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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pton is still GOD !!

신의 영화들/정체에 대해 떠들기

by 폴사이먼 2007. 1. 31.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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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그리트의 그림과 에릭 클랩튼의 공연을 쓰기로 마음 먹은 지가 벌써 일 주일쯤 흘렀다.바쁜 일 이것저것,바쁜 상황 이것 저것 때문에 포스팅이 늦어졌다.그냥 넘겨버릴까,하다가 또 그럴 수 없다는 느낌,이번 아니면 언제 이런 글을 쓰겠느냐는 느낌,약간의 갈팡질팡..이러다가 결국 쓰기 시작한다.

다시 함 말하지만,난 전문가가 아니다.특히 그림은 거의 문외한이므로 내가 지금 마그리트에 대해 주절거리는 내용은 그다지 신뢰할 만한 멘트가 아니다.그러니 보시고 넘 심한 비평일랑 삼가해주시길 부탁드린다.나,의외로 마음 약하다.벌써부터 이렇게 엄살을 부리고 있지 않는가....

 그림 속의 새는 거친 먹구름으로 휘감긴 하늘을 배경으로 검은 밤바다 위에 떠 있다.그러나 이 새는 그가 날개를 펼친 이 한 순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새에겐 여러 차원의 시간이 담겨 있다.새의 몸통 속엔 그가 언젠가 지나왔을지 모를 그 어느 한 순간의 하늘이 그려져 있다.그 시간의 하늘은 청명하고 맑다.새가 현재를 나는 공간과는 정반대이다.먹을 것을 찾아헤매야 하는 절망적인 시간이 아닌 ,그 어느 다른 시간,빛나던 삶의 한 시간이 표현되어 있다.마그리트는 이 그림을 통해,새의 시간 전체를 아울러 전달하려 한다.

'귀환'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 그림 역시 마찬가지다.집으로 향하는 새는 해질녘의 들판 위를 날고 있다.둥지 안의 알들은 엄마 내지 아빠를 간절하게 기다린다.몸통 속의 하늘은,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새가 수행해야 했을 바쁜 노동의 시간과 귀환을 향한 간절한 소망의 시간을 다같이 상징한다.마그리트는 단 한 순간만을 포착하지 않는다.그는 자꾸만 의식을 확장하여 또다른 시간과 공간들을 전달하려 한다.

우리도 마찬가지여야 한다.사람에겐 갖가지 모습들이 있다.지금의 모습과 더불어 과거의 모습이 있고,현재의 모습들과 더불어 몇 시간 전의 모습들이 있다.따라서 우린 누군가를 함부로 재단할 수 없다.그의 세계 속엔 많은 공간과 시간들이 숨쉬고 있는 것이다.또한 누군가를 무작정 믿을 수도 없다.사람의 다면성 속엔 심각한 허무주의가 숨쉬고 있는 것이다.

'악플러'역시 마찬가지다.악플러는 컴퓨터 스크린 위에 떠 있는 단 한 개의 기사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 한다.'유니'나 '오지호'의 단 한 순간의 모습으로 그들의 모든 것을 재생해내려 한다.

이 그림의 제목은 '대화의 기술'이다.쓰러질 듯 서 있는 돌 건축물이 있다.이 건축물들은 금방이라도 무너져내릴 것 같지만 어찌 됐든 하나의 구조물로 서 있다.악플러와의 대화 양식도 이런 것일 수 있다.악플러와 우리는 이런 형태의 구조물을 창조한다.서로 다른 층위 속에서의 대화는 결코 안전하고 튼튼한 형태의 '대화기술'을 만들어낼 수 없다.

그러나 어찌 '악플러'에만 국한시켜서 적용할 수 있겠는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대화 모두가 그런 것일 수도 있다.우리는 서로를 근본적으로 모른다.우리는 모르는 상대방을 향하여 감정이 담긴 논리들과,예술적인 언사들을 쏘아올린다.그렇게 해서 만들어내는 우리만의 세계가 불안하고 언제 허물어져 내릴 지 모르는 불완전성을 애초부터 전제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그림 왼쪽 아래엔 자신들의 건축물을 바라보는 두 사람이 서 있다.그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대화의 기술'을 가지고 만들어낸 세계를 감상하고 있다.그들이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우린 모른다.바로 '우린 모른다'는 것이 진실이다..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엔 중절모를 쓴 신사와 파이프가 자주 등장한다.마그리트 자신이 이런 차림을 즐겼었다.



미국의 사진작가 듀안 마이클이 찍은 말년의 마그리트의 사진 역시,그런 차림이다.도대체 저 중절모는 무슨 의미일까? 어떤 정체성을 뜻하는 것일까? 중절모와 파이프가 없으면 어딘가가 불완전해지는,사람들 특유의 거짓 '정체성'에 대한 야유 겸 은유일까?

 제목이 '순례자'인 것으로 기억되는 이 그림은,자신의 정체성인 '중절모'로부터 분리된 한 인간을 그리고 있다.저 그림을 두 개의 그림,남자의 얼굴과,중절모와 검은 정장으로 분리해보라.어떤 결과가 나타나겠는가? 저 남자는 아무런 방어수단도 없는 상태에서 관객 앞에 발가벗겨질 것이다.아주 솔직하게 말이다.그러나 그렇게 될 수는 없다.두 영혼은 한 화폭 안에 담겨져 있다.때로는 아주 rare한 모습으로 때로는 우리를 방어하는 각종 방어무기 안에 휘감긴 모습으로 우리는 '함께'존재한다.두 존재 사이를 '순례한다'.

비단 자기 존재 뿐만은 아니다.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우린 근본적으로 외롭고 근원적인 가면을 착용한다.이 그림의 제목은 '자정의 결혼'이다.결혼하려는 남자는 어두운 숲 속을 바라보며 탈출을 꿈꾼다.반면 그의 신부는 남자의 두뇌 바로 밑에서 금빛 가발을 준비한다.그들은 전혀 반대쪽을 바라보고 있다.그러나 그들은 자정이면 결혼하게 되어 있다
중산층적인 삶의 의식이 그들의 일부,혹은 전부를 규정하게 되어 있다.고개를 왼쪽 혹은 오른쪽으로 돌리면, 거울 속의 진정한 자기자신을 바라보게 된다.거울이 그곳에 있다는 것을 그들이 알고 있는지는 모르지만,그들을 결코 고개를 돌리려 하지 않는다.공포스런 사실에 직면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그런데도 거울 속엔 푸른 창공의 일부가 펼쳐지고 있다..

마그리트의 그림은 두뇌 속만을 향했던 것이 아니다.그는 자기 그림을 통하여 자기가 살아왔던 세상의 부분들을 표현했다.

 이 그림은 일차대전에서 희생당한 병사들을 표현하고 있다.병사의 눈에선 피가 흐르고 있다.피는 완전히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은 채 안면에 고정되어 있다.병사의 머리 밑으론 영원한 시간을 상징하는 '구'가 놓인채,병사의 영원한 불행을 바라보고 있다.전쟁은 이렇게 영원한 악이다.푸른 하늘 아래 어떤 공간에서 어떤 병사가 영원한 죽음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갑자기 그림이 커졌다.이 그림 속의 두 남자는 나찌,파시스트,전쟁유발자들이다.그들은 연기가 올라가고 있는 공장 굴뚝들을 배경으로 거친 음모들을 꾸미고 있다.그들에게 피해를 입을 희생자들은 그림의 가장자리에서 공포에 질린 채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저들이 어찌 나찌,파시스트,전쟁유발자들로만 국한되겠는가..모든 폭력적 양상의 체화일 것이다..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은 훗날의 예술가들에게 무한한 영향과 이미지를 던져 주었다.미야자키 하야오를 위시한 일본의 애니메이션이 그에게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은 자명하다.

 르네의 이 그림에서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 탄생했으리란 추측이 가능하다고 서울 시립미술관의 직원이 설명해주었다...



르네의 이 그림에서 '매트릭스'의 스미스 요원들을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의 가장 유명한 그림들 중 하나,그리고 신세계 백화점에서 사용하는 '골콘드' 역시 매트릭스를 생각나게 한다.아니 정확히 말하자.매트릭스가 마그리트를 생각나게 한다.

 무슨 건설회사에서도 이 그림을 사용하는 것 같은데 맞는 지 모르겠다

이번 전시회에 오지 않은 그림들 중,내가 너무나 좋아했던 그림 몇 점을 덧붙여야겠다.

 '백지위임장'이라는  이 그림은 과거에 홈레스님이 마그리트의 허락을 받지 않고 사용하던 그림이다.맞나?

'피레네의 성'이라는 이 그림도 오지 않았다.내년부터는 브뤼셀에 가야만 이 그림을 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빛의 제국'이라는 이 작품 역시 마찬가지다..

아쉽지만 어쩌겠나,싶었다.이때쯤 시간이 상당히 흘렀었다.자칫하면 에릭 클랩튼의 공연시간에 지각하게 될 가능성이 있었다.서둘러 미술관을 빠져나와야 했다.발바닥이 아파왔는데,덕수궁의 돌담길이 발바닥 통증을 유발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19시 50분.

친구는 먼저 공연장엘 들어가라고 했다.지각할 것이 틀림없었지만,그는 여전히 여유로왔다.그는 언제부터인가 여유로워지기 시작했는데,그의 '의사로서의 여유로움'이 환자들에게 전달되어 그들을 편안하게 할 것이라고 나는 추측했다.나는 그를 배반하고 공연장엘 들어가기로 했다.

20시 15분.

공연장은 꽉 차 있었다.1945년생인 클랩튼의 여전한 티켓 파워를 절감했다.다양한 연령대의 관중들이 체조경기장을 메우고 있었다.공연이 시작하기 직전의 흥분된 술렁임이 내 주위 도처에 일렁이고 있었다.나는 망원경과 야광봉을 사가지고 오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 시작했다.5분이 지나자 그가 도착해서 내 옆에 앉았다.우리 주위엔 '참으로 점쟎아 보이는'관객들이 '참으로 점쟎게'앉아있었다.그러나 그들의 얼굴에 서리는 긴장감을 그들은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20시 30분 -- 22시 30분.

62세의 클랩튼이 등장한다.환호가 점쟎게 공연장을 덮는다.괴성도 흐느낌도 없다.관객들은 그를 '감상하러' 온 것이다.그는 등장하자마자 그의 70년대 블루스 넘버들을 연주하기 시작한다.서투른 한국어 '안녕하세요'나 '캄사합니다' 따위는 없다.그가 연주하는 것은 derek & the dominos 시절의 음악들이다.어렴풋한 기억들이 되살아나기 시작한다.지금은 신뢰할 수 있는 신경과 의사가 된 ㄱ과 들었던 20년 전의 음악들이다.,..우리 관객들에겐 좀 낯선 곡들이다.

그러나 클랩튼과 그의 밴드는 그런 것들엔 조금도 괘념치 않는다.그들은 관객들이 전혀 보이지도 않는 듯,35년 전의 세월로 우리를 데리고 간다..

- 하나도 늙지 않았군.오히려 더 잘 해.
내가 중얼거리자 친구도 동의를 표한다.진료실에 기타와 앰프를 놓아두고 있는 그는 클랩튼의 실제 연주를 보고 감동했는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기만 한다.그는 지금 '신'을 보고 있는 것이다.그런데 실제로 에릭 클랩튼은 신이었다.60년대 후반,그가 몸담고 있는 그룹,Bluesbreakers에서 해고당하고 (여기엔 복잡한 사연이 있었다) CREAM이라는 수퍼그룹을 결성하던 무렵,영국의 지하철 벽엔 'Clapton is God'이라는 낙서가 곳곳에서 발견되었었다.

불순한 개 한 마리가 실례를 하고 있긴 하지만 이런 낙서가 런던 도처에 쓰여져 있었다.1월 23일의 우리나라 공연장 앞에서도 예외없이 이 글귀가 쓰여져 있었다..

신은 별 말이 없었다.공연 내내 'thank you' 몇 번과 'good evening' 한 번 이외에는 몇 마디 말이 없었다.어떤 사람들은 클랩튼이 우리 관객들을 너무 무시하는 처사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겠다.가수들의 립서비스에 너무 익숙해있다면 말이다.그러나 음악으로 모든 것을 전달할 수 있다면 그렇게 쓸 데 없는 립서비스 따위는 그렇게 필요없을 것이다.음악만으로도 티켓을 팔 수 있고 음반을 팔 수 있는데 뭘 그렇게까지 하겠는가..

오히려 새 앨범을 낼 때 쯤이면,텔레비젼의 오락 프로그램 -버라이어티 운운하는 명칭은 좀 어이없지 않은가- 에 어김없이 출연해서 ,온갖 잡다한 신변잡기들을 얘기해야 하고,짝짓기 게임에 출연해야 하고,이상한 게임들을 죄다 치뤄내야 하고,MC들의 쓰잘데기 없는 농담에 일일이 대응해야 하고,간간이 계산된 스캔들을 터뜨려줘야 하고,그래서 포털싸이트의 검색 순위에 이름을 올려야만 하는 우리나라 가수들 쪽이 훨씬 불편하고 가엾어보이지 않는가? 돈에 대한 압박과 정신적인 스트레스 때문에 ,그리고 악플 때문에 자살까지 해야 하는 우리나라 가수들이 얼마나 불쌍한가..피구왕 통키 정도에 이르르면 글자 그대로의 안습이 아닌가!!

쓸모없는 공상이 끝나자,클랩튼은 쩍벌남의 자세로 앉아있었다.그는 아무래도 unplugged를 재현하려 하는 것 같았다.새로이 튜닝된 기타를 건네 받자 그는 곧바로 연주를 시작한다.사람들은 그의 우리나라 힛트곡인 ,를 기대하는 것 같았으나,그는 가볍게 우리의 기대를 저버린다.끝끝내 그는 블루스를 고집한다.그는 하루종일 블루스를 연주하려고 작정한 것 같이 보인다.

나는 혼잣말로 말한다.

Clapton Is Still God,And He Still Got The Blues 라고...

에릭 클랩튼과 그의 동료들은 또다시 블루스를 연주하기 시작한다.어느 순간 Wonderful tonight이 관객들의 열기에 불을 붙인다.나는 과거 이 노래가 우리가 '무도장'을 다니던 시절의 블루스 (무도장에서의 부루스 말이다) 음악이었던 사실을 기억한다.그 부루스는 그 시절 우리가 누렸던 가장 찐한 형태의 스킨쉽이었다. 를 시작할 무렵,관중들은 언플러그드의 레일라 따윈 다 잊어버린다.어떤 관객들은 우리나라 관객들이 지나치게 소극적이라고 말한다.나는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그 어떤 코드가 일치하면 굉장히 발끈하면서 열광하는 관객들이 우리나라 관객들이다.발끈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Why does love got to be so sad 가 연주될 때는 아주 소중한 형태의 교감이 관객과 밴드 사이에 연출되었다.에릭과 그의 기타리스트 데릭이 기타를 마주 대하며 마치 얘기를 나누듯 연주하고,곧이어 그 속삭임 이후 데릭이 슬라이드 기타가 불을 뿜기 시작하자,조용히 그들의 대화를 경청하던 관객들이 그들의 주파수 사이로 끼어들어가 훌륭하게 동조하고 환호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예상치 않았던 관객의 반응에 밴드멤버들은 한층 감동적인 주고받음으로 응수하고,그러면서 곡은 진정한 완성을 경험하고 마는 것이었다.개인적으로는 이 공연 중 최고의 하모니였다..

연주가 일단 끝나고 멤버들이 퇴장하자 당연한 커튼콜이 쇄도한다.클랩튼은 오래 머뭇거리지 않는다.그는 다시 나와 Coccine을 연주한다.마리화나 조차 불법시 죄악시되는 나라에 대한 무언의 시위일까.그의 코캐인에 관객들은 코캐인을 따라 외친다.두번째 앵콜곡은 Crossroad다.뮤직비디오 걸작선을 보고 있는 느낌이 든다.그리고 클랩튼의 공연을 보고야 말았다는 생각이 이상한 비현실감과 더불어 머릿속을 메운다.

물론,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클랩튼은 두번째 커튼콜엔 응하지 않는다.그러나 그와 멤버들은 어깨동무한 채 관객들에게 인사한다..8일이 지난 지금 그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공연을 벌이고 있을 것이다.나의 다음번 포스팅은 오스트레일리아 영화에 관한 것이다...

친구와 난 즐겁게 공연장을 빠져나온다.예의 바른 그는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고맙다는 인사를 한다.난 갑자기 그와의 세월이 그렇게 짧지는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우린 한밤중에 넓디 넓은 광장에 차를 주차시켜 놓고 음악을 크게 튼 다음,춤을 추거나 눈 내린 광안리 바닷가를 뛰어다녔었고,여관비가 모자라 여관주인 아저씨와 즉석흥정을 했었다.

지금은 '단란주점'이라는 명칭의 술집이 약간 야리꾸리하게 들리지만,아주 옛날엔 카라오케 비슷한 것이어서,술집에 모여있던 개개의 그룹들이 주문한 노래를 돌아가면서 부르던 시절이 '단란주점'이던 시절이 있었더랬다.그런 종류의 술집에서 그와 난 일종의 '외계에서 온 펭귄'으로서 기능했었다.우리 차례가 돌아오면 ,밥 딜런이 원작이지만 노래방 버젼으로는 에릭 클랩튼의 것으로 나와있는 '를 부르는 것으로 홀 전체를 썰렁하게 만들어 버렸으니까..

잠시 서서 커피를 마셨다.우리가 한 얘기란 결국 우리의 아이와 가족에 대한 이야기였다.서로의 행복을 간절히 빌어주는 것이 이젠 중산층 가장으로 포지셔닝 되어버린 우리가 해야 할 온당할 일이었다.그리고 그것이 어쩌면 최상의 일이다.우린 다시 만날 아무런 기약도 없이 전철 안에서 헤어졌다.그러나 우린 언젠가 만난다.친구란 것은,예술이란 것은 언제나 시간을 견딘다.클랩튼의 블루스 역시 40년을 건너뛰어 관객을 매혹시키고,마그리트의 그림 속의 시간 역시 여전한 위력으로 관객들에게 고즈넉한 대화를 건넨다...

전철을 타고 가서 아내를 만났다.아내는 자기 사무실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다.아내는 무심하게
'공연이 어땠느냐'고 묻는다.'아주 행복했었다'고 말하자,아내는 아주 살짝 미소짓는다.나는 그것이 그녀가 만족감을 표현하는 방식이라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다.나는 아내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그렇게 말하면 아내는 내가 '오버'하고 있다고 소릴 지르며 ,자신과 공연장에
동행하지 않은 것을 힐책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내는 재즈 애호가여서 클랩튼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고 내가 지레짐작한 것은 아닐까,나는 순간적으로 의혹을 가져보지만,이미 엎질러진 물이고 태교음악을 마일즈 데이비스의 재즈로 대신했던 아내가 블루스 공연을 볼 리는 만무하다고 스스로 변명한다..뭐,어쩔 수 없다...우리는 이태원의 '목로'로 술을 마시러 갔다...



르네와 그의 사랑하는 아내 조제트의 모습이다.

 

 

1월 23일의 에릭,

 

그리고 과거의 에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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