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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re the boys are gone...

신의 영화들/이백 편의 영화

by 폴사이먼 2003. 4. 23. 0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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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무대는 텔레비젼 브라운관 속이다.CNN과 알 자지라를 통해 우리는 지구의
한 켠에서 볼어지고 있는 파괴와 살육의 파노라마를 보고 있다..

도무지 현실감이 들지 않는다.저 전쟁이 어느 날엔가는 우리가 살고 있는 땅에서 처참하게 재현될 수도 있다는데,저 TV속의 전쟁은 마치 잘 짜여진 영화처럼,또는 줄거리조차 엉성한 다큐멘터리처럼 그도 아니면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컴퓨터 게임처럼 ,결론적으로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타인들의 세상처럼 펼쳐지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50년 전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저 곳에도
아들을 잃은 어머니와 남편을 잃은 아내,그리고 팔다리를 잃은 병사들이 있다.증오와 눈물과 슬픔과 회한이 패배한 자들의 가슴에 새겨지고 승리한 자들 역시 파괴에의 기억에 몸서리칠 날이 올 것이다.

사실상의 승리자들이란 항상 무대 전면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법이다.

- -

오늘은 시작부터 너무 감상적으로 나아간다.인류의 역사에서 전쟁이란 한 번도 끊긴 적이 없었고,그 만큼
평화에의 갈망이란 전혀 가망이 없어보인다.전쟁은 인간사의 모든 요소들을 한꺼번에 내포하고 있으며,사람
사는 세상을 다루는 예술 쟝르인 영화는 전쟁이란 소재를 도저히 피해 갈 수 없다.그래서 우리는 수많은 전쟁영화를 보아왔으며 또 앞으로도 보게 될 것이다.

내 경우에 있어서도 벌써 기억 속에 여러 전쟁영화들이 앞다투어 떠오른다.특히 베트남 전쟁을 다룬 <지옥의 묵시록> 과 <플래툰>이 그 앞자리를 차지한다.전자는 미국인들의 기독교적인 공포를,후자는 냉정한 반성적 체험을 상징한다.

한국전쟁을 다룬 영화도 부지기수이다.미국인들은 <
MASH> 와 같은 영화를 통해 전쟁을 패러디하고 전쟁당사자인 우리를 형편없이 비하한다.그러나 여기에 그렇게 분노할 필요는 없다.지난 번의 007 속편 처럼,미국인들이 한국의 특수한 상황,즉 이념의 대립,동족간의 전투,수많은 뼈아픈 희생을 이해하고 기억해 줄 리가 없다.그들에게 한국전쟁은 영원히 타인의 전쟁일 수 밖에 없는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람이 만든 우리 전쟁영화이어야만이 우리에게 의미를 가질 수 있게 된다 이 말이다.그 중 내가
생각하는 대표작은 아무래도 <돌아오지 않는 해병>이다.

감독은 이만희,1960 년대의 한국영화 중흥기를 이끌었던 사람들 중 하나이다.최근 우리 영화의 제작 편수가 늘어나고 한국영화가 부활하고 있다지만,당시는 현재 제작 영화 숫자의 거의 두 배에 달하는 100 편 이상의 영화가 한 해에 만들어지던 시절이었다.

신상옥이나 강대진,유현목이나 김기영 감독 등이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마부>,<오발탄>,<하녀> 등의 걸작들을 만들어냈던 그야말로 한국영화의 황금기였다.

그 중에서도 이만희는,이 영화 이외에도 <만추>,<삼포가는 길>등을 감독한 천재였고,44세의 나이에 위궤양 천공으로 요절했다.알코올 탓이었으리라...


줄거리는 어쩌면 단순하다.인천상륙작전 이후 북진을
거듭하던 한국군 해병대가 중공군의 남침을 받아 곤경에 처하고 어려운 임무를 완수하려 애를 쓰다가 한 명만 살아남고 모두 죽는다는 내용이다.그러나 여기에 해병대원들 사이의 갈등과 동료애,부모를 잃은 전쟁고아,미군들과 양공주들이 등장하여 영화를 '다층적'으로 만들어주고 있다.

당대의 명배우들인 최무룡과 장동휘,그리고 이대엽과
구봉서,독고성과 최 성과 조 항이 모두 얼굴을 내밀고
,양공주 마담으로 출연하는 전계현과 전쟁 중 부모를 잃은 고아로 해병들과 행동을 같이 하는 아역배우로 전영선이 출연한다.이 전영선이라는 꼬마가,현재도 방송 코미디에서 패러디되는 <사랑방손님과 어머니>의 그 닭살스런 아이 옥분이다.(아니 옥이던가?)

<돌아오지 않는 해병>의 가장 우수한 영화적 매력이란,당시의 시대적 상황 즉 남북간의 군사적 대결이 엄연히 상존하고 박정희의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인 그 때,스토리가 뻔한 반공영화가 만들어지는 대신,실존적
인간들이 살아 숨쉬는 영화를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영화 속 해병대원인 이대엽의 가족들은 동료 최무룡의 형 (그는 공산당 계열이다) 에 의해 잔혹하게 살해당했다.동료간의 갈등 상황이 근본에 깔려 있는 것이다.그들 사이의 반목은 언제나 아슬아슬하며 곧 폭발할 것만 같다.

그러나 분대장 장동휘의 존재가 그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주며 구봉서라는 희극적인 캐릭터가 언제든 나타나 긴장감을 녹여준다.또다른 병사들 역시 각자의 개성이 적절하고 강렬하게 부여되어 있어서,정말로 병사들 같은,정말로 존재하고 있는 사람들인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이 영화가 진정으로 사람들에게 잊혀지지 않았던 이유는,이 '해병들'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그들은 죽었다.그렇다면 그들은 패배한 것인가?
아니면 좀 상투적으로 말해서 '장렬하게 산화한'것인가?아니면 그저 전쟁 중 죽어간 이름 없는 병사들일 뿐인가..

그것은 보는 관점에 따라,어쩌면 보는 사람의 정치적인 입장에 따라 다를 것이다.그러나 분명한 것이 있다
그들은 마치 갈리아를 정복하고 돌아온 개선장군 시저 같은 '영웅'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또한 일당백의 실력으로 베트남 정글을 헤집는 '람보'스타일도 아니다.그들은 평범한 병사들이고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을 것만 같은 젊은이들일 뿐이다.그들은 막걸리와 바베큐 파티에 흥겨워하고 양공주들과의 하룻밤에 흥분하는 속물들이지,정연하게 자신을 추스리는 엄격한 전사들이거나 냉정한 지략으로 적군을 섬멸하는 전투기계들이 아니다.

따라서 그들의 전쟁은 보다 처절하다.죽고 깨지고 다친다.그들은 슬퍼할 줄 알고 괴로워할 줄 안다.전쟁통에 고아가 된 소녀를 끔찍이 위하고,중국군의 대공세를 앞둔 시간 자신들의 죽음을 예견하고 떨며 괴로워한다.

그런 그들이 죽는 것이며,관객들은 영화 속의 평범한
병사들에게 자신을 투사하며 새삼 전쟁의 참혹함을 깨닫는 것이다.이것은 CNN 화면에서 사지가 절단된 이라크 소년을 보는 것과는 아주 다르다.CNN 화면과 영화의 화면은,마치 연극무대와 티브이 드라마 처럼 그 원근감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그래서 이 영화의 장면 장면들은 마치 느와르 영화의
그것처럼 어둡고 음울하다.영화 초반에,빈 건물에서 벌어지는 전투 장면의 긴장감은 1960년대의 영화라고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팽팽하고,학살당한 민간인들의
모습은 다큐멘터리처럼 사실적이다.거기에 그 시대 특유의 비극적 신파 정서가 가미되어 있어서,이 영화의 어두움은 슬픈 색조마저 띤다.신파적 히치코크라고나 할까?

감독 이만희의 영화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그의 세계관이 특유의 비관주의에 물들어있다는 것 만큼은
부인하기 어렵다.지금은 한국 영화계에서 가장 개성적인 중견 여배우가 되어 있는 이혜영의 아버지인 그는,
'인간'이라는 전제 하에서 전쟁에 접근했던 것이 틀림없다.승패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혹자들은 이 영화가 '반공'이라는 정서에서 멀리 나아가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그래서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할 수 없었다고 이 영화를 폄하하기도 하지만,이 영화는 전쟁이 종료된 지 고작 10 년만에 만들어진 영화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아직도 거리엔 전쟁의
상흔이 넘쳐나고 전쟁당사자들간에 대결의 불씨는 여전했다.<지옥의 묵시록>을 한꺼번에 뛰어넘어선 <플래툰>을 주문하는 것은 지나치게 성급한 것이다.

더구나 이만희는 당시 우리 사회에 횡행했던 '반공정서'에 일정 부분 그 자신이 상처를 입었다.그는 1965년에 만든 <7인의 여포로>라는 전쟁영화 덕택에 '반공법'으로 구속되기에 이르렀는데ㅡ그 영화의 내용인 즉슨 중공군에 포로로 잡힌 국군의 간호장교들을 북한군
병사가 영웅적으로 구조해 귀순한다는 것이었다.어떻게 북한 병사가 영웅일 수 있느냐,이것이 구속 사유였던 것이다.이 정도의 내용 조차 보아 넘겨주지 않던 시대가 지금 일부 사람들이 그리워하던 '박정희'의 시대였던 것이다.또한 역시 이만희가 만든 <군번없는 병사>에 북한군 장교로 출연한 배우 '신성일'이 너무 잘생겼다는 이유로,사전검열에서 트집이 잡히는 정서가 그 시대를 지배하던 정서였다.

또한 1974 년 영화 <들국화는 피었는데>는 당시의 유신정권에 의해서 전면개작의 지시를 받기도 했다.이만희가 과도한 술로 심한 위궤양을 앓고 있었으며 결국 위출혈에 의해서 죽음을 맞게 된 것은 어쩌면 당시의 사회에 의한 타살이기도 하다.그런 그에게 '반공'이니
'객관성'이니를 따지는 것은 사실 의미가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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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지금 우리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에
대해 정말 여러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다.'반미'의 관점에서,'문명간의 충돌'이라는 관점에서,'경제적 음모
'라는 관점에서,그리고 여러 다양한 관점들에서..

그러나 그러한 분석들은 정말로 여러 사람들이 수백년에 걸쳐서 이미 해 온 것들이다.H.G 웰스 같은 이들은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전쟁'이란 개념을 발명했다가 인류가 이미 종말에 도달했다는 인식으로 나아가기도 했다.로렌츠 같은 동물학자들은 동물들 간의 영역다툼을 면밀히 관찰한 후에 인류역사상의 모든 전쟁
역시 영역다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추론해냈다.

사실 동물의 세계에서도 독재자를 죽이는 행위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차가운 두뇌들이 모두 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이만희는 인간성이란 단 하나의 전제를 통해,10 년 전 그가 속한 사회가 겪었던 전쟁을 그려냈다.그의 세계는 사람들 간의 갈등과 분노,또는 연대와 웃음이 뒤섞인 정확한 비극으로 탄생했다.<돌아오지 않는 해병>
이라는 전쟁영화는,비극적인 사람냄새를 전쟁 한복판에 심어놓음으로써 언제든 그 전쟁의 당사자가 될 수 있는 관객들을 그 곳으로 데려다 놓는다.

그러한 공간이동을 유도하는 능력,그것이 영화감독으로서의 능력이다.그리고 거기엔 언제나 '인간'이란 전제가 요구되는 것이다,특히 전쟁영화에 말이다...

물론 어떠한 상황을 가시적으로 개선하기 위해서는,사람들간의 연대가 필요하다.예를 들어 부도덕한 전쟁에 반대하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의 각성과 단결,그리고 조직이 요구된다.그러나 분노는 언제나 슬픔에서
출발해야 한다.차가운 이성적 분노보다는,깊고 뜨거운
절망에서 나오는 분노가 더 오래 타는 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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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 영화를 다시 구해 보며,옛 시절의 배우들을 유심히 살펴보게 되었다.서민적인 체취와 남성적인 냄새를 함께 풍기는 장동휘와,차분하게 지적인 최무룡 (그를 보면서 나는 미국 배우 몽고메리 클리프트를 연상했는데,그의 아들이 최민수라는 것은 완벽한 미스테리이다,아마 최민수는 엄마를 닮은 모양이다) ,그리고
천연덕스럽게,그리고 전혀 천박하지 않은 위트를 지닌
구봉서,또 장혁이나 최 성,독고 성,,,이 옛날 배우들은 만만치 않은 '깊이'들을 지니고 잇었다.

이대엽이 분노에 떨어 눈을 부라릴 때,나는 저 험한 눈짓을 정우성이나 이정재가 과연 제대로 흉내라도 낼
수 있을까,하고 생각했다.우리의 스크린 부피가 엄청나게 확장되었는지도 모르겠다.그러나 구성원들의 천품들이 그 확장된 부피 만큼 깊어졌는지는 확신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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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글,다시 읽어 보니 엄청나게 재미 없다.아무래도 부시가 가져다 준 '충격과 공포'의 표적은 이라크 만이 아닌 것 같다.다음 번 영화는 내가 아주 아주 좋아하는 영화 '오즈의 마법사'인데..빨리 충격과 공포에서 벗어나야겠다..

아아,걱정된다..

아 참,아무래도 오늘의 '해병'들은,군복 바지 칼날 같이 다려 입고 선글라스를 낀 채 초등학교 앞에서 호루라기를 날카롭게 불어대며 교통정리에 열심인 그 해병들과는 영 거리가 먼 것 같다.우리 사회엔 아직도
'장난감 병정'들이 너무나 많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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