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이 곳 새로 바뀌어진 칼럼공간에 글을 쓰다가 이상한 의문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이 의문은 옛 칼럼공간에 글을 쓸 때는 전혀 들지 않았던 종류의 의문이다.
그것은 내가 ,도대체 글을 쓰고 있는지,아님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의문이다.좀 묘한 소리라고 느껴지시는가? 좀 더 설명을 해 보자.과거 내 칼럼은 아주 한정된 독자를 상대로 정말 조용하고 작은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었다.'독자의 한마
디"에 자신의 목소리를 내시는 분들 역시 다른 독자의 목소리를 의식하는 분들이 거의 없었다.그 때의 독자들은 비교적 호의적이고 진솔한 얘기들을 남기곤 했었다.나 역시 영화에 대한 내 개인적인 느낌을 자유롭게 남의 눈치 안 보아가며 써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과의 대화는,내겐 사막 속의 오아시스처럼 청량한 생수 같은 구실을 했었으며,그것이 내가 별로 사람들이 보지 않는 칼럼을줄기차게 써댔던 주된 이유가 되었었다..
그러나 지금의 칼럼공간엔 꼬릿글이라는 특이한 구조가 있고,또 공간 자체가 블로그라는 새로운 형태로 변형되어 있는 때문인지,이 공간에 글을 쓸 때면 마치 무대 위에 올라가 있는 느낌을 받게 된다.과거엔 어느 구석진 까페에 앉아 친한 사람들과 대화하듯 글을 쓰는 기분이었다면,지금은 공식석상에서 논쟁을 각오하며 자기 주장을 펼치고 있는 듯한 그런 기분이라는 말이다.말 한 마디 잘못 했다간 곧장 칼 같은 반론이 날아올 듯 하다.마치 발가벗겨진 기분,이 공간엔 이상한 노출의 기미가 엿보인다.그리고 그러한 노출을 은근히 즐기는 사람들까지 있는 것 같아서 정말의아하고 낯선 상황 속에 놓인 느낌이 든다.그러나 한편으론 그러한 노출욕이야말로 글 쓰는 원동력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어떻게 입장을 정할 수 없는 양가감정에 휩싸이게도 된다.
물론 이런 나의 느낌이 최근 몇몇 컬럼지기들 사이에서 벌어지는,논쟁의 한계를 넘어선 분쟁과 연관이 전혀 없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이 될 것이다.그 분쟁을 바라보며 난 그들이 글을 쓰고 있다기 보다는 서로에게 소리 높여 '말'하고 있다고 느꼈었는데,그런 내 기분이 내 자신에게로 연장되어 내 글 역시 '쓰고' 있다기 보다는 말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만들었던 것이 아닐까,그런 생각을 해본다.그리고 그 분쟁은 분명히 그 분들 개인의 인격적 결함 보다는 이 칼럼공간의 구조적 문제에 더욱 큰 책임이 있다고 나는 단언하다시피 말할 수 있다.(보아라,글이 아니라 말이지..) 예전 공간에선 거의 찾아볼 수 없던 불미스러운 분쟁들이 갑자기,그것도 대중적으로 늘어났을 때에는 구성원에게보다는 구조적인 부분에 원인을 찾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지금 공간에선 글이 '쓰여지기'보다는 '말해지고' 있는 것이다.그리고 그것은 이 공간이, 칼럼이란 말뜻이 의미하는 바와는 거리가 먼,일종의 상업적인 뉘앙스를 띈 퍼포먼스와 같은 일종의 전위예술로 변해버린 같은 느낌을 갖게 만든다.이 칼럼공간은 분쟁을 만들어내는 구조적인 약점을 태생부터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난 '말'하기 보다는 '쓰'고 싶다.정말 그렇다.별로 말주변이 있는 사람도 아니고, 평상적으로 사람들과 대화하다가도 엉뚱한 방향으로 대화를 변질시키기 일쑤인 데다가 상상의 나래를 마구 불규칙하게 펴는 걸 좋아하는 나와 같은 인간형들이 말하기를 무서워하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그리고 칼럼이란 본질적으로 글을 쓰는 행위가 아닐까? 물론 '쓰는' 행위 역시 '말하는 '행위의 일종이 아닌가 하고 누군가 반론한다면 할 말이 없다.그러나 내가 지금 말하는 '말'은 '의사표현'의 의미라기 보다는
'자기주장'의 의미와 더 가깝다는 얘기를 미리 해 두고 싶다..
이런 두서없는 생각을 하다가,문득 난 내 인생에서 최초의 글을 쓰던 때를 떠올려보았었다.그건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그 전에 썼던 글들,무슨 무슨 백일장이나 학교의 숙제였던 독후감,아이들끼리 만들었던 교지나 교회잡지에 썼던 잡문들을 제외하고 내가 맨 처음으로 '내' 글을 썼던 때를 아주 나직하게 떠올려 보았었다.
그건 내가,태어났던 도시를 떠나와 먼 도시로 전학 와서,어마어마하게 많은 자유시간을 경험하기 시작했던 때였다.친구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던 그 낯선 도시에서 그 기나긴 시간을 감당하기 위해,난 재상영 영화관들과 전자오락실들,그리고 시립도서관 사이를 불규칙하게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그 당시에 보았던 영화들은 그야말로 내 의식을 형성했던 주옥 같은 영화들이었는데,퀴퀴한 극장들의 의자와 음습한 먼지냄새야말로 지금은 향수 없이는 회상할 수 없는 내 진정한 기억들이다.별별 허접스런 영화들에서부터 고급스런 유럽영화들에 이르기까지 숱한 영화들의 목록이 내 머릿속을 장식했고,그 목록들이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백 편의 영화'라는 이 칼럼의 영화목록과 거의 일치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시간은 남아돌았고,바로 그 시간에 이르러서야 나는 비로소 글을 쓰기 시작했었다.그 글쓰기는 철저한 조용함 속에서 시작되었다.밤의 침묵이 흔들리는 촛불의 미동마저 소리나게 할 때,난 펜을 들고 대학 노트에 빽빽하게 소위 '소설'이란 걸 적어내려 갔는데,그 때 썼던 글들의 완성도 여부를 떠나서,내게 중요한 건 그 상황,즉 어두운 침묵의 방 안에 동그마니 앉아있었던 내 자신이었었다.
난 그 때 침묵의 소리를 들었었다.아무도 없는 절대적인 침묵의 공간,무언가 말을 하거나 글로 끄적이지 않으면 폭발해버릴 것 같은 다차원적인 공간,그것이 내가 처음으로 본격적인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의 상황이었었다.
난 그 때,모진 겨울을 견뎌내고 또 견뎌낸 나무와도 같았다.난 흙 속 깊숙이 내재된 푸른 물들을 애타게 기다리는 메마른 나무 줄기와도 유사했고,이윽고 글로써 처리된 내 형이상학적 욕망들로 인하여,난 행복감 또는 불만족에서 비롯되는 불만 때문에 괴로웠었다.
그래서 난 글이란,일종의 내적인 침묵에서 비롯된 승화된 결정체라고 믿는다.마음 속 무언가가 너무도 많이 차올라와서,바깥으로 흘러넘치지 않고서는 배겨내지 못 할 정도의 감각,난 그것이 글이라고 생각해왔다.따라서 글이란 ,타인과의 소통기구가 아닌,바로 나,현실의 덫에 채일 대로 채여서 아픔 조차 느끼지 못하는 사람의 비상구조 메세지와도 같은 거라고 생각하였었다...물론 그것이 나만의 느낌일 수 있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기나긴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내 글쓰기를 정의할 수 있는 단 한 가지의 사실은,내 글쓰기가 '밤의 침묵'속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지금도 물론 그렇지만 난 철저한 조용함 속에서 글을 쓴다.내 능력이 그것 밖에 안 된다는 반증일 수도 있겠으나,어떻든 난 아주 고요한 한밤중에 방 안을 떠돌아다니는 침묵의 소릴 들으며 글을 쓴다.
그래서 내게 글쓰기란,내 주위를 떠돌아다니는 침묵의 소리를 채록하는 작업일 수도 있겠다....
- -
최근 벌어지고 있는 컬럼니스트들 사이의 분쟁 도중 난 수십 통의 메일을 받았다.그 메일 중 일부분은 내게 '왜 이러한 분쟁이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 당신은 침묵 만을 지키고 있는가'라는 요지를 가진 편지였었다.메일 뿐만 아니라 일부 꼬리글에 있어서도 직접 내 닉네임을 거론하면서 나의 침묵을 질타하는 분이 계셨다...
그것은 '다음'에 칼럼을 쓰는 사람들의 연합체인 '다음칼럼니스트연합'이란 까페의 대표 자리를,하필이면 나처럼 말도 잘 못하고 색깔이라곤 명랑한 색깔 밖에 모르는 나 같은 이가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비난이었다.
물론 나는 대답한다.'다칼연'은 그러한 분쟁에서 철저한 중립을 지킬 것이라고..그리고 그 모임의 대표라고 이름 붙여진 나 역시 원칙론 만을 고수할 뿐,누구의 편을 들거나 의견을 표하는 행위를 하지 않을 것임을 얘기했다.그러면 또다시 메일과 메일들이 날아들곤 했다.그러나 여전히 난 이 문제에 대해서 침묵을 고수할 것이라고 강변했다.내가 침묵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침묵'이란 것이 원칙이 되어야 할 때가 있다고 믿는 까닭이다.
'다칼연' 까페의 500 명이 넘는 구성원들 중에도 내게 비슷한 메일을 보내신 분들이 있었다.그분들의 의도를 너무도 존중하지만,난 여전히 중립을 고수하며 내 중립의 원인을 지금부터 변명하려 한다.이 변명은 분명히 내가 아까 말했던 '글' 이 아니라 '말'이다.'선언'이자 '변설'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내 말은 어쩜 아주 단순하다.
우선,나를 포함한 여러분은 칼럼니스트이다.칼럼니스트는 '말'하는 자가 아니라 글을 '쓰는'자이다.그리고 글은 철저한 침묵 한가운데에서 솟아나온다.좀 더 통속적으로 말해서 '마음'에서 우러나온다.그렇지 않은 글들을 얄미운 독자들은 아주 쉽사리 골라낸다. 글쓰기 보다는 말이 우선인 사람들을,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남의 인격을 깎아내린 자들을,그리고 그 모든 문제들을 '글'로써 해결할 수 있는데도 굳이 '말'을 동원해서 더 큰 분란을 만드는 이들을,...
그리고 아예 '말'하는 것을 '글쓰는 ' 것 보다 더 중요시하여 끝없는 승부욕으로 뭉친 자들을 ,독자들은 심사숙고 끝에 골라낸다.독자들이 '말'하는 글들을 골라내는 이유는 그 글의 함량과 성분 때문이다.그리고 그 글 속에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투쟁욕과 인격 덕분이다.대저 주장을 위해 쓰여진 글에선 '침묵의 소리'가 울려퍼지지 않는다.그것은 당연하다.그 글쓴이들은 분노의 한가운데에서, 마음 속 증오의 용광로에서 부글대는 한없이 시끄러운 소리들을 기초로 해서 글을 쓰는 사람들이다.당연히 그들의 글에선 침묵의 깊이가 느껴지지 않는다.글자는 창날로 변하고 문장은 전차로 변신한다.그들의 말 속 가득한 날카로운 가시들은 상대방을 향해 직선으로 돌진했다가 다시 포물선을 그리며 공격했던 사람들의 면상을 향해 돌아온다.침묵의 소리를 인식하지 못하는 글쓴이들이 겪는 당연한 형벌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침묵의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그들은 자신의 글에 대한 자신감을 가질 수 없다.끊임없는 피해의식에 시달리며,혹시라도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글에,다른 말로 자신의 정체성에 위해를 가하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 시달린다.그리고 그 불안감을 공격성으로 변질시킨다.이어 공격성은 이미 글로써 해결될 수 없는 단계로 들어가며 외부의 힘,이를테면 경찰력이나 법적인 정의에 그 해결점을 내맡긴다..선의의 피해자들이 무한대로 발생하고,무죄한 그들이 상처받거나 붓을 꺾는 일이 발생한다.그것은 글 쓰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재앙과도 같은 일이다.말하는 자들이 쓰는 자들에 대해서 최초의 승리를 거두는 것은 당연하다.그들의 선제공격은 언제나 유효하기 때문이다.쓰는 자들은 동작이 굼뜨고 생각이 많아서 먼저 매를 맞고 피를 흘린다.그러면 공격자들은 의기양양하게 자신의 첫 승리를 자축하고 즐거워한다.
그러자 정말로 그 칼럼니스트의 글들은 '글'이 아니라 '말' 로 변한다.마치 그리스 신화의 변신을 보는 느낌이다.그러나 그 변신과 아울러 ,그들은 글쓰는 이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해버린다.그들 내부에서 언젠가 그들을 향해 용솟음쳐서 그들로 하여금 글을 쓰게 만들었던 '침묵의 열기'는 완전히 실종되어 버리고 남은 것은 쇳소리 나는 말과 주장 외엔 없다.
그분들에게 '침묵의 소리'를 다시 들을 것을 촉구하기 이전에,난 다시금 내게 글을 쓰게 만들었던 '밤의 침묵'을 떠올린다.그리고 다시금 내가 이 문제에 관해 침묵해야 할 당연한 이유들을 찾게 된다.
난 자존심을 지키고 싶다.글쓰는 이로서의 본질적인 정체성,'침묵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능력에 대한 경외심을 간직하고 싶다.난 '글'로 돌아가고 싶다.그래서 내 고풍스런 어린 날에 대한 기억들을 훼손시키지 않으련다.
따라서 더 이상 내게 발언을 요구하는 메일들을 보고 싶지 않다.'말'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글'을 쓰지 않았으면 한다.다시 말해 글로써 싸우지 않았으면 한다.
차라리 입을 열어 말하라,그리고 투쟁하라,글이 위주가 되어야 하는 공간을 더 이상 말로써 오염시키지 말아달라.
물론 이 칼럼을 운영하는 '다음'측 역시,이 문제에 대해서 무한책임을 져야 할 그들 역시 내 작은 속삭임을 경청했으면 한다.이 칼럼을 글쓰는 공간으로 만들어달라.그들이 이 말이 무슨 말인지를 알아들을 수 있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지만,가끔은 고전적인 생각을 품어달라,당신들이 운영하는 이 공간의 정체성에 대해서 단 한번만이라도 심사숙고해달라.
오래 전 존재의 본질적인 침묵 속에서 글을 쓰기 시작한 사람들을 위해,단 한 번만이라도 선행을 베풀어달라, 걱정하지 말라.여전히 장사는잘 될 것이다.그리고 당신들 역시 당신 내부에서 오래전부터 아우성 쳤던 침묵의 소릴 들어보아라,,, 그래서 글을 써달라.서류철에 꽂힌 기획안 같은 공식적인 문서 말고,여러분의 내밀한 말들을 써달라.
이 칼럼공간의 존재가치는 바로 여기에서,'마음 속의 침묵'에서 비롯된다.이 공간 자체가 그런 내적인 풍성함을 보증할 수 없다면 차라리 이 곳을 떠나 또다른 파라다이스를 만들어버리는 게 옳다.
좀 흥분했던 것 같다.내가 아직도 미숙하다는 반증일 것이다.어쩔 수 없다.난 미숙하고 어리다.그리고 바보다.나의 그녀는 거의 매일 나를 향해 '바보' 라고 한다.심지어 '바보'시리즈에 관한 글을 쓸 정도였다.그러나 난 계속 바보일 것이다.단 난 글을 '쓸 수 '있는 바보다.그것이 내 정체성에 대한 자긍심이다.,,,,
Sounds Of Silence
Hello darkness my old friend
I've come to talk with you again
Because a vision softly creeping
Left its seeds while I was sleeping
And the vision that was planted in my brain
Still remains
Within the sound of silence
In restless dreams I walked alone
Narrow streets of cobblestone
'Neath the halo of a street lamp
I turned my collar to the cold and damp
When my eyes were stabbed by the flash of a neon light
That split the night
And touched the sound of silence
And in the naked light I saw
Ten thousand people maybe more
People talking without speaking
People hearing without listening
People writing songs that voices never share
And no one dare
Disturb the sound of silence
난 이 구절들이 좋다...
"Fools" said I "You do not know
Silence like a cancer grow
Hear my words that I might teach you
Take my arms that I might reach you"
But my words like silent raindrops fell
And echoed
In the wells of silence
And the people bowed and prayed
To the neon god they made
And the sign flashed out its warning
In the words that it was forming
And the sign said "The words of the prophets are written on subway walls
And tenement hole....
침묵의 소리를 ,그대 가슴 속 깊숙한 곳에 있는 침묵의 소릴 들어라...
수다쟁이들... (0) | 2004.08.30 |
---|---|
How do fools falls in love (0) | 2004.07.14 |
어느 님에게.<관계의 영원한 어려움에 대하여> (0) | 2004.06.27 |
노무현 대통령께.. (0) | 2004.06.23 |
바보에 관한 그녀의 간결한 결론. (0) | 2004.06.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