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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랑도 가능한가..<파이란>..

신의 영화들/이백 편의 영화

by 폴사이먼 2003. 6. 23. 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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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완전히 자멸해버린 사람이 있다.
그의 인생엔 그 어떤 희망도 없다.희망 뿐만 아니라,가진 것도 없고 능력도 없으며 게다가 재기를 향한 의욕도 없다.

인간으로서의 자존심도 없으며 최소한의 고결함도 없다.그저 매일매일을 되는 대로,사회의 가장 밑바닥에서,바닥에 떨어진 먼지들을 훑어먹으며 살아가는 바퀴벌레 같은 존재로 살아간다.그들의 모습이 천편일률적으로 똑같은 것은 아니지만,그런 사람들을 관통하는 정서들을 한 마디로 표현하는 단어,그것은 '자멸'이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몇몇 영화들은 그러한 인간들을 충실하게 그려내는 데에 성공한다.

2001년도에 만들어진 송해성 감독의 우리나라 영화 <파이란>에서,'국가대표 호구'로 지칭되는 '이강재'가 바로 그런 인간형이다.최민식이 연기하는 이강재는
'자멸형'인간을 정확하게 그려낸다.최민식 특유의 진지한 무거움이 쌩양아치라는 캐릭터를 표현해내는 데에 약간 방해가 되기도 하지만,<파이란>의 '강재'는 우리 사회 어느 곳에서든 분명히 존재할 것 같은 인간임에 확실하다.하긴 어쩌면 우리 모두가 '강재'와 같은 사람들을 이미 잘 알고 있거나,아니면 아는 것 같지만 전혀 모르고 있을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강재,그리고 이강재 류의 인간들은,평범한 중산층 사람들로 하여금 저절로 혐오감을 자아내게 한다.스크린이라는 예술적 방어벽이 있으니까 그렇지,<파이란>의 강재와 같은 인물이 자신의 주위에 존재한다면,진저리를 치지 않을 사람이 거의 없다.또 누군가
여기에 반론을 제기한다면,그는 '위선'에 가깝거나 세상사의 경험이 별로 없는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인간형 하나만 가지고서 영화가 되지는 않는다.일본의 작가 아사다 지로의 짧은 소설 <러브레터>가 원작인 이 영화는,이강재의 인생에 극적인 전환점을 제공한다.파멸 직전의 이강재에게 돌연 빛이 찾아드는 것이다.그러나 그 빛의 빛깔은 다분히 비극적이다.

언젠가 이강재가 위장결혼을 해 주었던 중국 출신 여인 파이란의 사망 소식이 그 빛의 단초가 되어 준다.결핵으로 사망한,얼굴 조차 모르는 중국 여인 파이란의 한국에서의 궤적을 더듬어가면서,강재는 자신의 삶을 돌이키고 회한의 감정을 갖게 된다.그리고 파이란의 유품인 강재에의 편지들은 그를 벌레로부터 사람의
지위로 격상시킨다.

어쩌면 파이란의 편지들은 너무나 단순하다.
아무 아는 사람도 없는,그야말로 사고무친한 땅에서 격심한 중노동과 육체적 괴로움,그리고 무엇보다도 절망적인 외로움에 시달리고 있던 중국 처녀 파이란의 유일한 희망의 시간은 바로 강재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시간이다.

그녀를 기억 조차 하지 않는,그녀에게 관심 조차 없는 이강재에게 그녀는 자꾸만 '고맙다'라는 말을 연발한다.파이란에게,이강재는 유일한 인간적 통로이기 때문이다.삶이 힘들어질수록,파이란은 더욱 더 이강재를
생각하고 그에게 애정을 갖는다.

처음에는 우리나라 여배우 이영애를 닮았다고 생각되었으나,이영애 보다 훨씬 맑고 때가 덜 묻게 보이는 홍콩 배우 장백지는 이강재 만큼이나 외로운 파이란이라는 여성 캐릭터를 적절하게 소화해낸다.

그녀의 떠듬거리는 대사와,꿔다 놓은 보릿자루 같은 표정,그리고 청아한 눈동자는,그녀의 한국에서의 직업인 세탁부라는 일의 특성과 어울려서,퇴락 직전인 이강재의 영혼을 천천히 세척해내기 시작한다.

이강재는 그의 짧지 않은 인생 중 처음으로 누군가가
자신에게 고마워했다는 사실,이름도 모르는 누군가가 자신을 기억하고 그리워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이강재로 하여금,사실은 자신이 '인간'이었다는 것을,자신도 인간적 '품격'을 가지고 살아갈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생면부지의 중국 처녀가
쓴 러브레터가 이강재의 사람으로서의 자존심을,원초적인 고결함을 되살려낸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든 '사람'으로서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그러나 이미 자멸을 택했던 인간에게 현실은 그리 관대하지 않다.이강재는 결국 자신의 친구였던 보스에게 처참하게 살해 당하고,그가 '사람'
으로서 보냈던 한 때는 그렇게 끝장나고 만다.

영화 <파이란>은,아름다운 화면과 절절한 이야기,배우들의 뛰어난 연기 앙상블로써 한 인간의 마지막 한 때를 마음 아프게 재생시킨다.특히 영화 도입부의,이강재에 대한 적나라하면서도 뛰어난 묘사는,영화 말미의 이강재의 변화를 더욱 극적으로 만들고,영화 속 디테일들 하나 하나들이 적당하게 어울려서 영화의 영화적인 수명을 오래 가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마음 속에 던져지는 무거운 질문 하나,
강재와 같은 인간이,파이란의 편지 정도를 통해 그렇게 극적으로 변화한다는 것이 정말로 가능한가?

특히 어떤 직업적 특성 때문에,또는 가족사의 불운이나 어떤 우연한 재난 때문에 강재와 같은 사람들을 자주 대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의 입장에서,강재의 돌연한
회심은 어떤 것으로 받아들여질까?

과연 그런 종류의 자멸한 인간이,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의 편지에 그만큼 흔들리고 그렇게 회복될 수 있을 것인가? 그들이 인간적으로 고려하고 배려할 만한 사람들은 고작 그들의 피붙이 정도에 지나지 않을까?

영화의 아련한 감동과 더불어,그런 종류의 삐딱한 질문들이 몰려 왔었다.

이것은,대답하기에 매우 어려운 질문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에 대한 답변들을 시도했었고 강재와 같은 캐릭터를 그의 작품 속에 등장시켰었다.

어떤 영화 작가들은 이런 '자멸파'인간들의 절망을 끝까지 밀고 나가기도 한다.힘든 사람들의 힘듬을 완벽하게 몰아붙여서 오히려 관객들을 궁지에 몰아넣기도 한다.

예를 들어 지금은 장관이 된 이창동의 <오아시스>가 그렇다.이창동은 자신의 주인공인 설경구에게 어떠한 현실적 희망의 공간도 부여하지 않는다.설경구는 최민식 처럼 갑작스럽게 변화하거나 구원 받지 못한다.그는 자신의 자멸적 캐릭터를 끝까지 끌고 나가고 그 캐릭터에 부응하여 행동한다.그리고 그를 둘러싼 세상에
의해서 보복당한다.그에게 <파이란>의 '강재'와 같은 자각은 없다.그래서 <오아시스>는 <파이란> 보다 훨씬
현실적이고 솔직하다.따라서 더욱 더 비참하고 소름끼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강재와 같은 인물이 전혀 불가능하다는 것은 아니다.무엇보다 이강재의 변화는
'영화적'으로 성립 가능하다.

이강재는 삶의 빛을 보았다.그의 추잡스럽고 속물적인 인생의 어느 짧은 한 때 나마,비록 그 순간이 단 하루라고 할지라도,이강재의 마음에 따뜻한 온기가 스며들고 인간적 고결함에 대한 자존심이 회복되었다면,우린 어쩔 수 없이 박수라도 쳐주어야 하지 않을까?

또한 실제로 우리는 우리 인생에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마음의 빛을,그 따뜻하고 정결한 향기들을 맛 볼
수 있는 걸까?

우리의 영혼이 맑게 정화되어 대상도 확실치 않은 애정으로 가득 차고,그 결과 우리 자신의 인간성 자체가
공기처럼 가볍게 비상하는 시간은 도대체 우리 인생 시간 중 며칠이나 되는 것일까?

밤낮없이 먹고 사는 문제로 분투하고,지루함과 권태로 가득찬 생활이 지속되고,하나의 관문을 넘어 가면 또다른 장애물이 기다리고 있는 이 현실 세상에서,우리가 강재와 같은 깨달음을 얻을 기회가 과연 있기나 있는 걸까?

또한 이강재 처럼 아무런 조건 없는 러브레터를 받을
기회가 앞으로 우리에게 찾아올 수나 있을 것인가?
파이란은 사실 이강재에게 엄청난 행운이 아니겠는가
...

이강재는 그의 황량한 마음 한 구석에 아주 잠깐동안이나마 빛을 느꼈다.그리고는 그 순수함에 멍들고는 울음을 터뜨렸다.그것은 분명히 '영화적으로'가능한 일이고,그것으로서 그의 낮은 인생을 관객들은 역시
'영화적으로' 용서할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역시 한밤중에 글을 쓰는 것은 곤란하다.너무 감상적으로 흘러가니 말이다.


- -


나는 이 영화를 2 년 전,오랜만에 만난 고등학교 동창들과 함께 보았다.우리의 직업은 경찰관과 의사와 대학교의 시간강사와 그리고 돈 버는 길을 버리고 노동운동에 뛰어든 변호사와 볼링장 주인이었다.우리는 영화가 끝난 후 생맥주 잔을 앞에 놓고,이강재의 '인간적'변화가 가능한 일인가에 대하여 꽤 오랜 시간 동안을 얘기했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각자의 입장이 모두 달랐고,그 입장이란 것이 그 사람의 삶의 궤적과 직업적인 특징과 연관이 있더라는 것이었다.

학창시절 격렬한 운동권이었던 시간강사는,여전히 민중적 가치를 믿고 있었다.그는 이강재에게 일어났던 것 같은 구원이,사회의 상류층 혹은 기득권층에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경찰관은 범죄자를 다뤄본 자신의 경험상,이강재에게
일어났던 상황은 매우 단기적인 성질의 것이라고 했다
살해되지 않았더라면 강재는 또다시 예전의 쌩양아치
생활로 돌아갈 것이라고 확언했다.

의사는 거기에 대해 모든 인생들을 그렇게 도식적으로 파악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했다.한 밤의 응급실 같은 곳에서 허접쓰레기 같은 녀석들이 뛰어들어 난장판을 피우는 모습을 너무도 많이 봐 왔지만,모든 일들은 모든 질환들처럼 case by case 라고 했다.

우리의 위대한 법조인은 빙그레 웃고만 있었으며,볼링장 주인은 우리 모두를 비웃으며 이제 서른 살이 된
우리가 이런 문제에 대해 정확한 결론을 내리려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술이나 한 잔 더 하자고 했었다

우리의 말은 모두 옳다.어쩌면 우리는 우리가 보고 싶은 것만을 보려 하는 지도 모르니까 말이다.우리가 다시 만나 다시 한 번 <파이란>을 보게 된다면 어떤 말들이 나오게 될까?

아마 지난 2 년 간의 우리 삶의 궤도가 또 한 번 우리의 생각을 변화시켰을 것이다.우리는 아마 서로에게
배신감을 느낄 수도 있고 공감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그러나 어떻게 되었든 다시 한 번 만나고 싶다...


- -

끝으로 요사이 문제가 되고 있는 '스크린 쿼터'의 이야기..
나는 경제나 돈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므로 이 '쿼터'
문제에 대해서 그냥 한 마디만 하고 싶을 뿐이다.

이 문제가 어떻게 해결이 나든,<파이란> 과 같은 영화가 제대로,더 많이 만들어질 수 있는 방향으로 갔으면 한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최민식이 허구헌날 <쉬리>의 북한군 장교나 얼토당토
않은 섹스코미디 영화의 주인공으로 출연하고,장백지가 요염한 포즈로 옷을 벗는 날을.
또 <지구를 지켜라>나 <복수는 나의 것>,그리고 <와이키키 브라더스> 같은 영화들이 그저 시나리오 상으로만 존재하며 영영 스크린 위로 올려지지 않는 날들을.그리고 멀티플렉스 극장 앞에 서서 채널 선택권을 잃어버린 약자의 모습으로 헐리웃 영화의 간판 앞에서
어정거리게 될 우리 관객들의 모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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