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이란 신분으로 살아가던 시절,나는 학생이라고 불리는 인간 자격증에는 별로 유감이 없었지만 시스템으로서의 학교만은 무지 싫어했었다.굳이 이유를 상세하게 들먹이긴 싫지만,학교라는 곳..나는 그 곳에 가기 싫으면 굳이 억지로 갈 필요는 없는 장소라고 생각했었다.그러나 내 마음대로 학교에 가지 않으면 무한 보복을 당하는 상황이 곧잘 벌어졌던 시기에 학교를 다녔으므로 학교에 아예 가지 않을 수는 없었다.벌 받는 것 만큼은 또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가기 싫은 곳이나 초대받지 않은 곳엔 결코 발걸음을 들이기 싫어하는 나는 결국 최후의 수단으로 내 체질을 이용하곤 했었다.지금은 희한하게 그런 증상이 없어졌지만 당시의 나는 아스피린을 먹으면 온 몸에 빨갛고 무시무시하게 두드러기가 돋는 알러지 반응을 보이곤 했었으므로,일단 학교에 갔다가 다시 학교를 빠져나오고 싶으면 지체없이 아스피린을 먹었었다.그러면 얼마 지나지 않아 온 몸에 두드러기 반응이 시작되었고,그 증세의 폭발성에 나 자신도 약간 놀라면서 - 그러므로 놀란 연기가 매우 자연스럽게 유도되면서- 병원에 가야 한다는 핑게로 학교를 조퇴하는 합법적인 자격을 얻곤 했었다...가장 쓸모없는 수업 시간이라고 생각되는 몇몇 과목을 들어야 하는 날이 오면 나는 어김없이 아스피린을 먹었었다..
대학 때도 마찬가지였다.대학에 대한 환상 - 그 가차없이 가엾은 리버럴한 환상 말이다- 은 한 달도 채 못되어 깨졌고 대학을 둘러싼 각종 멍청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한숨만 나왔었다.그래서..결국 대학의 출석률 역시 바닥을 기었다.나는 대학 대신 야구장이나 극장,그리고 갑자기 떠나는 여행으로 학기의 순간 순간을 메웠고 도저히 듣지 않을 수 없는 수업은 마음 속 핵심과 반대 방향의 오기를 발휘하여 맨 앞줄에 앉아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교수의 말을 천자문 외우듯이 그냥 외워버렸었다..
그러다가 결국 실습이라는 피할 수 없는 단계에 도달하고 말았다.의과대학생의 실습 커리큘럼은 그야말로 빡빡하게 제시되어 있었고 이제야말로 도망갈래야 도망갈 수 없는 상황을 만나고 말았던 것이다.그러나 세상 어디에도 빠져나갈 구멍은 있는 것이어서,나는 이번에도 싫은 시간을 커버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냈었다.나와 똑같이 학창 생활을 보내고 있는 두 사람의 조력자들 덕분이었다.나와 함께 실습조를 만든 나 보다 2년 위인 두 형들 -그들은 삼수 끝에 대학에 입학해서 나와 같은 학년을 다니고 있었다- 역시 툭하면 수업에 빠지고 학교에서 도망가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뭐...유유상종이라는 말을 듣는대도 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말이다.우리는 매우 차분하고 공평하게 도망갈 시간을 차례로 배정했고,한 사람이 실습에 빠지거나 없어지면 나머지 두 사람은 어떻게든 도망간 한 사람의 알리바이를 만들어내고 책임지는 걸로 확실한 협약을 맺었다..그래서 우리는 3일에 한 번 씩 돌아가며 자유를 맛보게 되었고 그것으로 지루하고도 육체적으로 힘든 실습의 나날들을 버티어 나갈 수 있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 실습조는 언제나 두 사람이었다.셋이 한꺼번에 같이 모인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태생적 룰이었으니까 말이다.지금은 어떤 대도시의 정형외과 의사 (그는 무릎관절의 대가가 되었다) 와 이비인후과 의사 (그는 정말 어처구니 없게도 돈에 눈을 떴다) 로 살아가는 그들에게 나는 가끔씩 그들의 과거 행적을 다 까발려버리겠다고 위협하지만 그들에게 그따위 위협은 통할래야 통할 수가 없는 헛짓에 불과한 일이다.니 맘대로 해..라고 말하며 그들은 나를 냉소한다.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두 사람 다 지금은 그야말로 일벌레가 되었다.나 역시 마찬가지다.나는 학교를 졸업한 후 오히려 더 열심히 공부를 했다.아마 강제로 시키지 않음 열심히 하는 타입의 인간인 모양이다.나는..
1.그러다가 어느 날,그 중 하나..야한 영화를 원했다.,.
지금은 부자가 된 ㅇ 형과 같이 기나긴 수술실 실습을 마친 오후였다.나는 말했었다.
-형,지겹다..약속이고 뭐고 우리 다 도망가버리면 어때..
ㅇ형이 눈을 반짝거렸었다...
-그럴까..지친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는 욕설의 대가였으므로 말끝에 욕설을 붙여 날렸었다..
우리는 잠시 수술실 탈의실 바닥에 주저앉아 탈주할 것인가 말것인가를 결정하려 했었다.그러나 나 보다는 ㅇ형이 먼저 이성을 되찾았다.그리고 말했다.
-몇 시간만 참자..참고..야한 영화나 보러 가자고..
하긴 그랬다.우리 둘만 믿고 이미 어딘가로 도망가버린 - 쌍절봉이 취미여서 가방에 이소룡 스타일의 쌍절봉을 넣어가지고 다니던- ㅅ 형을 생각하면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긴 했다..(그는 점심시간에 옥상에서 쌍절봉 수련을 했다..)
2.그래서 우리는 야한 영화를 선택했다.
그러나 야한 영화라고 해서 하늘에서 막 뚝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늦은 밤 갑자기 '야'한 영화를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ㅇ형과 나 사이의 야하다는 개념 역시 엄청난 차이를 보였다.우리는 어떤 영화가 야할 것인가..에 대해 얘기하려다가 이내 지쳐버렸다.ㅇ형이 내게 '그냥 니 마음대로 해' 그러고 얘기를 끝냈다.
나 역시 아무 생각도 없이 영화를 선택했다.'야하게 보이는' 한 영화를 골랐고,극장을 향하여 바로 출발했다.그 영화가 바로 오늘 얘기하는 영화 <아만테스>이다.
극장이 어디였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이 문장을 쓰기 전에 ㅇ형에게 전화를 걸어 어느 극장이었느냐고 물어봤지만,형은 아예 이 영화를 본 기억 조차 없었다.그리고 심지어 정말 그런 영화를 우리 둘이서 본 적이 있느냐,자신은 남자 둘이서만 야한 영화를 보러 간 적이 없다고까지 말했다.그가 하도 강한 어조로 속사포 같이 내게 대꾸했으므로 나도 순간 내가 이 영화를 과연 저 형과 본 것이 맞느냐 하는 스스로를 향한 의문을 가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맞다.ㅇ형이 분명했다.근거를 댈 수는 없지만 <아만테스>를 함께 본 사람은 ㅇ시의 이비인후과 의사 ㅇ형이다.나는 다른 야한 영화를 함께 본 사람도 다 기억하고 있다.예를 들어 장 자끄 아노의 <연인>은 k시의 안과 개업의 ㅈ과 함께 봤으며,샤론 스톤이 등장했던 <원초적 본능>은 두 번,각각 다른 후배와 보았다.그러나 <아만테스>가 과연 야한 영화였는지,아니면 그 당시 우리가 그 영화를 보고 '야한' 느낌을 받았었는지에 대해선 확실한 기억이 없다.만약 이 영화를 '야하다'는 측면으로 기억하고 있다면,나는 내 야한 영화 베스트 10에 이 영화를 꼽았을 가능성이 농후한데 - 어쨌든 이 영화는 내 기억 속에 강렬한 느낌을 남고 있지 않느냐 말이다- ,언제나 나의 가장 야한 영화는 에이드리언 라인의 <나인 하프 위크>다.이상하게 <아만테스>는 제외되어 있다..
오히려 이 영화가 내 기억 근저에 강력한 또아리를 틀고 있었던 이유는 이 영화가 가지는 기괴한 폭발력 때문일 것이다.훌륭한 배우들이 만들어내는 강렬한 캐릭터 플레이,막장 줄거리에도 불구하고 - 뭐,줄거리야말로 막장이다.약혼녀를 두고 있는 젊은 청년이 하숙집 여주인에게 성적으로 매혹당한 후 집착하고,결혼 전 순결을 고집하던 약혼녀가 거기에 자극받아 body에 body로 대응하고,결국 약혼녀를 살해하고 하숙집 여주인과 도망치다가 잡혀 사형당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인 것이다- 인간성의 내부를 파고 드는 치열함,피와 섹스 그리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파격적인 전개,그리고 스페인 영화 특유의 끈적끈적함이 그 영화 안에서 뜨겁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 끈적끈적함이야말로,막장적 결말을 두려워하지 않고 끝까지 밀어붙이는 이 스페인 영화의 어두운 결기야말로 내 기억을 향한 이 영화의 접착제였음에 틀림없다.그 후 나는 스페인 영화를 꾸준하게 찾아보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페드로 알모도바르를 만나게 되고 말았다.불륜과 섹스와 질투와 경멸과 광끼와 죽음이 관객을 숨 쉴 수 없을 정도로 만들었던 이 영화가 스페인 영화들을 향한 내 지시등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캐릭터와 캐릭터가 오직 돈과 섹스와 정념을 향하여 불꽃을 튀기고 그 속에서 온갖 인간사의 강렬한 열정들이 다 드러나고 결국 죽음을 향하여 줄달음쳤던 이 영화, 그 어떤 제동장치도 없던 세 사람의 아만테스(우리 말로 연인이라는 뜻이다).끝까지 가고 마는 것이었다.
내 기억 속에 남은 영화의 장면은 이거다.
결국 남자는 약혼녀를 살해한다.성당 앞.눈과 빗 속.여인은 오히려 죽음을 원한다.파국의 끝에 누군가의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약혼녀와 영화는 잘 알고 있는 것이다..약혼녀는 죽음을 원하고 차가운 빗속에서 남자는 살인을 선택한다.끔찍하고 끔찍한 결말이지만 이야기는 영화가 처음부터 달려왔던 지점에 정확하게 도착하고 마는 것이다.
물론 이 영화의 섹스와 죽음은 인간 자체만을 다룬 것이 아니다.영화의 사건들은 스페인의 독재자 프랑코 치하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그 안의 인간들이 벌이는 비도덕적이며 불유쾌한 사건들은 독재 치하의 비인간성과 일정 부분 관련이 있다.영화는 그런 쪽의 측면들을 전혀 피해가지 않는다.마치 폴커 쇨렌도르프 감독의 <양철북>속의 중산층 인간 군상들이 히틀러의 파시즘이 도래하려는 그 시기에 섹스와 도박에만 집착하는 것처럼 말이다.
몇 년 후,우리나라가 아닌 다른 나라에서 우연히 비디오 렌탈 샵에서 이 영화를 빌려본 후 나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우리나라 영화 관료들이 저질렀던 놀라운 가위질 말이다.영화의 원본 -그러니까 스페인의 독재자 프랑코를 능가하는 우리나라 공륜의 가위질 이전의 버젼이다 - 은 나와 ㅇ형이 한밤중에 보았던 영화의 장면들과 판이하게 달랐던 것이다.성기 노출,과감한 성애 장면,그리고 피의 처절함이 영화의 어쩔 수 없는 흐름과 더불어 그대로 숨쉬고 있었던 것이다.나는 우리나라 관리들의 놀라운 편집 능력을 목도하면서 당시에 내가 본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하는 생각에 잠기기까지 했다..
그래서..우리나라 텔레비젼 드라마에서 벌어지는 막장 드라마의 진행과 그 결론을 보고 있으면 실소만 터진다.차라리 눈에서 레이저가 나오고 귀신들이 빙의되고 캐릭터들이 막 사라져버리는 어떤 드라마가 차라리 막장의 본질을 추구했다는 생각까지 든다.물론 작가의 개인적 이력이 투영된 내러티브였겠지만...
아,그리고 이 영화에 나왔던 두 사람의 여배우,빅토리아 아브릴과 마리벨 베르두에 대해선 언젠가 한 번 언급할 날이 있을 것 같다.ㅇ형은 마리벨 베르두에,나는 빅토리아 아브릴에 푹 빠지고 말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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