 때의 영화보기'엔 절대적인 조건들이 존재한다.그것은,내가 영화관 바깥의 세계와 완전히 단절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두 시간 동안의 완전한 실종이 전제되어야,내 우울함의 치료 역시 쉬워지고
단순해지는 것이다.사실 이것처럼 어려운 일은 없지만 말이다.또 극장 역시 아주 한적하고 관객도 드문 곳이 좋다.커플들이 판을 치고 이곳저곳에서 휴대폰의 불빛들이 깜빡이고 상영관의 문만 나서면 사람들이 와글거리는 멀티플렉스는 오히려 편두통을 가중시키는 경우가 더 많다.그래서 우울한 날의 극장선택은 상상 이상의 중요성을 갖는다.
지난 달 바로 이런 상황에서 내가 선택했던 극장은 낙원상가의 필름포럼이었다.조용하고 한적하고 극장 바깥에선 삶의 냄새가 슬며시 풍겨나오는 거리,난 이 동네에 드나든 지가 20년이 넘었다.물론 사람마다 이 거리에 대한 의견이 다르겠지만 말이다.
선택한 영화는 이창동의 <밀양>이었는데,특별한 이유는 없었다.아내와의 약속이 잡혀있었던 터라,그 약속시간에 맞는 영화를 골라야 했으므로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뿐이었다.단,휴대폰을 끌 수가 없었다.급한 연락을 받아야 했으므로 '무음'모드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관객은 불과 다섯 명이었다.전도연이 상을 탄 이후 였음에도 이 정도라니,약간 의아한 생각이 들었고,모도 다 혼자서 들어와 남반구에서만 보이는 남십자성처럼 드문드문 앉아있는 관객들 역시,모두 다 나처럼
'우울'모드에 쌓여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같쟎은 생각까지,객쩍은 상상이 이어졌다.
- -
영화가 시작하고 송강호와 전도연의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아내가 전도연에 대해 했던 말이 문득 생각났다.'사생활이야 어찌 됐든 결코 싫증나지 않는 배우'라는 말이었다.
그들은 차에 탄 채 얘기를 주고 받고 있다.괴물 같은 배우 송강호의 사투리가 전혀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는다.그들은 그들이 서 있는 도시 '밀양'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밀양,충만한 햇볕,비밀스런 햇볕.sunshin
e이란 단어처럼 따뜻한 기운을 발산하는 단어가 있을까..
그러나 영화 속 현실의 밀양은 조금은 추레해보이고 약간은 일상적으로 보이는 평범한 중소도시일 뿐이다.송강호의 말투에서는 자연스런 속물스러움이 배어나오고,차에 올라탄 전도연의 얼굴에서는 낯선도시로 진입해 들어가는 긴장감과 함께 미묘한 슬픔이 교차하고 있는데,나중에 그녀가 미망인임이 밝혀지고,이 곳 밀양이 그녀 남편의 고향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차 속 신애 (전도연의 극 중 이름) 의 긴장감의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그녀의 밀양 정착 초기 역시 잔잔한 긴장의 연속이다.
그때쯤,무음으로 돌려놓은 휴대폰이 반짝거렸던 것 같다.안 받을 수 없는 중요한 전화였다.반사적으로 눈을 들어 저 멀리 앞쪽에 앉은 네 사람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고,나의 퇴장과는 상관없이 영화는 계속 진행되어갔다.그후로도 계속 걸려오는 전화 때문에,나는 몇번이나 바깥을 들락거려야 했는데,이 저절로 짜증이 나게 만드는 들락거림이,내게 이상한 효과를 가져다 주었다.몇 번의 일탈이,이 영화 밀양을 낯설게 만들어버렸던 것이다.나는 신애의 불행과 송강호의 신애에 대한 지속적인 배려에 '감정이입'하기가 몹시 어려워졌고,그들을 조금은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텔레비젼 영화도 아닌 극장 영화로는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다.
그런 내게 신애는 ,전형적인 우울증 환자로 비추어졌다.우선,남편의 외도에 이은 교통사고사를 그녀는 현실 그대로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그 치명적 사실을 그녀는,마치 없었던 일인 것처럼 왜곡하고 있었다.그녀에겐 '외도'는 사라지고 '교통사고'만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찾아온 동생이 그 사실을 지적해도,신애는 다른 종류의 말들로 어물쩍 돌려버리거나 그런 말을 할 거면 찾아오지도 말라는 식으로 동생을 윽박질렀다.신애의 가족들이 신애를 외면하는 데에는 약간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그녀는 그렇게 죽은 남편을 원망하기는 커녕,남편의 고향으로 정착하려는 극단적인 반대수를 두고 있었는데,그것은 자신의 우울의 원인에 대한 반대방면으로부터의 저항에 다름 아니었다.그녀 머릿속의 어떤 회로가 오작동하고 있는 것이었다..
또 신애는 머릿속의 이 결정적인 괴리를,엉뚱한 방향의 돌파구로 메꿔보려 했는데,그것은 밀양 사람들,그리고 밀양이라는 도시와 연관된 것이었다.겉으로는 낯선 도시에 적극적으로 편입되어 보려는 움직임으로 보일 수도 있었지만,전도연의 미묘한 감성이 그 움직임의 부자연스러움을 절묘하게 표현해내고 있었다.
건너편 옷가게의 촌스러운 인테리어를 지적할 때나,마치 가진 돈이 넉넉한 것처럼 땅을 구입하기 위해 부동산 중개인을 만나고 있을 때나, 학부모 모임에서 회식하고 이차 노래방을 갈 때나,신애의 행동은 무언가 과잉되어 있고 어딘가 아귀에 맞지 않는 부자연스러운 표정과 몸짓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전도연의 노련한 표현력에 감탄하며,나는 신애가 우울증을 앓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정의나 증상과는 완전히 들어맞지 않지만,그녀가 일종의 masked depression의 증세를 보이는 것이 아닌가,하고 추측했다.그녀에게서 내면의 우울함의 원인들과는 어쩌면 정반대의 외양들 - 즐거워보이기,이웃에게 간섭하기,돈 있어 보이기,사람들하고 밤늦게까지 어울리기 등등- 이 보여지고 있었다.
그래도 그녀가 가장 자연스러워 보이는 때는,아들과 함께 있을 때였는데
그 시간 조차도 그녀는 그녀의 우울함을 완전히 피해가지는 못했다.그녀는 아들 준이 조금만 눈에 보이지 않아도 안절부절 못하며 금방 눈물을 보였고 간간이 아들을 향하는 꾸지람 속에서도 가벼운 히스테리가 묻어나오고 있었다.아들 준이 그녀의 거의 유일한 현실이자 비상구,그리고 숨통이라는 사실은 너무나 분명해 보였다.
거기에 비해 송강호의 속물스러움은 너무나 일관성이 있고 자연스러워 보였다.다방레지의 속옷을 보려고 성희롱할 때나,
신애를 쫓아 따라나간 교회의 일일주차요원을 할 때나,
그의 미소는 장소의 다름으로 인한 농도변화만 있었지,본질적으로는 똑같은 사람의 표정이었다.그렇다고 그에게 현실적인 어두움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그에게도 힘겨운 면이 있어서,그는 어두운 숙소에서 혼자 노래방 기기의 반주에 맞춰서 노래를 부르고 어머니의 지속적인 잔소리에 짜증섞인 반응을 보이는 보통 사람이기도 했다.더구나 그가 사랑하는 신애는 그를 의도적으로 경원하고 대놓고 떼어놓으려 하는 터였다.그러나 여전히 그는 '한결같았다'.그는 자신의 분노를 남들에게 투사하지 않았으며,무엇보다 절망에 빠진 신애에게 '위안을 강요하지도 ' 않았다.이것은 신애와 결정적으로 반대되는 측면일 뿐만 아니라,신애에게 종교적 위로세례를 흠뻑 베푸는 신애 주변의 기독교인들과도 대조되는 점이었다.
어떻게 보면 짜증나는 스토거로 보일 수도 있었을 그가,내게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종찬은 흡사 신애의 비밀스런 보호자처럼,그리고 햇볕과 하늘 어디에나 숨쉬고 있다는 기독교인들의 '하나님'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또 한 번 걸려온 전화를 받고 들어오자,영화엔 반전이 일어나 있었다.신애의 아들 준의 납치와 그에 이은 영화의 요동이 일어나고 있었다.신애의 우울증은 격렬한 불안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유럽 영화 같으면 신애의 우울과 불안에 대한 끈질긴 탐구로 나아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어이없었던 것은,웬수 같은 또다른 전화로 인해,도대체 누가 신애의 아이를 납치하고 살해했는지를 모르게 되었던 일이었다.내가 보게 되었던 것은 신애가 아들의 상실을 종교적인 구원으로 대치하고 있는 광경이었다.그리고 그녀는 거의 죽음과도 같은 절망에서 빠르게 회복하고 있었다.그러나 그녀의 회복은 지나치게 빠른 회복이었다.지옥의 한가운데에서 오열하던 그녀는
너무나 빨리 천상의 평화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나로서는 이 바뀐 상황에 어리둥절할 수 밖에 없었다.바깥에서 전화를 받았던 그 수 분의 시간이 영화 속 시간으로는 수 개월 아니 몇 년 쯤 되어보였다.신애는 두 팔을 벌리고 울부짖었으며 가슴 속의 우울함을 모두 다 밖으로 내뱉고 있었다.그녀의 분위기는 또다시 변했으며,무언가 하늘 위에서 떠도는 것 같은,그래서 지상에서 유리되어버린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역시 내겐 그녀의 감정을 따라갈 만한 시간이 부족했던 것일까,나는 연신 갸우뚱거리다가,그녀의 그런 종교적 열광이,신애가 영화 초기에 보여주었던
가면우울증의 증상들과 어떤 면에서 일맥상통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종교는 그녀에게 우울증의 대체제로,그리고 응급피임약으로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그녀의 과잉무드는 종교적 각성 이후에도 여전했으며,그녀의 부자연스러운 흥분 무드는 변한 것이 없었다.
무엇보다,그녀의 종교적 변신은 혼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신애는 한 번도 그녀의 신과 일대일로 대화하지 않았다.그녀는 언제나 주변의 교인들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열정적인 찬송가와 통성기도에 포위되어 있었다.가엾은 그녀에 대한 위로와 동정은 이곳과 저곳에서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있었으며,교인들이 부어대는 은혜의 단비에 신애는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이건 좀 이상했다.그녀의 변화는 종교적인 감정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그녀의 근본적인 외로움과 상실감,내면 깊은 우울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적어도 혼자는 아니라는 느낌,'교인'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느끼는 집단적인 일체감,그리고 한국교회 특유의 군중적 들썩거림이 그녀의 변화에 직접적인 원인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런 위로가 전혀 불필요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허위의식도 때로는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니까 말이다.마치 어떤 환자가 자신의 증상과는 전혀 맞지 않는 약을 먹고도 증상이 좋아지는 경우(위약효과)처럼 말이다.교회는 신애의 극단적인 우울에 작용했던 행복한 마취제였던 것이다.'기독교'가 아닌 '교회'말이다.'기독교'혹은 '예수'와 '교회'또는 '교회 건물'은 아주 다르다.마치 맑시즘과 훗날의 소련연방이 달랐던 것처럼 말이다.
당연히 이창동은 과거에 그의 영화에서 그랬던 것처럼,또 하나의 반전과 파국을 준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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