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얘기할 <키카>라는 영화는,무슨 명작의 반열에 올랐다거나,세간의 화제를 불러일으켰다거나 흥행에 성공한 영화는 아니다.다만 지금은 명감독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게 된 스페인의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그 다양하고 현란한 필모그라피들,예를 들어 '하이힐''Ti
e me up,Tie me down''내 어머니의 모든 것','신경쇠약 직전의 여자',그리고 최근작인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작인 .talk to her'들 사이에서 그 명함을 살짝 내밀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키카'를 나는 조금은 이상한 경험에 의하여 기억하고 있다.우선 나는,이 영화를 뉴욕의 어느 싸구려 월세 아파트에서,스페인어로 들으며 영어자막을 읽으며 보게 되었었다.내가 스페인어와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오히려 정반대였다.가난하고 심신이 잔뜩 피곤하기만 했던 그 당시의 뉴욕 생활 초기,나는 언어의 장벽을 뼛속 까지 절감하고 있었다.그리고 생각보다 높다고 느끼게 되었던
그 언어장벽 앞에서,꽤나 우울해졌던 그 시기에,내게 영어를 가르쳐주었던 것은 무엇보다 텔레비젼이었다.
텔레비젼의 영화들,특히 <엑스 파일>의 두 주인공 멀더와 스컬리가 내겐 영어선생이었고,스컬리 역의 질리언 앤더슨의 똑부러지는 영어발음이 내겐 더할 나위 없는 교재가 되었었다.또한 화면의 바탕 색깔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좋아했던 <심슨가족>의 흥미진진한 에피소드들을 통해 난 언어의 벽을 약간씩이나마 극복할
수 있게 되었었다.
그러나 문제는 영화였다.알아들을 수 없는 영화 대사들에 난 무척이나 당황하고 있었다.그 때처럼 우리나라 극장 영화들의 왼쪽 옆이나 하단을 장식하던 자막들을 그리워했던 때는 없었다.영화의 줄거리와 흐름들을 따라 잡고 싶긴 한데,도무지 말이 들리지 않으니 그럴래야 그럴 수가 없었다.
그것은 내게 상당한 괴로움을 안겨주었고,언제나 상황을 정면돌파하기보다는 우회하고 피하기를 즐겨 하던 그 당시의 나는,재빨리 유럽이나 제 3세계의 영화들을 보는 것으로 상황과 타협했다.무엇보다 그 영화들은 영어자막을 제공해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이것은 또 하나의 유리한 상황을 내게 제공해주기도 했는데,그것은 휙휙 빠른 속도로 지나쳐가는 자막을 읽어가는 일이 나의 보잘 것 없는 영문독해능력을 향상시켜주었다는 것이었다.
특히 '인생은 아름다워'로 아카데미 상을 수상했던 로베르토 베니니의 이탈리아 영화들이 그러했는데,그의 속사포 같은 대사들을 번역한 자막을 읽었던 일들이 내겐 좋은 경험이 되었다.그 때 난 그를 한 명의 슬랩스틱 코미디언,즉 이탈리아의 심형래 정도로 생각했었는데,나중에 '인생은 아름다워'를 보며 느낀 그의
연기가 지닌 깊은 페이소스로 인해 베니니에 대한 개념 자체를 변화시켜야만 했던 즐거운 기억이 생생하다
어쨌든 그때처럼 유럽 영화를 많이 접했던 때는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것이다.오늘의 영화 '키카'는 그 시절에 보았던 영화이다.난 지금 '키카'를 케이블 티브이의 영화채널에서 보았다고 기억하고 있지만,그 기억이 정확한지 어떤지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다.
'키카'는 기상천외한 아이디어에 독특하고 화려한 색채감각,이해할 수 없이 비정상적인 줄거리,노골적이고
어떤 면에서는 징그럽게까지 느껴지는 성적인 농담들
,그리고 한 사람의 예외도 없는 비일상적인 캐릭터들로 가득하다.
그것은 주체할 수 없는 열정들과 맹목적인 욕망과의 결합으로 사건의 비극적인 종말을 이끌어가며,또 그것은 영화 전반에 흐르는 상업적인 황색언론에 대한 야유와 더불어 그렇지 않아도 냉소적인 이 영화의 분위기를 더 한층 강화시켜주고 있다.
이 영화의 황당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영화의 주인공인 키카 (베로니카 포르케)는 분장사이다.(요새 말로 하자면 메이크업 아티스트이다) 그녀는
우연히 방송국에 출장 분장을 나갔다가 미국 출신의 작가인 니콜라스 (피터 코요테) 를 알게 된다.그 후 니콜라스의 전화연락을 받은 키카는 은근히 성적인 유혹을 기대하지만,실제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니콜라스의 양아들인 라몬 (알렉스 카사노바) 의 시신이고,당황한 그녀에게 니콜라스는 시신의 분장을 요구한다.그러나 라몬은 죽은 것이 아니다.지병인 심장병에 의해 잠시 동안 가사상태에 놓여있는 것 뿐이다.
이 니콜라스와 라몬은 아주 희한한 존재들이다.니콜라스는 겉으로는 점쟎은 작가인 척 하지만,실제로는 라몬 어머니의 돈 만을 노리고 그녀와 결혼한 후 부인을 살해한 '아내 전문 살인범'이고 그의 교양의 뒷면엔 살인과 잔혹함의 본능이 도사리고 있다.
라몬 역시 자신의 어머니에게 거의 비정상적이다 싶은 억압된 성적인 욕구를 지니고 있고,이러한 외디푸스 컴플렉스로 인해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할 능력이 없는 사진작가이다.
그러나 키카가 분장을 시작하자마자,라몬은 소생하게
되고 되살아난 라몬은 키카와 살게 되는데,일종의 전기쇼크에 의한 외디푸스 컴플렉스의 발동에 의해 그는
이번에도 그들의 집 건너편 아파트를 얻어놓고 망원경과 카메라를 통해 키카를 엿보고 있다.라몬의 작업실에 붙여진
의 포스터는 그런 그의 성향을 더 없이 정확하게 웅변해주고 있다.
여기에 라몬의 옛 애인인 안드레아 ( 빅토리아 아브릴 ) 가 등장한다.흡사 우주비행사 같은 차림에 카메라가 부착된 헬멧을 머리에 쓴 안드레아는 소위 '언론인'이다.전직의사이며 현재는 텔레비젼에서 엽기적인 일만 골라찾아내어 방송하는 일을 맡고 있는 그녀는.특종이라면 어떠한 음모나 악행도 서슴지 않는 사람이다.그 안드레아는 니콜라스 부인의 살인사건에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있다.
주인공 키카는 그들에 비하면 훨씬 순수하지만,그녀 역시 부적절한 상황에 놓여 있기는 마찬가지다.키카는
라몬을 사랑하면서도 아파트 윗층에 살고 있는 니콜라스와 불륜관계를 맺고 있으며 그것에 어떠한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다.오히려 자신의 분장사 친구와 니콜라스를 사이에 두고 다툼을 벌이기까지 한다.라몬이 자신을 엿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말이다.
이 복잡하고도 희극적인 상황에 또 한 사람의 괴물이
끼어든다.키카네 집 동성연애자 하녀의 사촌동생이 바로 그 괴물이다.정상적인 인간 지능의 반도 갖추지 못한 그는,'연쇄강간범'으로서 여자만 보면 무조건 바지를 내리는 일종의 성도착증 환자이기도 하다.수감되어
있던 교도소에서 탈옥한 그는 사촌이 일하고 있는 키카네 집에 찾아오게 되는데,거기서 키카를 강간하게 된다.
그런데 이 성폭행 장면 역시 비정상적이다.가장 공포스럽고 저주스러워야 할 그 장면 역시,감독은 관객의 예상을 비트는 블랙 코미디로 처리하고 있다.(자세한 이야기를 다 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미성년자들이 보고 있을 지도 모르니까 ㅎㅎ )
이 불행한 사건의 전모를 안드레아는 카메라에 담아 방송한다.라몬의 엿보기 까지 알아낸 키카는 충격을 받아 라몬의 곁을 떠나고 사건은 최후의 파국을 향해 줄달음친다.
즉 니콜라스의 살인경력을 알아낸 안드레아는 그 '특종'과 '진실'사이를 흥정하다 니콜라스에게 살해당하고 니콜라스 역시 총에 맞아 죽는다.심장에 쇼크를 받은 라몬은 병원에 실려가고 맨 나중에 달려와 라몬을 또다시 소생시킨 키카는 새로운 남자와 길을 떠난다는
것이 이 영원할 것만 같던 혼란상의 종결이다.
도무지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무엇 때문에 이 비정상적인 캐릭터들과 뒤죽박죽하기만한 스토리들을 필요로 했던 것일까? 절제되지 못하는 욕망들과 죄의식 없는 범죄들,그리고 지식인들의 위선과 이중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이 영화는 도대체 무엇을 그리려고 했던 것일까?
나는 이 영화를 보고 난 직후의 그 멍한 느낌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아마 그것은 금방의 질문들에 대한 난감함 때문에 그러했을 것이다.
이 물음에 감독은,흡사 낚시의 미끼 같은 힌트 하나를 제공한다.그것은 출연배우들의 화려한 의상이다.소설가인 니콜라스는 죠르지오 아르마니가 디자인한 세련되고 지적인 옷차림을 하고 있다.폴 스미스가 디자인한 사진작가 라몬의 의상은 원색적이고 강렬한 정열
,그러나 너무나 잘 정제되어 있어서 도착적인 감정을 표현한다.순수한 백치인 키카에겐 베르사체의 화려한 장식이 필요하다.어둡지만 어딘지 SF적인 안드레아의 옷은 쟝 폴 고띠에의 작품이다.그것은 그녀의 집요함과 그녀가 좋아하는 대중매체의 인공적인 허황스러움을 상징해준다.
뒤틀리고 모순된 에너지로 가득찬 이 주인공들의 내면에 비하여,그들의 겉모양 만큼은 세계 최고의 디자이너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화려한 의상들로 장식되고 있는 것이다.거의 패션 쇼를 연상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혹시 이 영화는 인간 본연에 내재되어 있는
위선과 이중성을 그리려고 했단 말인가? 글쎄,그러나 우리는 이 지점에서 또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모두 다 극도로 '대비된'존재들이다.텔레비젼의 책 소개 프로그램에 나와,점쟎은 유머를 곁들이며 인터뷰하는 살인자 소설가와,사회의 파수꾼이라는 통념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황당한 특종만을 쫓아다니는 언론인과,정교하게 꾸며진 스튜디오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숨어서만이 자신의
피사체를 카메라에 담을 수 있는 사진작가는 모두 다
한 모태에서 태어난 이란성 쌍둥이들이다.그들은 격렬한 몸짓과 사건들을 통해,자신들의 유전 코드 깊숙이 각인된 이 두가지 대비점을 동시에 드러낸다.
자,여기서 한 번 더 오버해보자.
이 '대비'를 '정상과 비정상의 대비'로 불러보는 것이다.이것이 비약이자 논리의 오류임을 알고 있긴 하지만 이 글이 그런 것들까지 검증 받는 칼럼은 아니므로 그냥 그렇게 해보자.
'정상'과 '비정상'은 도대체 무엇인가?
우리가 어떤 사람을 '비정상적인 사람'이라고 부를 때,예를 들어 임상의학이 어떤 사람을 '정신병자'로 판정할 때,도대체 그 기준은 무엇인가?
그것은 아마 그 '비정상'의 가장 반대편에 서 있는 소위 '정상들'의 가치관일 것이며,가장 '비정상'이란 가장 '정상'의 반대적인 거울형상들일 것이다.다시 말해 가장 '정상적'인 가치들에 의해 끝까지 뒤로 밀려난 모습들이 바로 비정상일 것이다.그러나 그것은 가장 격렬한 '비정상적 인물들'과 지극히 예외적이고 모순된 사건들이,가장 모범적인 '정상적 인물들'과 가장 건전하고 평범한 사건들을 반대적인 의미에서 반영한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도스또옙스끼가 말했듯,지극히 이상스럽고 예외적인 것들 속에 진리가 숨어있는 것이다...
결국 가장 '비정상적인 것들의 함의'는 이런 점에서 그 진정한 가치를 가질 것이다.따라서 우리는 가장 순수하게 '비정상적인 사람'속에서 가장 순수하게 정상적인 사람을 엿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도 있다 이 말이다.물론 이 '비정상'이나 '광끼'는 또다른 개념을
통해 분류되어야 하지만 말이다.최근의 한국영화 '오아시스'역시 이러한 코드들을 통해 읽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키카> 의 인물들은 이것과도 또 다르다.무엇보다 그들은 이 두 가지 대비점을 동시에 갖고 있는 것이다.감독은,가장 평범한 사람들의 일탈이나 가장 순수한 광끼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끝없는 질주를 그려내는 방법으로 무언가를 잡아내려 하지 않는다.대신에
모순된 두 가지를 동시에 가진 사람들을 통해 메시지를 던지려 한다.정상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들이 한 데 뒤엉켜 구르는 이 화려한 용광로를 통해 그는 무슨
이야기를 하려 했던 것일까?
혹시 그것은 '모든 정상적인 것들에 대한 빈정거림'
이 아닐까? 그것은 '정상'의 편에 서서 '비정상적인 소수'를 소외시키고 제외시키는 정상인들에게,'사실은
너희도 이런 사람일지도 모르지 않느냐'고 얘기하는 유들유들한 이죽거림이 아닐까? 그것이 스페인식의 낙천주의와 결합하고 블랙 유머와 스크류볼 드라마와 연합해,한 편의 난삽하고 정리되지 않은 이야기로 표현된 것이 이 영화 <키카> 가 아닐까 한다.
아마 오버와 오버는 끝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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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뉴욕의 지저분한 그 월세 아파트의 나 역시 마드리드 식의 기관총 같은 언어와 하얀 자막의 영어
문장들 사이에서 혼란과 모순을 경험했던 것이 틀림없고 말이다.비단 언어 뿐만이 아니라,내 일상이 모두 뒤집어지던 그 시절의 희한한 경험들을 나는 이 영화의 혼란상에 오버랩 시키고 있는 지도 모르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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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이 영화를 얘기하며 빼놓을 수 없는 두 명의 배우가 있다.그 두 사람은 니콜라스 역의 피터 코요테와 안드레아 역의 빅토리아 아브릴이다.
빅토리아 아브릴은,공식적으로 누군가 내게 '가장 좋아하는 여배우가 누구냐'고 물어올 때,가장 먼저 튀어나오는 배우이다.'글로리아 두케','아만테스','당신의
다리 사이로',하이힐','욕망의 낮과 밤'등 의 영화들을 통해 그녀는 언제나 불안한 눈빛과 끝 간 데 없이 어두운 정열,그리고 그녀만이 가진 비극성을 내게 던져주어 왔다.사실 그녀는 얼굴이 예쁘거나 몸매가 훌륭한 배우는 아니다.그러나 그녀는 몸을 사리지 않는 과감함과 조금은 난폭한 섬세함으로 나를 그녀의 열렬한 팬으로 만들었었다.나는 가끔 빅토리아 아브릴과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같이 나오는 영화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생각할 때가 있는데 언젠가 이 글들을 통해 그녀 만을 다룰 날이 있을 것이다.
또 다른 한 배우,피터 코요테.. 로만 폴란스키의 '비터문'에 나왔던 그 사람이다.아참 에도 나왔었다.최근엔 어쩐지 악역전문배우로 전락해가는 느낌이다.그러나 내가 기억하는 그의 영화는 < A man in love>
이다.그는 그 영화에서 체자레 파베쎄를 모델로 한 이탈리아 시인을 연기하는데,상대역인 그레타 스카치와 멋진 앙상블을 이룬다.
지금도 내가 기억하는 그의 장면은 그레타 스카치와 그가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떤 다리 위에 서 있는 장면인데,롱 코트를 걸치고 그레타의 어깨 위에 살포시 팔을 얹어 그녀를 자연스럽게 감싸 안은 그의 포즈는,언제나 내가 '나도 좀 저렇게 멋있어 봤으면'하는 포즈이다.그런 자연스러운 다정함을 그런 냉정한 얼굴로부터 뿜어나오게 할 수 있는 배우는 그리 흔하지 않다.물론 실제의 그가 어떤 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