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내가 글을 올리고 있는 이 칼럼의 카테고리 이름은 '정체에 대해 떠들기'이다.좀 모호한 제목이다.쓰는 나 역시 좀 헷갈린다. 또 어찌 보면 매우 간단한 종류의 글쓰기가 될 듯도 하고 어찌 보면 아주 어려운 소리가 될 것 같기도 하다.아님 아예 알 수 없는 글들의 나열이 될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한 가지다. 난 내 정체가 궁금했던 것이다.갖가지 다양한 요소들이 조합된 나라는 인간,난 그것이 궁금하다.그래서 아주 간단한 방법을 써보기로 한 것이다.누군가가 나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말을 던졌을 때,예를 들어 이번 경우와 같이 나의 그녀가 나를 '바보'라고 불렀을 때,그 말 자체를 탐구해보기로 한 것이다.
이것이 어처구니 없는 시도가 될지,아님 쓸모있는 시도가 될지 젠장 내가 그걸 어떻게 아나? 하지만 그냥 해보련다.난 이 '그냥'이라는 말을 좋아한다.난 '그냥주의자'다.언젠가는 나의 정체성을 내가 규정하는 이 '그냥'이라는 말에 대해서도 난 탐구해보아야 한다...
이제 '바보'에 대한 논란을 종식시켜야 한다.뭐,논란 까지 간 적은 없지만 말이다.
- -
나의 그녀는 책이나 글을 싫어한다.언젠가 놀러갔을 때,호텔 로비에 앉아 그녀를 기다리면서 무라카미 류의 소설을 읽고 있었다.뒤로 다가온 그녀가 책 내용을 슬쩍 훔쳐보더니 '앞으로 책 읽지 마!' 라고 했다.그녀의 말인 즉슨 이렇게 이상한 책만 보니까 머릿속에 이상한 생각만 가득하다는 것이다.
나는 그녀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그래서 한 동안 책을 읽지 않아 보았다.그러나 별로 소용없었다.난 여전히 이상한 (weird) 생각을 계속 하고 있었던 것이다.그렇다고 그녀가 글을 못 쓰느냐,그건 그렇지 않다.난 한 번도 그녀의 글을 본 적이 없지만,그녀의 주장대로라면 어렸을 때 글짓기 대회나 백일장의 단골 수상자였었다는 것이다.나로서는 어째서 그녀가 글의 세계를 이렇도록 갑작스럽게 혐오하고 떠나버렸는지 모르겠으나,별로 그 이유를 알고 싶지도 않다.
이렇게 글을 싫어하는 그녀에게 그녀와의 얘기를 이 공간에 올렸다는 말을 하기는 쉽지 않았다.성격이 불 같기 땜에 불벼락을 맞을 지도 모르는 때문이었다.그러나 별 수 없었다.'그냥' 말했다.첨에 그녀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으응,그랬어?
그렇게 말하고는 하던 일만 계속했다.난 묘한 감정을 씹으면서 칼럼글을 검색했다.홈레스란 친구가 내게 보낸 편지를 읽었다.그런데 그녀가 다가와서 말했다.
- 나 컴 좀 쓰게 비켜 줘..
물론 두 말 없이 비켜났다.이리 저리 클릭하던 그녀,자신이 등장하는 칼럼을 읽어버렸다.
- 피노키오,일루 와 봐..
두 말 없이 갔다.
- 내가 왜 바보라고 했는 지가 궁금해?
두 말 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 그건 진짜 바보니까 그런 거야..
이 말에 묘한 애정 같은 것이 담겨있지나 않나 하고 그녀의 표정을 훔쳐보려는데,그녀는 다시 그녀의 '다모임'을 클릭하고 있었다.그러더니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몇 마디 덧붙인다.
-- 내가 바보라고 불렀던 건 말야..뭐 복잡한 뜻이 있어서가 아니야.그건 피노키오 당신이 진짜 바보 같이 보였기 때문이야..난 복잡한 게 싫어.나,
엄청나게 단순한 사람이거든? 바보니까 바보라고 부르는 거야..
뭔가 저항할 필요를 느껴서 되물었다.
- 어떤 때 바보 같은데?
- 제발 남들 앞에서 내 자랑 좀 하지 마라.
- 으음..
- 나 별로 안 이뻐.그런데 남들 앞에서 내가 젤로 예쁘다고 하면 사람들이 욕한 단
말야.
- 욕함 어때?
- 그러니까 바보지.
-그게 바보야?
-그럼,콩깍지도 그런 콩깍지가 어딨냐..
글쎄다.사람들의 눈을 그렇게 의식해야 하는지 난 도통 모르겠다.여전히 알 수가 없다. 어쩌면 내가 사람들 사이의 어떤 보이지 않는 룰 같은 걸 어긴 것일까? 난 그런 생각에 잠겼으나,나를 향한 그녀의 바보론은 '팔불출론'으로 번져가고 있었다.더 이상 추락하기 전에 나는 그 논의를 멈추어야 했다.
그런데 나는 그녀의 말이 어느 정도 옳다고 생각한다.난 애정을 겉으로 표현하는 편이다.반면 그녀는 전혀 그렇지 않다.예를 들어 그녀는 나에게 단 한 번도 사랑한다고 말 한 적이 없다.그 이유에 대한 나의 질문에 그녀는 간명하게 대답한다.
- 그걸 꼭 말로 해야 아니?
할 말 없게 하는 데엔 일가견이 있다.그녀의 대답없는 사랑과 나의 대책 없는 사랑엔 어떤 공통점도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다.어떻게 보면 그녀는 무뚝뚝한 남성처럼 사랑하는 것이고,난 섬세한 여성처럼 사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우리는 성 역할이 바뀐 사람들인지도 모른다.그러나 상관 없다.어쩌란 말인가..다 팔짜 소관이지...
그러나 난 그녀의 이 간결한 결론성 코멘트를 듣고서 내가 진짜 '바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잠겼다.그녀가 예로 들은 이야기,내가 남들 앞에서 그녀에 대한 사랑을 넘 내비치는거..이거..정말 바보스런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아니 확신을 가지게 되고 말았다.또한 그것이 그녀에 대한 실례가 될 수도 있다고까지 생각했다.그녀 입장에선 '이런 바보와 나는 결혼할 작정이오'라고 선전하는 꼴이 되고 마니 말이다.바보스런 연인이 자랑이 될 수 있는 곳은 소설 같은 곳 ,영화 같은 곳 뿐일지도 모른다.실전상황에서 자신의 파트너가 '바보'이다..으음,,나 같아도 문제를 안 느낄 수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 바보스러움을 포기할 수 있겠는가? 고렇겐 못 한다.그건 내가 이렇게 생겨먹은 인간이기 때문이다.그녀가 아니더래도 내 사랑의 패턴은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난 이대로 '그냥 '간다..
그래서 난 생각한다.난 적어도 겁쟁이는 아니라고..물론 이 논리의 연결이 뭔가 불충분하고 부적절해보이기까지 하지만 ,난 적어도 내가 이런 종류의 백치인생을 유지해낼 수 있는 자신이 있다고 생각한다.조금은 자중하고 조심해야 하지만 말이다.좀 더 오버해보자면 사랑하는 데에 있어서의 나의 '바보스러움'이란 내 자신감의 표현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또 방향 바꿔 생각해보라.내가 '바보'임을 포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니 바보의 반대는 무엇인가? 천재? 그건 아니다.천재란 바보의 또다른 표현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아마 바보의 반대는 '영악함' 혹은 '영리함'일 것이다. 영악하게 사랑한다는 것.나는 그런 쪽에 아주 무능하다.도대체 어떻게 하는 건지도 모른다.그녀가 아무리 내게 영악한 사랑을 원한다 하더라도 난 고렇겐 못 하겠다.내가 영악하지 못하다며 그녀가 나를 떠나겠다고 선언하는 참혹한 사태가 오더라도 그건 어쩔 수 없다.
문제는 문법이다.내가 바보스러운 것은 바보스러운 문법으로 사랑하기 때문이다.그녀가 이 문법을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그래서 우리의 관계는 매우 위험해질 수도 있겠다.어쩜 남들이 바라보는 것과는 달리 우리의 관계는 살얼음판 위에 있는 지도 모른다.그러나 나와 그녀는 그 점 마저 이해한다.항상 쿨하게 살아왔다고 주장하는 그녀는 본능적으로 관계의 위험함을 직관하고 있는 사람이고,나는 나대로 내 인생의 패턴에 대한 고집이 있다.
그래서 우리의 과제는 얼마나 서로의 문법을 접근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말하자면 모든 결혼은 국제 결혼인 것이다.! !! (제 2 외국어를 배워야 하니까)
자,결론부로 들어가자.난 '바보'라는 단어에서 '문법'이란 단어를 끄집어내었다.두 사람의 문법의 차이가 '바보'란 논란을 이끌어냈다고 주장한다.그러면 이 다음에 펼쳐질 자연스러운 결론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니까 두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고 알콩달콩 잘 살아보라구?
천만의 말씀,우리 두 사람 그렇게하진 않을 작정이다.어느 정도의 노선 투쟁을 감수할 작정이다.치고 받고 싸우겠다는 뜻이 아니다.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 되겠다.삼십 년 이상을 타인으로 살다가 만났다.얼마나 다른 점이 많겠는가? 그걸 이제 와서 뜯어고쳐서 밸런스를 맞추어보려고 한다고 맞춰지겠는가? 내가 보기에 수선비용이 더 많이 든다.(아,드디어 영악스런 멘트가 나왔다0
투쟁이,부드럽고 명랑한 투쟁이 필요하다.유머러스한 분위기 속에 펼쳐질 전쟁이 필요하다.내 전략은 이렇다.아흔 아홉 번 져 주고 한 번만 이기기..그런데 결정적인 상황에서 이기기..
여러분은 이때 쯤 깨달았을 것이다.
으음..피노키오 ,확실히 패배할 전투에 발을 디뎌놓았군....
어느 님에게.<관계의 영원한 어려움에 대하여> (0) | 2004.06.27 |
---|---|
노무현 대통령께.. (0) | 2004.06.23 |
사람들도 나를 보고 바보라고 한다.. (0) | 2004.05.20 |
그녀는 나를 보고 바보라고 한다.. (0) | 2004.05.16 |
스님과 사찰... (0) | 2004.05.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