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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님에게.<관계의 영원한 어려움에 대하여>

신의 영화들/정체에 대해 떠들기

by 폴사이먼 2004. 6. 27. 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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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그냥 편지를 씁니다.님의 이름을 밝힐 수도 있고 이니셜로 처리할 수도 있겠지만 어쩐지 '님'이란 단어가 참 맘에 듭니다.우리가 인터넷 공간에서 누군가와 대화할 때 '님'이란 꼬리말을 붙이는 것이 참 매력적인 일이라고 진작부터 생각해왔기 때문입니다.우리가 얼굴도 직업도 거주지도 모르는 누군가와 대화할 때 굳이 '님'

이란 경칭을 붙이는 이유는, 그를 예우해주겠다는 암묵적인 동의임과 다를 바 없습니다.우리가 이 곳에서 익명성을 유지하면서 칼럼을 쓰고 의견을 교환하면서 '님'

이라는 호칭을 붙이는 이유는 룰을 지키겠다는,상대방을 또다른 인격으로 대우하고 존중하겠다는 맹세임에도 틀림 없습니다.

 

관계에 대한 존경심,그리고 인간에 대한 최소한도의 예의로 '님'이라는 호칭을 붙인다고 전 믿고 있습니다.사람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이러한 예의가 없다면 그야말로 난장판,진흙탕 싸움이 되고 말 것입니다.그런 관계 속에서 우린 상처받고 깨지고 힘들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님'이란 호칭만 가지고서 그런 기본적인 예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유려한 말솜씨와 가식적인 입놀림으로 '님'자를 남발하고 마치 자신만 옳다는 듯 아무리 유창한 단어를 골라대어 문장들을 적어나간다 할지라도,상대방에 대한 기본적인 배려가 없으면,그 말하는 자가 입에 담는 '님'은 '님'이라는 단어가 원래 가지는 소중한 뜻에 대한 모욕임에 다를 바 없습니다.

 

더구나 인간 사이의 관계처럼 복잡해지기 시작하면 끝없이 복잡하여지고,단순하게 생각하면 끝없이 단순해지는 사이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다른 무엇이 인간관계의 영원한 어려움에 비한단 말입니까? 사실상 우리 인간들이 세상을 살아가며 고통받고 어려워하는 것들은 대부분 바로 인간관계의 어려움에 기인하는 것입니다.다른 사람들이 없다면 우리가 어찌하여 박탈감이나 열등감 때문에 괴로워 하겠습니까? 혼자서만 살아갈 수 있다면 고통이나 괴로움 따위는 아예 단어 조차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사랑 역시 마찬가지입니다.그것도 인간관계라서 언제나 행복하고 언제나 즐겁고 명랑하기만한 사랑은 영원히 존재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절망적인 ,또는 낙천적인 노력을 해 갑니다.우리는 관계의 어려움을 잘 알면서도 최선을 다해 그것을 이겨내려 힘겨운 에너지를 짜내어 눈물겨운 노력을 다합니다.

 

하지만 그런 안타까운 몸부림으로도 안 되는 관계가 있습니다.저는 그것을 '관계의

블랙홀'이라 부릅니다.그 어떤 관계는 아무리 힘을 써도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과도 같습니다.우리는 그런 힘겨운 관계들을 도처에서 목격합니다.남녀간의 사랑에서도,지적인 토론에서도,정치적인 문제에 있어서도,그런 관계들은 불현듯 사라졌다가 심한 상흔을 남긴 채 사라지거나 현존합니다.

 

그것은 바로 제가 이 편지 첫머리에 얘기했던 '님'이란 호칭과 상관이 있습니다.

'님'이 갖는 상징적인 말 뜻,상대방을 보호하겠다는 선의,상대방의 치부,상대방의 단점까지도 지켜주고 배려해 주겠다는 착한 결의와 상관이 있습니다.

 

지금 상황에서 이 칼럼 공간에 가장 필요한 것도 이런 착한 결의들입니다.지금 상황에서 이 칼럼 공간에 가장 필요한 사람들 역시 이런 착한 사람들입니다.이런 사람들이 많아질 때,공간은 풍요로움을 얻고 한 단계 상승하고 진정한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해집니다.이것이 진정한 가상공간에서의 소통입니다.

 

상대방이 자신의 눈 앞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그를 마음대로 비난하고 그의 치부를 낱낱이 공개하는 것,,,그거,..누가 어떻게 말릴 수 없는 일입니다.우리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이므로 누군가를 공격해야 직성이 풀리는 동물성 캐릭터들을 누구나 가질 수 있으므로,우리가 그런 공격성을 보이는 것 자체를 봉쇄할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어쩌겠습니까? 인터넷 공간의 속성이 그런 것을요..

 

그러나 우리는 좀 더 격상되어야 합니다.그것이 인간의 조건입니다.남을 짓밟는 것에 만족하고 승리감을 느끼는 저급함으로부터 우리는 자유로와야 합니다.그런 폭력성으로부터 해방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인생은 그저 그런 것입니다.저는 '인간'에 대한 개념을 그렇게 받아들입니다.

 

'힘'의 논리에 의존하는 것,힘의 우열로부터 삶의 에너지를 얻는 것,상대방을 굴복시켜서 자신의 평화를 얻어내려는 것..이것이야말로 전쟁과 분쟁의 이유가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이 칼럼 공간 역시 많은 다양한 사람들이 들끓고 있으므로 이런 공격성향으로 똘똘 뭉친 사람들을 심심챦게 만나게 됩니다.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일일이 상대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멀쩡해 보이는 사람 역시 갑작스럽게 공격성을 드러내는 일들 역시 가능하니까 말입니다.

 

이렇게 도덕적인 설교 비슷해 보이는 소리를 하염없이 지껄여가는 저 역시도 그런 공격성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저 역시 어떤 님을 할퀴어 본 적이 있으니까 말입니다.그런데 말입니다.가해자에게도 가해자의 논리가 있다는 것을 저는 깨닫습니다.사람의 옆구리를 칼로 푹 찌르면서도 그 가해자에겐 자신만의 이유가 있습니다.그 순간 그는 자신에게 정당하고 옳은 것입니다.특히 이런 칼럼 공간,별의별 의견이 난무하는 이런 공간,더구나 익명성이 보장되고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을 수 있어서 최소한의 안전성이 유지되는 이런 공간에서는 더욱 더 그렇습니다.

 

우리가 쓰는 칼럼의 꼬리말에 악의적인 리플을 다는 일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그것은 열등감의 표현이고 공격성의 표출입니다.'다음'

측이 좀 더 신경을 써서 예전의 칼럼 처럼 접근금지 또는 강제퇴장의 기능을 추가한다면 조금은 나아지겠지만,'다음'은 그러려고 생각하지도 않고 그런 기능이 갖추어진다고 해서 이런 악의가 완전히 사라질 것 같지도 않습니다.

 

사람의 유별난 공격성향 때문입니다.

 

님,다시 '블랙홀'이야기로 돌아갑니다.

님,님은 '블랙홀'에 빠져 버리셨습니다.그 블랙홀은 도저히 소통이 불가능한 공간입니다.상대방을 향한 주먹질은 있지만 그 핵심을 향한 날카로운 지적은 없는,상대방의 인격을 향한 인신공격적 폭언들은 있지만,최소한도의 인간을 향한 배려가 없는 그런 시간과 공간에 빠져버리셨습니다.

 

그런 공간에서는 규칙도 원칙도 배려도 없습니다.상대방을 향하여 '님'이란 호칭을 붙이고 있을런지도 모르지만,상대방을 '님'이라 생각지도 않으며 오히려 상대방을 짓밟아야 할 어떤 대상,먹어치워야 할 어떤 대상으로만 상정하게 됩니다.더구나 그런 공간을 즐기는 사람들까지 존재합니다.

 

누가 누구에게 먹어치워질까? 누가 누구에게 굴복하게 될까? 관객들은 기본적으로 그 싸움에서 안전하기 때문에 더욱 더 흥분하게 됩니다.처절한 전투를 지켜보며 공격성에 대한 대리만족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놀라운 인간성의 아이러니입니다.그들은 모두 평소에는 평화를 외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 어이 없는 상황,인간 자체를 믿을 수 없는 답답한 상황,그러나,,벗어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인간성의 추악함을 인정하십시오.자신의 추악함을 반추해서라도 이겨내십시오.전 사람이 근본적으로 선하거나 악하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사람은 언제든지 선해질 수도 악해질 수도 있는 존재들입니다.다만 존재와 존재의 블랙홀이 오늘 같은 부조리한 상황을 연출한 것 뿐입니다.

 

제 입장에서는,그러나 희망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너도 한 번 당해봐,,라고 말씀하고 싶으시겠지만,그래도 희망적인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어떤 단체나 시간들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전 느낍니다.그것이 언제나 가능할런지,또는 가능할 수나 있겠는지 영원히 알 수 없을테고,그곳에서도 존재의 블랙홀이 또다시 발동되어 님 아닌 누군가가 또 한 번 깨지고 괴로워할 수 있을 지 몰라도 그래도 우린 또다시 만들고 싸워나가야 할 것입니다.그것이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지 않겠어요?

 

혹시나 제가 어리석게 느껴지실 수도 있겠습니다.저를 세상 물정 모르는 이상론자나 철부지로 아실 수도 있겠어요.그래요.전 이상론자에 철부지입니다.그래서 어쨌는데요? 현실적인 사람들,세상물정 잘 아는 사람들은 또 어쨌는데요? 뭐가 행복인데요? 전 인간다운 생활을 할 줄 아는 사람들,관계에 있어서 타인에게 '님'자를 붙일 줄 아는 사람들이 행복해지리라 믿습니다.

 

님,제가 드리는 편지가 님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그저 조금치의 위로라도 된다면 저 참 고맙겠습니다.편히 지내시고 건강하시길 기도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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